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날씨는 악명 높다. 유학 국가를 정할 때 가장 큰 고민은 '날씨 좋은' 호주와 2021년 당시 기준으로 '입국이 가능한' 영국 중 어디를 택할 것이냐였는데, 방구석 온라인 강의보다는 현지에 오기 위해 영국을 선택했지만 날씨에 대한 걱정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기후변화로 해마다 날씨가 오락가락하는 요즘 9개월 남짓 살아보고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한여름을 빼고 다 겪어보고 내린 결론은 '영국은 축복 받은 나라'지만, '겨울은 최악'이라는 것이다. 물론 글을 쓰고 있는 6월은 영국이 가장 아름다운 시점이기 때문에 시점 편향이 있을 수 있다.
나도 오기 전까지 몰랐던 사실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캔터베리의 위도는 북위 51도. 영국 최남단 도시 중 하나이니 영국 중부에 가면 모스크바(북위 55도)와 위도가 비슷해지고, 이미 캔터베리가 하얼빈(북위 46도)보다 위도가 훨씬 높다. 그러나 놀랍게도 겨울에도 영하로 잘 안 떨어지고 눈도 잘 오지 않는다 (다만 이것은 켄터베리 기준이다. 당연히 스코틀랜드 근처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위도를 모르고 막연히 영국이 우리나라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날씨 안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위도를 알고 나면 서안 해양성 기후는 그야말로 사기라는 생각이 든다. 봄과 가을 날씨는 환상적이고, 8월 최고기온도 평균 23도 정도라고 한다. 오늘은 heat wave 조심하라고 BBC에서 며칠 전부터 경고했던 날인데, 그래도 최고기온은 29~30도일 것 같다. 기온만 보면 이렇게 살기좋은 나라가 많지 않다.
5월 초 동네 풍경
그러면 도대체 왜 영국은 날씨 안 좋기로 유명한가? 내 생각엔 네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는 것 같다.
1. 겨울 해가 짧다.
일몰시간과 날씨는 별도로 봐야하지만, 해가 없는 것만으로도 춥게 느껴지지 않는가. 겨울에 3시반이면 캄캄해지니 추움과 어두움이 결합해서 '영국날씨'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개인적으로 영국날씨는 평균적으로는 한국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데, 한창 낮인데 컴컴한 영국의 겨울은 겨울이 끝날 때까지 적응하기 어려웠고, 되새겨보면 에세이를 써야했으니 해야할 일 하면서 겨우 넘겼던 것 같다.
겨울엔 3시반에 해가 지고, 여름엔 10시에 지니 일교차 때문에 수면장애도 생긴다. 생각보다 일몰시간이 신체와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영국에 와서 알았다. 그래서 겨울에 휴가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은 죄다 지중해로 떠나나보다. 11월 중순만 되어도 영국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시작하는데, 이것 또한 우울한 겨울을 잘 넘기기 위한 지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 우리 가족은 불가피한 일로 한국에 보름 정도 체류했는데, 한국과 영국의 겨울은 모두 힘들지만 그래도 모든 조건이 같은 상태에서 한국과 영국 중 어디에서 겨울을 날지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겨울만은 한국에서 보내겠다.
* 반면 춘분을 지나고 4월부터는 잔디와 나무가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자란다. 이 무지막지한 생장속도는 일조량 때문이 아닐까 싶다.
2. 주택의 보온기능이 약하다 + 겨울이 습하게 춥다.
영국의 겨울날씨가 실제보다 춥게 느껴지는 이유 두 가지이다. 먼저 주택의 보온기능. 내가 살고있는 집은 60년 정도 되었는데 영국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연식이다 (5년 미만 신축주택도 있긴 하지만 영국에선 30년 정도면 새 집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단열이 미흡하고, 와중에 온돌 없이 라디에이터만으로 보온을 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라디에이터 옆만 따뜻하다. 겨울엔 오리털 이불, 한국에서 가져온 온수매트, 따뜻한 수면잠옷과 양말 덕분에 겨우 잠들 수 있었고 일어나서 이불 밖으로 너무나 나가기 싫었다.
오히려 집 밖으로 나가면 한국보다 훨씬 덜 춥다. 다만 겨울에도 습한 탓에(그래서 기온이 안 떨어지겠지만) 추위가 뼛속까지 으슬으슬 스며든다. 겨울에도 비가 자주 오는데, 몇 번 파카가 젖는 바람에 과장을 좀 섞어 동상 걸리기 직전까지 갔던 나는 결국 방수파카를 구입했다. 알고보니 아이들의 방수파카는 빈곤 측정 방식에 따라서는 아동빈곤 측정 항목에 포함되어 있기도 했는데, 그만큼 영국에선 필수품목인 것 같다.
3. 비가 자주 온다.
영국의 봄 가을은 외국을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지만 (사실 한국인에게는 이미 외국), 하루 안에 여러 계절이 들어있다고 할 정도로 날씨가 변덕스러운 날들이 있다. 다만 경험 상 하루종일 비가 오는 것은 드물고, 엄청나게 쏟아붓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쨍하고 개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먼저 오신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내가 온 후로는 비가 안 오는 편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워낙 날씨가 변덕스러우니 영국 사람들은 우산도 잘 안 가지고 다닌다. 대신 (사무직들은 어렵겠지만 동네에서는) 후드티를 많이 입고 반드시 방수점퍼가 아니라도 비가 오면 모자를 뒤집어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가 오면 그러려니 하고, 날이 맑으면 미친듯이 야외로 나가는('미친듯이'는 내 얘기가 아니라 영국 문화 콘텐츠에는 자주 등장하는 표현) 것은 이 날씨와 공존하는 방식일테다.
4. 지중해 국가들이 가깝다.
앞서 말한 것이 절대적인 요인이라면, 상대적인 요인으로 지구에서 가장 축복받은 지중해 국가들이 가깝다는 것 또한 이야기해야할 것 같다. 지중해만 옆에 있지 않았어도 영국 또한 '4계절이 뚜렷한 금수강산'이라고 자국을 묘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거듭 말하지만, 내 기준에서는 영국도 겨울만 빼면 충분히 축복받았다.
결론적으로 영국 날씨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 일기예보 자주 보기, △ 방수점퍼와 파카 갖추기, △ 겨울엔 다른 곳으로 가거나, 못 간다면 보온용품과 조명, 기분전환할 거리를 충분히 갖추기, △ 봄부터 가을까지의 좋은 날씨는 충분히 즐기기로 정리할 수 있겠다. 겨울에 영국 여행을 와야한다면? 실내 중심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실제로 나도 아이와 11월말에 당일치기 런던 여행을 갔을 때 내내 어둡고 비가 왔는데 자연사 박물관과 V&A 뮤지엄에서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겨울만 빼면 햇살과 자연을 만끽할 수 있으니, 봄부터 가을 사이에 오기를 진심으로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