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도시 캔터베리의 유네스코 문화유산들
캔터베리로 온다고 했을 때 지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세 가지였다. "캔터베리 이야기의 그 캔터베리?", "캔터베리 대주교?"라는 반응이 나오면 영국을 좀 아는 사람들이고, 대부분은 차마 거기가 어디냐고 하지는 못하고 잠시 말을 잃어버리곤 했다. 그러면 나도 말해줬다. "사실 저도 거의 몰랐어요". 나 역시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캔터베리 이야기 제목 정도만 들어본 수준이었다.
10개월을 살아보니, 런던처럼 큰 재미는 없더라도 아기자기하고 평온한 살기 좋은 곳이다. 혹자는 요크나 캔터베리를 우리나라 경주나 공주 같은 도시에 비유하곤 하는데, 꽤나 적절한 비유라는 생각이 든다.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기차역에서 'Welcome to the Medieval City of England'라는 문구를 인상 깊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시내에 나가면 16~17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있고, 산업도시가 아니기에 시내 모습이 빅토리아 시대 사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다. 산업혁명 시기 중북부 도시들이 발전한 반면 캔터베리는 느리게 성장해서 중세 시기의 지위는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출처: https://localhistories.org/a-history-of-canterbury/), 오히려 이 점 때문에 종교도시로서의 상징성과 함께 관광도시로 먹고살 수 있는 것 같다. 날씨 좋은 날, 산책을 하다 보면 이 아름다운 마을이 우리 동네라는 점에 감사한 생각이 든다.
지금은 그렇게 매일을 보내고 있지만 곧 떠나야 하기에 그리워질 이곳, 캔터베리에 대해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캔터베리가 속한 켄트(Kent)주는 영국에서 유럽 본토와 가장 가까운 곳이다. 대부분 캔터베리는 몰라도 도버해협 덕에 도버는 알 텐데, 그 도버가 캔터베리에서 차로 30~40분 거리에 있다. 맑은 날 부산에서 대마도를 볼 수 있듯, 도버 성에서는 프랑스 칼레 땅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유럽 본토가 가깝다.
켄트 지방의 역사는 지리적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안의 도버 성이나 워머 성(Walmer Castle), 딜 성(Deal Castle) 등이 유럽의 공습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에서 지어졌고, 람즈게이트 터널(Ramsgate Tunnel)이 2차 대전 때 공습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듯이 전쟁의 영향이 컸던 지역이다. 또한 로마 시대 유적도 꽤 남아있는데, 캔터베리 시내를 감싸고 있는 캔터베리 성벽이 바로 로마 시대 유적이며, 이 지역에서 로마 모자이크를 비롯한 로마시대 유적들이 발굴되어 캔터베리 로마 박물관(Canterbury Roman Museum)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로마 박물관의 경우 지역 주민은 공짜이지만 관광객은 유료인데, 굳이 돈을 내고 들어갈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대주교가 있는 도시답게, 캔터베리의 가장 큰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종교도시라는 점이다. 캔터베리 인구는 66,851명에 불과하지만(출처: https://worldpopulationreview.com/world-cities/canterbury-population),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세 개나 있고 모두가 기독교의 전래와 관계가 있다. 첫 번째는 앞서 언급한 캔터베리 대성당이고, 다른 두 개는 성 어거스틴 수도원(St Augustine's Abbey), 성 마틴 교회(St Martin's Church)이다. 이 유산들의 기원은 로마가 영국 땅에서 철수한 이후, 앵글로색슨 왕국들이 난립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 어거스틴은 최초의 캔터베리 대주교로, 교황에게서 영국 땅에 가톨릭을 포교하라는 임무를 받고 캔터베리에 도착하게 되었다. 당시 앵글로 색슨 국가 중 하나인 켄트의 왕 애설버트(Æthelberht)는 프랑크 왕국의 공주 베르사(Bertha)와 결혼을 하였다. 실제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기독교 신자이던 베르사가 왕을 설득해서 성 어거스틴이 정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들 추정한다. 한편 기독교를 수용한 것은 베르사만의 역할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의 교세가 워낙 커서 앵글로색슨인 켄트 왕도 이미 기독교에 대한 인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출처: https://www.english-heritage.org.uk/learn/histories/women-in-history/queen-bertha-historical-enigma/). 잉글랜드에는 캔터베리와 요크 두 곳에 대주교가 있는데, 런던 대신 캔터베리가 선정된 이유는 베르사와 개종한 애설버트의 존재, 그리고 캔터베리가 프랑스에 가까운 점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세 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가장 아담한 성 마틴 교회는 베르사가 미사를 드렸던 곳으로, 현재 영국에서 교회로 사용하는 건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성 어거스틴 수도원은 성 어거스틴이 왕에게서 받은 땅에 건설된 수도원으로, 당초에는 작은 교회와 왕족 및 종교인사들의 묘지가 있었고, 중세시대 교육기관으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노르만 왕조에서는 프랑스인이 수도원장이 되는 것과 같은 종교계 내부의 정치적 변화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수도원 자체는 증축에 증축을 거듭했다. 하지만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산으로부터는 당연히 살아남기 어려웠으니, 번성했던 수도원 재산이 죄다 팔리고 수도원 건물들도 헐리는 과정을 겪었다 (출처: English Heritage Guidebook: St Augustine's Abbey). 켄트주에서 정원으로 유명한 워머 성을 방문했을 때 직원과 주고받았던 대화에 따르면, 성 어거스틴 수도원의 석재를 워머 성 건축에도 사용했다고 한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따로 글을 쓰겠지만, 가톨릭 성당인 람즈게이트 성 어거스틴 교회(St Augustine's Church)에서 나를 안내해주신 자원봉사자 할머니는 내가 캔터베리에서 왔다고 하니 "성 어거스틴 수도원에 가봤냐? (가봤다고 하니) 어쩜 그렇게 Brutal 하게 파괴할 수가 있냐"라고 분개하셨었다. 개인적으로는 가톨릭에서 헨리 8세를 비난하는 것은 십분 이해하지만, 의외로 여러 스캔들에서 불구하고 헨리 8세가 영국에서 사랑받는 이유인 국내 정치 업적은 수도원 해산 과정에서 축적한 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수도사들에게 연금까지 주는 노련함이란. 다만 과연 이렇게까지 파괴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는 하다.
캔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은 캔터베리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이다. 성 어거스틴은 캔터베리 성벽 안에 대성당을 건설하였는데, 이후 본래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고 11세기에 건립된 것이 지금 모습의 토대이다. 어거스틴의 본래 건물은 본당 바닥 아래에 있다 (출처: https://www.canterbury-cathedral.org/heritage/history/cathedral-history-in-a-nutshell/). 대성당이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영국판 왕권-신권 갈등을 잘 보여주는 12세기의 대주교 토마스 베킷(Thomas Becket) 살해 때문이다. 신권을 왕권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던 헨리 2세는 당초 예상과 달리 친교황파가 되어버린 베킷 대주교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결국 범죄를 저지른 성직자를 세속 법원이 추가적으로 처벌하도록 하는 클라레돈 법(The Constitutions of Claredon)에 베킷 대주교가 서명을 거부하면서 왕실은 베킷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베킷은 프랑스로 도주했다가 결국 캔터베리로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1170년, 대관식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권한임에도 불구하고 헨리 2세의 아들인 청년 왕 헨리(Henry the Young King)의 대관식을 라이벌인 요크 대주교가 행하게 된다. 분노한 베킷은 이 대관식에 참석했던 요크 대주교, 런던 주교, 솔즈베리 주교를 파문시켜 버린다. 참고로 캔터베리 대주교는 'the Primate of All England'이고 요크 대주교는 'the Primate of England'이다. 명칭만 보더라도 사이 안 좋을 게 예상이 된다. 아무튼 이런 갈등 끝에 헨리 2세 휘하의 기사 4명이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기도 중이던 베킷을 무참하게 살해하게 되는데, 헨리 2세가 "누가 이 골치 아픈 성직자를 좀 처리해주지 않겠나"라고 했다는 말이 유명하지만, 헨리 2세가 베킷 살해 명령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쟁이 있다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및 시티투어에서 들은 내용을 종합).
설명이 길었는데, 살해된 베킷 대주교가 순교자로 추앙되면서 유럽에서 캔터베리로 순례자들이 대거 오게 되었고 이것이 영문으로 인쇄된 최초의 문학작품 '캔터베리 이야기'의 배경이다. 제프리 초서가 쓴 캔터베리 이야기는 기사, 방앗간 주인, 장원 청지기, 요리사 등 각양각색의 31명의 순례자가 캔터베리로 오는 길에 나누는 이야기로 구성된 작품이다.
아름다운 교회나 궁전을 볼 때 내 마음속에는 늘 찝찝한 불편함이 꿈틀대지만, 그렇다고 역사적ㆍ문화적 가치까지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국에는 캔터베리 시내와 비슷한 느낌의 마을들이 많지만, 캔터베리의 이야기와 상징성은 아직도 관광객을 꾸준히 불러 모으는 힘이다. 캔터베리 시내에는 Chaucer Bookshop이라는 고서점이 있는데, 18세기에 지어진 이 고서점을 들어서면 캔터베리와 켄트 지역에 대한 출판물이 가장 먼저 꽂혀있다.
또 한편 캔터베리에는 세 개의 대학이 있어, 양면성이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