INFP+ISFP의 연애

(2) INFP 여자의 연애, ISFP 남자의 연애

by 티워터

INFP 여자의 연애

INFP 여자는 원인은 모르겠지만 꽤 일찍부터 연애를 시작했다. 기억이 나는 사건부터 연애라고 치겠다. 동창들도 모두 알 정도의 기간과 인지도가 있는 연애는 중 1 때부터였다. 연애를 어떻게 시작하는지 모르는 나이였지만 별 어려움 없이 우리는 사귀기 시작했다. 교회는 같았지만 다른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였고 때문에 우리는 버스정류장에서 보고, 교회에서 보며 정확하게 사귀는 사이였다.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는지,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좋아했었다는 느낌은 아직도 어렴풋이 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사람을 보면 조금 떨린다.

두 번째 연애는 중3 때부터였고 그 역시 내가 먼저 대시한 건 아니었다. 누가 사귀자고 하고 티를 내기 시작하는지에 대해 계속 말하는 이유는 자랑이 아니라 내가 그걸 먼저 하지 못하는 타입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원래 남자가 먼저 고백하는 방식이 지배적이어서 그랬을까 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때는 그랬을 수 있다.

고등학교, 대학교, 남자친구가 군대에 다녀오고 내가 대학원에 갔을 때까지 거의 11년의 연애였다. 어릴 때 시작했지만 대학과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도 함께 했고, 군대와 취업, 결혼도 조금은 생각했던 심각했던 연애였다. 생각해 보니 난 좀 진지한 타입이다. 가볍게는 연애를 할 수가 없고, 진심을 보여야 진행이 된다.

시작이 어렵지 연애는 어렵지 않았다. 연애기간 내내 어떤 상황에서도 내 연애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나는 지루한 것, 평범한 것을 다소 싫어했고 항상 즐거운 것을 쫓아 함께 하려고 했고 그것이 즐거웠다. 거의 둘이 늘 붙어 다녔고 부모님도 알고, 결혼도 나름 생각했었다. 아주 안정적이고 결혼을 해도 될 만큼의 사이였지만 종교문제로 내가 너무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대는 바람에 상대방은 나가떨어졌다.

헤어진 지 한참 후에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동네가 작았기에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 일이 있었는데 너무 놀라서 심장이 고장 난 적이 있었다. 물리적으로 심장이 정말 고장 나서 병원에도 갔었다. 놀라서 그런 거니 우황청심원을 먹으라고 해서 먹고 나니 가라앉았던 기억이 있다.

하루 정도는 울면서 죽고 싶다고 말한 것이 기억이 나고 헤어지고 나서 한참 후에 한번 만났는데 헤어짐에 점을 찍기 위한 만남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왜 동네 곰탕집에서 만났는지 모르겠지만 거기에서 난 이렇게 얘기했다.

‘네가 그 애랑 꼭 결혼을 했으면 좋겠어!’

나랑은 완전 다른 타입의 여자였고 심지어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어서 헤어짐을 당한 입장에서 저주 같은 걸 한 셈이다.

싫어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전혀 얘기가 통할 것 같지 않은 부류의 여자랑 결혼을 한다고 하니 대체 나는 왜 사귄 건가, 취향이라는 게 있지 어쩜 저렇게 다른 여자랑 사귀는 건가 화가 났다. 자존심이 상했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행복해야 해라는 말과 사랑해서 헤어진다라는 말은 말도 안 되거나 적당히 사랑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헤어지면 무조건 밉다. 나랑 헤어지고 고생을 했으면 좋겠고, 별로인 사람 만나서 불행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헤어진 후에도 잘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무슨 심리인지 모르겠다. 그 이후로도 나는 절대 그 사람과는 연락하지 않으며 연락을 듣고 싶지도 않다.

곰탕집에서의 그 발언으로 정을 확 뗀 것이 내 정신건강에 엄청난 좋은 영향을 미쳤다. 연애할 때 최선을 다했고 내 심정도 확실히 전달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3번 남자는 대학 때 잠깐 만난 같은 과 동기였고 설레고 좋기만 할 초반에 희미하게 사귀다가 헤어졌다.

4번 남자는 2번 남자의 친구가 자신의 다른 친구를 소개해줘서 만난 사람이었다.

소개팅 자체가 제일 기억이 남는데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알리바바의 동굴 같은 입구로 들어가는 바에서 간단히 커피였는지 술을 마시고 꽤 오래 걸었던 것이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다. 불편함도 없었고 걷는 데이트는 정말 좋은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만남이었다.

그 친구는 내가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나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그 이후로 천안에서 남양주시까지 차로 오가며 만나다가 결국 사귀게 됐다. 출퇴근을 시켜주겠다며 선언을 하더니 급기야 밤에 아예 주차장에서 잔 적이 있다. 그 일이 내게 딱히 좋다거나 하진 않았고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 같아 말리진 않았다.

신앙에 있어 꽤 쿨 한 가치관을 갖고 있었고 그 점이 그 사람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돌이켜보니 굉장히 솔직했다. 나에 대한 감정도 그렇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자랑하고 싶다고 솔직히 말하고 자랑을 하는 점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은근슬쩍 하는 자랑은 더 꼴 보기 싫은 법이다.

교회도 같이 가고 신앙 관련 얘기를 포함해 여러 방면에서 얘기도 잘 통했지만 사랑은 꼭 잘 통해야만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1년 여를 만나고 헤어졌다.


4번 이후로 나는 연애를 하지 않았다. 연애는 할 만큼 했는지 전혀 아쉬움이 없었고 다만 소금구이가 먹고 싶은데 갑자기 같이 갈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를 빼고는 남자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놔둬도, 시간이 있건 없건 같이 할 사람이 있건 없건 재밌게 잘 노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INFP 여자의 비연애

베를린 3.3년

첫 직장은 지인의 소개로 덥석 들어간 곳이었는데 업무환경은 마음에 들었지만 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차에 GEO라는 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다큐멘터리 잡지였는데 사진이며 디자인이며 모두 내 마음에 똑 들었다. 이 잡지를 만들며 살면 좋겠다, 이 회사에서 복사하는 업무만 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알아보니 GEO는 독일에서 만드는 잡지였다. 회사 바로 앞에 YMCA사무실이 있었고 거기에 워킹홀리데이 광고가 붙어 있었고 간단하게 ‘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독일이 어디 붙어있는지, ABC도 모르며 지인도 없었지만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30살이 되기 전에 가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짧은 기간이지만 돈을 모았다. 마음을 먹는 게 어렵지 신청을 하면 그냥 가는 것이기 때문에 30살 생일이 되기 한 달 전에 출발하기로 했다.

준비는 어렵지 않았고 틈틈이 페이스북으로 베를린에 있는 독일인과 채팅도 하고 살 집과 독일어 어학원만 알아본 후 이민용 캐리어가방을 친구에게 빌려 떠났다.

1년이 지나고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가 워킹홀리데이에 온 걸 보고 이상하게 생각해서 알아보니 만으로 30살을 계산했어야 했는데 나는 한국나이로 계산해서 온 거였다. 덕분에 1년 일찍 갔지만 준비가 착착 잘 됐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나다운 치밀함이다.

30살이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나오고 보니 정말 어린애처럼 내 의지대로 살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초, 중, 고 생각 없이 다니고 대학교도 당연히 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졸업했다.

졸업을 하고 나름 해보고 싶은 공부가 더 있어 대학원을 다녔지만 나는 크게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했음을 독일에 와보니 느꼈다. 오랜 주입식 교육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가끔 조카에게 질문을 할 때 YES or NO로 대답하는 질문들만 잔뜩 하고 있는 날 발견했을 때 또 한 번 느꼈다.

그동안 나는 무얼 하며 산 걸까 생각해 보게 된다.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백지상태였고 전적으로 내가 결정해야 하며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걸 실감했다. 하지만 나는 꽤 오래 끌려다니는 삶을 살았고 주체적인 삶의 경력이 전무하기 때문에 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또 난 셀프 주입식 교육을 시작했다. 한국식 어학공부를 하고 책을 빌려 읽고 싶은 것들을 외우듯이 읽었다.

이제 난 자유로우니 무언가 기획을 하고 진행을 시켜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그동안 해보지 않은 타입의 작업이다. 내 삶에서 ‘기획’이라니…

베를린에서는 우선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어학원에 다녔다. 거기에서 만난 다국적 사람들과 친해져서 같이 놀러 다니기도 하고 특히 한국 사람들과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놀았다. 어학원은 2시간 정도의 수업을 했으니 시간이 널널했고 의무도 아니었기에 마음 편하게 지냈다. 끝나고 가고 싶었던 관광지에 가보기도 하고 장을 봐서 집에서 밥을 해먹기도 하고 은행계좌도 만들고 산책도 했다.

베를린에 가자마자 교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 간 교회가 너무 좋았고 나는 한국에서 꽤 오래 해온 주일학교 교사를 바로 시작했다. 교회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교회 행사에도 꽤 깊이 참여했다. 베를린 구석구석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놀다 보니 주변을 여행해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베를린에 간 지 1년이 넘어서 엄마와의 통화 중에 어디 다른 데 가보기라도 하라는 말을 듣고 ‘그래야겠다’고 생각하고 여행계획을 세웠다.

내 생애 생각지도 않은 첫 배낭여행이다.

암스테르담-바르셀로나-런던-코펜하겐

인터넷으로 항공권과 숙소만 잡아 무작정 떠났다. 떠나는 날 나는 독일인의 친절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깨닫는 사건이 있었다.

집주인아줌마는 호텔을 경영하고 있었다. 1층 현관에 접한 로비와 계단을 중심으로 우측은 아줌마와 남편이 살았고, 좌측은 객실 5개와 작은 다이닝 공간이 있었다. 2층의 로비 상부에 원룸인 내 방이 있었고 좌측과 우측에 각기 다른 세대가 살고 있었다. 내가 이 아줌마를 어떻게 소개받았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이렇게 2층짜리 빨간 벽돌 건물에서 살게 되었다. 뒷마당이 넓게 있었고 뒷마당을 나가면 강을 낀 산책로가 이어져 있었다. 잠깐 살게 되었지만 말 그대로 완벽한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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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에게 샌드위치와 커피가 조식으로 제공됐는데 내가 가끔 그 조식을 만들어서 밤에 식당에 갖다 놓거나 손님에게 열쇠를 주는 일 등을 도와줬다. 물론 돈을 받고 일을 했다. 월세도 굉장히 저렴했는데 월세와 아르바이트비를 주고받는 일에 있어서도 굉장히 깔끔했다.

아줌마는 집주인이긴 하지만 나에게 전달할 사항은 담백하게 전달했고 절대 ‘집주인 행세’를 하지 않았고 너무 과한 친절 또한 베풀지 않았다. 내가 여행을 가게 됐다는 얘기를 하게 됐다.

‘몇 시에 출발해?

‘5시쯤 집에서 나가야 할 것 같아’

‘그럼 지하철 역까지 태워다 줄게, 계단 앞에서 보자’라는 거다.

5시에 일찍 나왔는데 나보다 먼저 나와 계단에 앉아 있었다. 사과 한 개와 너겟바 하나를 넣은 에코백을 들고 말이다. 거의 나이대는 70대 초반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센스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놀라웠다.

아무튼 30분 정도 걸어서 가야 했던 지하철 역까지 나를 태워다 줬다. 그 뒤로 친절은 이렇게 베푸는 거지 하며 배웠다.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맞으면 딱 거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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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나라가 워낙 많아 어디를 가야 할지 고르기가 어려웠다. 자금이 여유롭지 못하니 호스텔을 위주로 골라 느낌만으로 마음에 드는 나라를 몇 개 고르고 숙소를 골랐다. 그 뒤로 나는 ‘숙소가 대체적으로 마음에 들면 그 나라는 내 마음에 드는 나라다’라는 법칙이 생겨서 좋은 숙소가 있으면 그 나라를 여행하기로 마음먹곤 한다. 이민가방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나는 캐리어가 없었고 정말 배낭을 메고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뒤로 산티아고 순례길도 다녀오고(유럽인들은 좋겠다 서로 가까운데 다 달라서) 유럽 여기저기를 여행했다.

이제 여기서 하고 싶은 분야를 찾아 공부를 해볼까 하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시각적으로 예쁜 것들에 기웃거리고 사진을 많이 찍는 걸 보니 이런 분야를 좋아하니까 시각디자인과로 정하고 입시 준비를 했다. 어학시험을 보고, 영어도 필요하니 영어학원도 끊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미대입시를 학원 없이 짧은 시간에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겠지만 여기서는 그 입시에 필요한 포트폴리오 형식이 자유롭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유롭기도 하지만 작업 수준도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도이거나 창의성으로 만회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집주인 독일아줌마가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무턱대고 응원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집에서 그리고 싶은 것들로 글씨인지 그림인지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이런저런 책들을 보며 난 뭐가 하고 싶지, 어떤 게 재미있지 찾아보며 포트폴리오의 독일어 Mape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 생애에 그렇게 자유로운 작업은 없었지 싶은 작업들을 했다. 굉장히 재미있었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입시라는 목표가 있었지만 입시목표에 맞춘 Mappe*가 아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옮겨 놓은 작업물을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퀄리티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시작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냥 진행했다.

이상하게도 독일아줌마는 퀄리티 같은 건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잘하고 있니? 어떻게 돼 가고 있어? 내가 아는 사람한테 한번 봐달라고 할까?’ 등의 질문들로 계속 나를 북돋아줬다. 허접한 것들이 눈에 보이다가도 아줌마의 응원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작업에 매진했다. 사실 그 질문에 창피하지 않을 정도의 열심을 내느라 약간의 압박이 있었을 정도였다.

몇 명의 사람들에게 내 결과물을 보여줬고 코멘트를 받았다. 이상하게도 말을 못 알아들은 건지 뉘앙스에서도 내 작업물들을 보고 비웃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소질은 없는 것 같아’라는 코멘트를 받고도 난 크게 좌절하지 않았다.

원래 난 지적에 굉장히 민감해서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는 정도의 충격을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여기에서의 코멘트들은 모두 부정적인 것들이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됐다. 학교에도 두 군데 지원했고 결과는 없었지만 조용하게 포기했다. 왜일까 왜 그렇게 평화롭게 포기하게 됐을까

우선 코멘트를 해주는 사람의 태도가 굉장히 건조했다. 애써 포장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있는 그대로를 감정 없이 말해준 느낌이다.

그리고 난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내 나름의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더는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다. 그 뒤로 난 입시는 접고 일을 찾았다.

주인집 아줌마의 소개로 건축사무소 인턴 일을 시작했다. 두 달 정도 일을 하고 있었는데 비자만료 날이 다가왔고, 인턴 비자로는 비자연장을 할 수 없었다. 집으로 외국인청에서 사람들이 방문을 했다. 내가 비자가 만료되어 가는데 출국하지 않느냐고 온 모양이다. 다행히 내가 없을 때 와서 맞닥뜨리지는 않았지만, 다시 만날 일을 생각하면 무서워서 그 길로 한국으로 들어왔다.

근데 왜 거기서 연애는 왜 안 했냐고 누가 묻는 사람이 있다. 단 한 건의 사건도 없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연애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온갖 이유를 대며 ‘이래서 못했네, 저래서 못했네’ 한다.

아니다. 그냥 없었다.

그리고 내 베를린 생활은 완벽했다고 생각한다.

*Mappe [마페] : 포트폴리오


본가 3.5년

베를린에서 돌아와 본가에서 지냈다. 꽤 오랜 기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더니 살도 불었고 내 마인드도 엄청 살이 쪘다. 더욱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싶어졌다.

그리고 몇십 년을 다니던 교회에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그전엔 몰랐는데 설교 때 성경말씀이 아닌 자기 이야기가 엄청 섞여 있었다.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베를린에 가기 전에는 신앙생활도 맹목적으로 했다는 생각이다. 무조건 순종이고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용한 압박을 받고 주입식 신앙을 가지며 살았었다. 베를린에서는 교회도 의무적이거나 습관적이 아닌 진짜 자의에 의한 출석을 했고, 집 앞 장미를 손질하며, 걸으며, 순간순간 말씀과 함께 살았다. 돌아오고 나니 기존에 하던 주입식 신앙은 거북했다.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그즈음 이런저런 교회를 찾고 있었는데 친척동생이 자기 교회에 놀러 오라고 해서 한번 가보고 단번에 ‘여기다’라는 생각이 드는 교회에 바로 출석하기 시작해 지금 10년이 넘어가도록 다니고 있다.

이제 눈을 뜨고 신앙생활을 하는 느낌이다. 정말 좋았고 끝없이 신앙에 대해 뒤집어 보고 노력도 하고 일탈도 해보고 있다.

베를린에서 돌아온 후로 나이가 33살이 되었기도 했지만 조금 변화한 나는 내 공간이 필요했다. 혼자 독립이라는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내 동생은 ‘엄마가 빨래도 해주고 밥도 주고 이렇게 좋은데 집을 왜 나가’라는 마인드로 집에 붙어 있길 원했기 때문에 이전에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다.

나와 내 동생은 어릴 때부터 한 침대에서 잤고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그렇게 살았지만 상황이 달라졌고 이런저런 얘기 끝에 엄마가 방을 하나씩 줄 테니 집 앞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고 했다. 정말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였고 훨씬 큰 평수에 집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 방을 하나씩 쓰고도 남아돌고 15평짜리 오래된 아파트에서 세 가구 살고 반지하에도 살았던 예전과는 비교되는 크고 번듯한 멋진 집이었다. 그곳에서 나만의 방을 꾸며 놓고 잘 사는 듯했다. 그런데 방 안에 처박혀 있자니 자꾸 부모님께 미안해졌다. 같이 있는데 방에 있자면 저 멀리서 엄마만의 행위를 하는 엄마가 약간 나랑 놀고 싶어 하는 것 같아 혼자 방에 있는 게 영 불편했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 그리고 뭘 먹자고 부르거나 무언가 물어보거나 하고 나면 내 시간은 깨진다. 싫은 건 아니고 ‘그게 뭐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부모님과 함께 뭘 먹거나 같이 놀게 된다. 그게 정말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 내 생활은 이어지지 않는 느낌이다. 그렇게 조금씩 독립에 대해 꿈틀대다가 결국 이사한 지 6개월 만에 나는 독립을 결정했다.

엄마는 이사에 든 비용이며 갖가지 세금이며 따지자면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할 판이지만 전혀 나를 나무라지 않으셨다. 우리가 어릴 적 넉넉하게 산 편이 아니었는데 어디서 저런 쿨함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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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1.6년

나와 내 동생은 내가 독일에 가기 전까지는 거의 같이 놀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날 무서워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베를린에 있는 동안 부모님을 잘 모시고 살았으며 내가 살짝 보고 싶기도 했나 보다.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우리는 여기저기 딱히 특별한 곳이 아닌 곳을 같이 여행하기 시작했다. 여행메이트로는 정말 최고였다.

나는 내 마음에 꽂힌 여행지를 무작정 가는 타입이고 동생은 그냥 따라가서 거의 모든 것에 토를 달지 않고 만족하는 타입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아무 말 없이 같이 가주는 사람이 동생이라니 정말 완벽했다. 춘천 소양댐, 제천, 청주, 원주 등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갔지 싶은 곳들을 주로 갔는데 잔잔하지만 거의 모든 곳에서 우리는 사진을 찍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만족스러운 여행을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경의중앙선에서 우리 안 가본 데 가보자며 지하철노선도를 보고 목적지를 골랐다.

‘효창공원역’은 듣도 보도 못했고 알아본 것 없이 집에서부터 경의중앙선을 타고 효창공원역에 내렸다. 아무 출구로 나와서 주변을 걸었다. 효창공원, 효창운동장, 백범김구기념관을 구경했다. 동네가 조용하고 안전하게 느껴졌다. 재래시장도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시골에 온 느낌이었다.

효창공원역을 지나 용산역 방향으로 가니 더욱 오래된 시골 같은 사거리가 나왔다. 사거리 한 모퉁이에 원효아파트가 있었고 그 아파트는 정말 유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감탄했다. 그 맞은편 건물 1층에 부동산에 왜 우리가 들어갔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집을 알아보러 온 사람처럼 갑자기 집을 알아봤다. 아주머니께서 좋은 집이 있다며 가보자고 하셨다. 우리는 또 밀어붙이면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골목을 막 걸어가더니 알 수 없는 곳에서 그 골목에서도 쑥 들어가 지어진 신축건물 4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이었어서 정말 아무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집을 보러 갈 생각도 아니었으면서 그 집이 마음에 들었다. 연락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이끌리는 대로 걸어 나온 지 1분 만에 넓게 트인 곳에 자리 잡은 효창공원역을 보고 감탄했다.

역 바로 앞이야!

그리고는 찍어온 사진들 보고 둘이서 괜찮았지, 꽤 좋았지 이러면서 갈까 말까 고민을 일주일 하다가 ‘같이 가자!’ 했다. 엄마는 나는 나갈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동시에 둘이 나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어려서부터 허튼짓을 하면 자꾸 혼내는 날 무서워했다던 동생은 언니랑 둘이 나가서 살래?라는 말을 듣고 ‘엄마는 그렇게 심한 말을’ 하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어서 몇 번 놀고 나니 나랑 노는 게 괜찮아졌는지 정말 속전속결로 우리는 같이 독립을 했다.

방이 2개였고 한쪽방에 드레스룸 같은 베란다가 딸려 있었다. 방을 하나씩 쓰면 좋겠다는 생각과 방이 거실을 중심으로 양 끝에 있어 서로의 방의 컨디션이 완벽히 비슷해서 더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주말이면 집 근처를 여행했다. 효창공원이 홍대까지 이어진 길을 가기도 하고 , 열정도라는 청년창업지원으로 번성하게 된 거리에도 가고 무슨 기독교 성지라고 하는 곳에도 갔다. 큰 경찰서 건물을 지나 숙대입구로 이어지는 동네길, 남영역 앞에 있는 갈매기살 고깃집, 남영역 철길 옆 야구배팅장, 볼링장, 전자상가, 용문시장 등 촘촘히 동네를 재밌어하며 즐겁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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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이 유럽여행, 특히 베를린을 같이 가기로 마음먹었다. 동생의 친구까지 해서 3명이 가기로 하고 비행기표를 끊었는데 여행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동생이 임신소식을 안겨줬다.

어쩌냐 저쩌냐며 울며불며 대화를 몇 번 하다가 ‘못 헤어질 것 같아’라는 말과 함께 둘은 부모님을 찾아갔다. 등짝을 때릴 뻔한 걸 참았다는 엄마의 얘기와 그 와중에 밥을 잘 먹고 갔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어이가 없었다.

그럼 내 베를린 여행은?

수수료 30만 원 정도를 내고 내 동생은 취소를 했고 난 혼자라도 갈 생각으로 동생 친구에게 연락을 하니 ‘둘이라도 갈까요?’하는 거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동생친구도 평화로운 아이였다. 그래 뭐 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지, 숙소도 다 예약했는데 혼자보다 비용부담도 덜고 해서 동생 친구와 같이 여행을 갔다.

내가 유럽에 있는 동안 유일한 언니인 나를 빼고 급히 상견례를 하고 동생은 날을 잡았다.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결혼 전에는 알 수 없고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결혼도 순탄하게 잘 끝낸 것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카가 태어나고 나서 나는 제부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저렇게 예쁜 아이를 낳았다고? 도망가지 않았다고? 더 열심히 일한다고?

효창공원역에서도 나는 바쁘고 완벽하게 연애 없이 잘 살았다.


광나루 1년

동생이 그렇게 결혼을 한 후 난 이제 정말 한국에서 혼자가 되었다.

둘이 내던 월세를 혼자 몇 달 내고 페이스북에 같이 살 사람을 구해봤지만 여긴 한국이지 싶게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고 혼자 살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직장은 성수동이었고 직장과 가까운 곳을 훑어봤다. 아무리 교통이 좋아도 혼잡한 곳이거나 술집이 많은 곳은 싫었다. 그러다가 내 취향에 조용한 곳을 찾다 보니 점점 서울을 벗어나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 직전에 있는 이 집을 발견했다. 나는 이곳을 찾고 정말 무릎을 쳤다. 이곳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갖춰진 곳이었다.

집을 한번 보고 나는 단번에 결정했다. 조용하고 한강이 보이며 한강변 산책을 1분 만에 나갈 수 있었다. 버스종점이라 앉아서 출근하고 퇴근 후 집에 올 때도 벨을 누르기 않고 마음 편하게 종점에서 내린다. 집 앞에 도서관이 있었고 책을 마음껏 빌려서 무거워도 1분 만에 집에 올 수 있었다. 건강식을 하는 식당이 역시 한강뷰로 있어서 몸이 아파 밥이 하기 싫을 때면 바로 가서 먹을 수도 있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만두집이 가까웠고, 편의점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로 딱 하나가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건 도서관세권이었다는 사실과 서울치고 굉장히 우아하게 출퇴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집의 구조도 마음에 들었고 눈이 올 때 한강을 보며 내다보는 뷰는 뉴욕 같았다. 후에 이사를 하면서도 이 집을 살까 고민을 많이 했다. 서울임에도 크기와 시설에 비해 비싸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잣대로 보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혼자 살게 된다면 죽을 때까지 이 집에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죽을 때까지 살면 물론 매매를 하겠지만 월세로 살면 얼마를 내야 하는지 계산해 보니 그리 매매에 비해 큰 금액이 아니었다. 집을 사면 내 재산이 된다고 하지만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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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집은 이후로 서울에서 원룸 집을 구할 때 보게 되는 참혹한 집들과는 급이 달랐다. 모든 집들과 순위를 매겨 보자면 5% 안에 드는 집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조카를 보러 매주 차를 타고 한 시간씩 다니기도 하고, 공공공간에서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의자와 커뮤니티에 관련된 사진들을 찍으러 다니기도 하고, 부모님을 초대하고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한 달간의 유럽여행을 가면서 이 집을 에어비앤비로 거의 한 달을 빌려주기도 했고, 절친 둘을 불러서 하루 같이 잔 적도 있다.

연애하지 않고 있구나 하고 느끼지 못할 만큼 잘 살았다.

졸업 후 맞지도 않는 플랜트 건축설계를 계속해왔다. 전환해 보기 위해 일반건축 회사로 옮기면서 이제는 건축 자체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공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이력서 뒷 장의 자기소개서에 억지로 건축을 하게 된 계기를 지어낸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베를린에 간 것도 건축을 접고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간 것이었다.

전공선택에 있어 아무 생각이 없었고 일을 할 때에도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생각 없이 그냥 일했다.

뭐라도 하다가 보면 재미도 생기고 한다는 얘기는 정말 맞지 않는 얘기이고 좀 더 신중했어야 했고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전환할 시기를 생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베를린에서 돌아와서도 의지가 있는 삶을 펼쳐보지 못하고 또다시 맞지 않는 일을 이어서 했다.

일을 하는 도중에 간 한 달간의 여행도 더 이상 건축을 하고 싶지 않아서 회사에 사직의사를 밝혔는데 그만두지 말고 잠깐 쉬라고 제안해 오셔서 무급휴가로 다녀온 것이다. 월급이 없는 삶과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조금 무서웠고 다녀와서 생각해 보자 했지만 돌아와서 또다시 월급의 굴레로 들어갔다.

동료들과는 지금도 가끔 만날 정도로 잘 지냈는데 1년 후 어깨 통증을 유발하는 협력업체의 횡포로 깔끔하게 사직서를 냈다. 돈이 없는데 무슨 돈으로 살 거며 뭘 하며 살건지 정하기도 힘들었다. 돈을 벌면서 생각해 보자는 생각으로 나는 또 이력서를 냈다. 이번에는 골라서 가보자는 생각으로 연봉을 높게 책정하고 고르고 골랐다. 연봉협상은 어떻게 하는 건지 알게 됐을 만큼 놀랍게도 협상 없이 내 예상 연봉 이상의 제안을 받고 난 또 직장을 다녔다.

그곳은 야근지옥이었다. 눈치지옥이었고 권위와 자연스럽지 않은 것들로 가득 찬 곳이었다. 이제 나는 정말 그런 곳에서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1년을 간신히 다닌 후 그만뒀다.

이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첫 직장 대학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할 생각이 있는지 묻는 연락이었다. 이제 내 진짜 진로를 찾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내 인생의 선택지에 전혀 있지 않았던 대기업에 플랜트 일이었기 때문에 선택을 하면 안 되는데 난 또 수긍했다.

이렇게 보니 나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니었다. 난 또 그 일을 하기 위해 출근을 했다.


금천구 1.6년

새로 들어간 곳은 눈치지옥은 아니었다. 계약직이었기에 좀 더 자유로웠지만 대체적으로 눈치는 보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곳이었다. 단 일은 밀도 있게 하는 곳이었는데 체력 좋은 내가 3시 정도가 되면 눈이 감길 정도였다. 일의 체계도 잡혀 있었고 친해진 사람도 있었어서 즐겁게 다녔다. 출근 스트레스가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단 출근이 문제였다. 광나루에서 금천구까지는 말 그대로 지옥철, 사람바다였다. 그렇게 출근을 한지 며칠 만에 이사를 결심하고 거의 바로 금천구로 이사했다.

첫 복층이다. 새집이기도 했지만 수납장과 높은 층고로 이웃으로부터의 소음을 완벽히 차단하는 점과 높은 층고 때문에 굉장히 좋은 컨디션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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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바로 앞에 있는 산책길이 너무 좋아서 100회의 산책 프로젝트를 만들어 걷기 시작했다.

피아노 연습실도 끊어서 다니고, 유럽에도 한번 다녀오고 제주 한달살이도 했다.

이곳은 아는 사람도 없고 주변도 고립되다시피 한 지역이라 집에서 혼자 놀았는데 집이 좋다 보니 정말이지 하나도 심심하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볼링클럽에 가입했다. 볼링이 처음 유행하던 시절에 이모에게서 배워 꽤 오랫동안 쳤기 때문에 용기가 생겨 동네 클럽에 나갔다. INFP 답게 볼링만 딱 치고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집에 왔다.

뒤풀이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고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마스크를 열심히 끼고 볼링을 치자마자 집에 왔다. 나는 그런 클럽들이 연애를 위해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나는 정말이지 순수한 마음으로 나의 취미생활 중 하나인 볼링을 즐기러 간 거였다.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연애사건은 없었고 볼링클럽은 뒤로 하고 설계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현장인 서산의 이사했다.


서산 0.4

그곳에 혼자 가는 게 전혀 싫지 않았고 오히려 좋았다. 임시숙소에로 가야 했고 서울에서는 월세로 지내고 있었기에 월세를 뺐다. 본가로 짐을 옮겨 놓고 숙소에는 현지에서 조달한 매트리스와 책상 하나만 놓고 지냈지만 열심히 내 집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임시숙소라 불편한 점이 있었지만 한적하고 자연을 찾아 떠날 필요 없는 곳에 산다는 것은 정말 좋았다. 퇴근 후 동료들과 벌천포에 가서 캠핑의자만 펼치고 맥주를 한 잔 하기도 했고, 마음 맞는 동료 한 명과는 여기저기 좋은 카페를 탐방하기도 했다.

논두렁을 보며 차를 세워 두고 음악을 틀고 성경을 읽기도 했고, 해변가에서 캠핑의자를 피고 쉬다 오기도 했다. 퇴근길에 어디로 가볼까 하고 생각하는 게 재미있었고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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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이라고 해도 서울보다 더 좋은 것들을 한적하게 즐길 수 있었다.

서울보다 더 좋은 볼링장도 한적했고, 서울에서 먹던 웬만한 만두보다 더 맛있는 만두집의 만두를 줄 서지 않고 먹을 수도 있었다.

서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동네에 있는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별생각 없이 들어간 곳이라 차를 가지고 가지 않았는데 배달이 되길래 배달을 시켰다. 배달지를 적어 제출하거나 할 필요 없이 직원에게 바로 얘기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시스템이었다.

오는 길에 꽃집에 들러 꽃도 사고 동네를 돌아다니느라 30분 정도가 지난 후에 집에 들어갔는데 나보다 배달이 먼저 와 있었다. 서울에서는 순서가 엄청 밀려 있을 텐데 이건 거의 집사급이다. 이런 밀착서비스를 받아보다니 정말 감동스러웠다. 그 뒤로 난 점점 서울이 미워졌다.

서울의 마트에서는 엄청나게 큰 규모의 마트에서 정신이 팔려 이것저것 둘러보게 되고, 엄청난 스킬의 판매공격에 더 사지 못한 아쉬움, 무언가 더 좋은 게 있을 것 같은 느낌과 돈이 모자라니 참아야 한다는 느낌, 주차 스트레스와 영수증의 압박 등등의 느낌을 받는다. 이건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무언가에 얻어맞은 느낌이다.

마트에 다녀오면 피곤하고 시간이 많이 흘러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용하고 느린 장보기를 하고 집에 가져다주는 서비스까지 받고 나니 나는 더 이상 이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대기업에서 집에 가져다주는 서비스, 새벽에 바로 가져다주고, 대폭 할인을 하고 1+1을 한들 그것들은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서울의 많은 서비스가 이런 식이다. 아주 공격적이고 내게 그다지 필요는 없지만 좋아 보이는 것들이다. 디자인이든 품질이든 뭐든 수준이 아주 높지만 판매자도 경쟁을 해야 해서 마음이 여유롭지는 못하다. 내가 그것을 가지려면 돈도 많이 필요하고 가져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나도 같이 힘들어진다.

정신을 차리고 뒤로 물러서 있지 않으면 나는 어느새 그것들을 갖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가 된다. 어느새 결재를 하고 있고 그것들이 한동안 내 머릿속을 맴돈다.

서산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런 환경에서 벗어나 있으니 그렇게 삶이 여유롭고 우아할 수가 없었다.

논이 점점 노래지는 걸 매일 지켜보고, 바람을 느끼며 책을 읽기도 하고, 꿩이 도로를 질러가는 걸 지켜보며 꿩한테 혼잣말도 한다. 주말마다 작정하고 어디에 가야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아무 때나 하게 되니 마음도 저절로 여유로워졌다.

서울에서는 누가 나에게 시비 비슷한 것들만 걸어도 금세 화가 나는 것에 대해 놀랄 때가 많았는데 누구나 알겠지만 환경 때문인 거였다.

그래서 난 시골(서산시민들에게 미안하지만 쉽게 그냥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나쁜 뜻이 아닙니다)에 사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서산에서도 연애는 없었고 빈틈없이 완벽한 생활을 했다.


성신여대 0.9+1.0+0.4+0.5년

서울로 올라가면 파견지는 철수를 했으니 나는 본사인 안국역으로 출근을 해야 했다. 계약직이었기에 계약이 끝나면 깔끔하게 나는 건축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직장이 없는 상태의 집은 어디로 얻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교회는 옮기지 않을 생각이므로 교회 옆에 집을 얻었다.

교회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테라스가 있는 집이 마음에 들어 온라인상으로 사진만 보고 계약을 결정했다.

집은 아주 마음에 들었고 테라스가 있는 집에 살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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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하고 처음 비가 온 날 나는 테라스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여태 살면서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거다.

본가는 5층, 효창공원은 4층, 광나루는 6층, 금천구는 8층, 서산 3층

나는 항상 떠있었다.

그 첫날 나는 리얼로 들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너무 좋고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억울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그리고 그 충격을 동영상으로 찍기까지 했다. 어쩜 나는 그렇게 살았을까

내가 INFP이기는 하지만 집에 사람이 오는 게 그렇게 좋았다. 물론 5년 이상의 친한 사람들에 한한 것이지만 그 행위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확장형 테이블을 계속 고집하고 의자들도 여유롭게 갖고 있었다.

사람들이 집에 가고 늘어놓은 여러 모양이 컵들과 접시들을 보고 있자면 기분이 정말 좋다.

사람들을 계속 초대하며 초대의 기쁨을 누렸다.

성신여대로 돌아와서도 볼링클럽에는 가끔 나갔다. 집에서는 멀지만 직장에서 퇴근 후에 전철로 가면 갈 만한 거리였고 볼링실력도 늘어가면서 재미를 붙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뒤풀이에도 나가기 시작했고 볼링클럽의 시스템에 점점 빠져들어 이런저런 번개모임에도 나가서 일주일에 세 번을 갈 때도 있었다.

아무리 솔직하게 말해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 마음이 생겨서 더 자주 나가게 된 것은 아니었다.

볼링은 치고 싶지만 멀기도 멀고 집에 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래도 번개모임이 인원이 모자라 폭파되지 않도록 하고 싶은 마음, 만든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몇 번 나가다 보니 탄력이 붙어 거의 정기적으로 정기전 외에 한 번씩은 더 나가게 되었다.

그즈음 아주 희미하게 누가 날 좋아한다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건 정말이지 너무나 미미하고 장난스럽고 가벼워서 얘기 소재로 나오다가도 1분 만에 사라지는 수준의 소식이었다. 그 대상은 당연히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살짝 눈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나는 좀 더 열심히 다녔다. 누군가 마음에 들면 나는 티를 내는 성격이 아니다. 그리고 그 정도가 ‘절대로’ 티가 나지 않게 조심하려고 하는 수준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혹시라도 오해를 할까 오히려 더 먼 곳에 있었다.

여기까지가 성신여대 0.9년 연애 비슷한 그 무엇도 없던 시간이다.


ISFP 남자의 연애

ISFP는 자기가 거의 모태솔로라고 했다.

몇 년 전 두어 달 만난 여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그마저도 정상적인 연애는 아니었던 것 같다. 사귀는 사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니 더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떨쳐내듯 끝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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