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사람 몫을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근본 없는 완벽주의는 이제 그만

by 새벽별반짝
드라마를 볼 수가 없다. 밥을 편안히 먹을 수가 없다. 머리를 꼼꼼히 감을 수도 없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 때문이다. 바로 '이럴 시간이 없는데...' 라는 생각.


나는 스스로에게 늘 기준 미달인 인간이었다

나는 잘 하는 게 없었다. 무엇을 해도 애매하게 했다. 바이올린도 배우다 말았고, 피아노도 치다 말았고, 운동도 하다 말았다. 공부를 곧잘 했지만 100점은 아니었고, 키는 크지만 날씬하지는 않았고, 친구가 있지만 많은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모든 면에서 참 못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보니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이 정말 많았다. 영어를 잘 하는 사람, 여행을 많이 다녀본 사람, 사회경험이 많은 사람, 선배나 동기들과 잘 지내는 사람, 교수님의 예쁨을 받는 사람... 이 세상에는 나보다 대단한 사람이 정말 많았다. 나보다 좋은 학교에 들어간 친구들, 나보다 인정받는 과에 다니는 동기들도 부러웠다. 나는 내가 마치 우주를 떠도는 먼지조각처럼 느껴졌다.


열등감은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살아서 나는 뭐가 될까? 그런 생각을 했다. 뭐가 되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지. 이 세상에 나 같이 모자란 사람이 설 자리가 있기는 할까? 나이가 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몸과 정신을 모두 집어삼켰다. 하루하루가 두렵고 불안했다.


두려움과 불안감은 내 삶에 깊숙히 뿌리내렸다. 나는 드라마를 볼 수가 없었다. 드라마를 켜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편에 한 시간. 드라마가 스무 편. 이 드라마를 다 보는 데 스무 시간. 스무 시간이면 책 몇 권을 읽을 수 있지?' 그런 생각이 들면 나는 드라마를 껐다. 결국 지난 십 년간 내가 본 드라마는 단 두 개다. <별에서 온 그대>와 <시그널>. 보고 싶던 드라마는 정말 많았다. 그렇지만 드라마를 보는 동안 마음 속에 일렁이는 불안감을 이겨내지 못해서 그 중 무엇도 보지 못했다.


끼니 때는 가만히 밥만 먹지를 못했다. 꼭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보거나, 강의를 듣거나, 아니면 적어도 '생각'을 계속 해야만 했다. 잠도 편하게 자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더 일찍 일어났어야지'라며 꼭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런 내가 마음 편히 잘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버스 안이었다. 버스 안에서 잠을 자면 잠을 자는 동안에도 어딘가를 향해 이동하고 있으니까. 잠 자는 데 시간을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 때 나의 생각은 이랬다. '나는 모자란 인간이니까, 내 모든 시간은 반드시 '더 나은 인간'이 되는 데 사용해야만 해'.



끝이 나지 않는 달리기

만약 내가 무언가 이루고 싶은 목적이 있었던 것이라면, 그 목적을 위해 시간을 쪼개어 사용하는 것이었다면, 우울증이라는 결말을 맺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다른 일들은 잠시 미뤄두는 것이다. 이 때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사람은 나다. 나는 여전히 내 삶의 주체다. 둘째는 기한과 목표가 있으니까. 성공이든 실패든 끝이 있다. 나를 지워놓는 생활은 이 일이 끝날 때까지만 지속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목적이 없었다. 단지 '내가 부족한 인간인 것 같아서' 그래서 '능력을 쌓아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주로 직업을 갖고 돈을 벌기 위해 필요할 것 같은 능력을 개발하는 일, 즉 영어 공부, 중국어 공부, 성적 관리, 스펙 관리, 인맥 유지, 체력 관리 같은 일들에 시간을 쏟았다. '내가 부족한 인간인 것 같다'라는 두루뭉실한 이유로, '능력을 쌓는다'라는 애매한 노력을 했다. 그것을 위해 내 삶에서 나를 지워갔다. 내 삶에서 나는 점차 객체로 밀려났다. 게다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은 없었다. 나는 영원히 나에게 '부족한 인간'일 테니까. 나는 영원히 '능력을 쌓아야' 할 테니까. 그래서 결국 이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오늘도 내일도 나는 기준미달인 인간인데
나 같은 인간이 대체 왜 계속 살고 있을까?


당시의 나에게는 참 서러운 '사실'이었다. '얼마나 더 노력하면 만족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나의 엄격한 잣대 앞에서 나는 죽는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무기력한 존재에 불과했다.



버려뒀던 나를 발견하다

우울증에 걸려 더 이상 혼자 외국에 머물 수 없게 된 이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동생에게서 너무 좋은 향기가 났다. 동생에게 물었다. '너한테서는 왜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 동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응? 요새 향수 안 뿌리는데? 샴푸 냄새인가? 섬유유연제 냄새인가?' 이상했다. 동생과 나는 한 집에 산다. 우리가 쓰는 샴푸와 섬유유연제는 모두 같은 제품이다. 그런데 왜 동생에게서는 향기가 나고 나에게서는 악취가 나는 것 같을까? 나는 멍해졌다.


기분 탓은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유를 찾았다. 같은 샴푸를 써도 나는 머리 감는 시간이 아깝다며 머리에 물을 뿌리고 샴푸를 마구 얹고 서둘러 헹궈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동생은 달랐다. 거품을 듬뿍 내어 두피 구석구석을 매만져 주고, 샴푸 향을 만끽하고, 물로 꼼꼼히 헹궈주었다. 자신을 위한 일에 '시간 아깝다'라는 개념은 없었다. 천천히 이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나에게 쓰는 시간을 수전노처럼 아까워했구나.
그것도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열등감과 불안감을 이기지 못해 그렇게 살았구나.



근본 없는 완벽주의는 이제 그만

나는 내가 한 사람 몫을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한 사람 몫'이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중국에는 용을 이렇게 묘사한 기록이 있다.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몸통은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라고 말이다. 내가 나에게 부과했던 '한 사람 몫'이라는 것도 이런 것이었다. 인간관계는 저 사람처럼 잘 하고, 공부는 저 사람처럼 잘 하고, 스피치는 저 사람처럼, 영어는 저 사람처럼, 운동은 저 사람처럼, 몸매는 저 사람처럼, 표정은 저 사람처럼, 생각은 저 사람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장점을 짜깁기해서 내가 되고 싶은 멋진 나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 모습은 '오늘 이 곳의 나'와는 아무 접점도 없는 상상 속의 인물이었다. 마치 용이 '상상 속의 동물'인 것처럼 말이다.


이제 나는 시선을 '오늘 이 곳의 나'에게로 돌리려고 한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려고 한다.

'한 사람 몫' 같은 건 없어. 넌 지금도 충분히 멋진 존재야. 그냥 오늘을 잘 살아. 그렇게 매일매일을 잘 살아. 그거면 돼.


만약 근본 없는 완벽주의로 괴로워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에게도 이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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