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치는 내가 매겨야만 한다. 그것이 맞다.
마음의 병이 점차 깊어져 갈 무렵이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나를 산산조각내는 결정타가 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인턴으로 일하던 사무소에는 많은 직원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내가 업무를 보조해 드리지는 않지만 사무소에서 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직원이 한 분 계셨다. 그 분은 내게 이런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인 것 같은데 나는 너무 힘든 사람
큰 목소리에 재치있는 입담, 치고 빠질 때를 아는 눈치, 사회생활 만렙을 찍은 듯한 노력함, 어마무시한 정보 습득력과 상황 판단력. 그 분의 능력은 공작새처럼 화려했다. 마치 나에게 '사회생활은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모범답안 같았다. 나는 그 분으로부터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런데 그 분과 가까워지기가 참 어려웠다. 그 분에게는 '아랫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야지'라는 체크리스트가 있었고 나는 그 분의 입맛과 동떨어진 아랫사람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나의 추측이다. 그 분의 진짜 마음은 그 분만이 알 것이다.
나는 그 분과 잠시라도 말을 섞고 나면 나는 꼭 무언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그 날도 그랬다. 탕비실에서 음료를 만들다 그 분은 내게 대뜸 이런 말을 하셨다.
"이 업계가 참 좁아. 서로 다른 사무소끼리도 다 알고 지내거든. 이력서 낸다고 하면 우리끼리 서로 전화해서 다 물어봐. 만약에 너가 어디 사무실에 지원했어. 그쪽 사무소에서 나한테 전화해서 너가 어떤지 물어보겠지? 만약에 내가 '아~ 그 친구 참 괜찮아요~'하면 되는거고, '아... 그 친구... 글쎄요...'하면, 우리끼린 다 알아들어. '아--- 그렇군요---'하고 안 뽑는거지"
다른 부연 설명은 없었다. 이를테면 갑자기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라던지, 이 이야기가 떠오르게 된 배경이라던지 하는 것 말이다. 탕비실에서 음료를 만들다가 무심결에 하는 수다 정도로 치부하기엔, 듣는 이에게 너무 섬뜩한 내용 아닌가? 그 분은 상대방에게 아무 목적 없이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던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너무 노련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당시에 그 말이 어떻게 들렸냐면
'협박'으로 들렸다.
'나한테 잘 보여라'는 협박 말이다.
그 날의 일은 유리처럼 약해진 내 마음에 날아든 돌멩이가 되었다. 내 마음을 산산조각냈고 나는 몇날 몇일 밤을 잠들지 못했다. 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는 이 업계에 발을 들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영원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야인(野人)처럼 살아야만 할 것 같았다. 겨우 발을 들이더라도 온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나를 배척하고 손가락질할것만 같았다. 나는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마치 덫에 걸려 옴싹달싹하지 못하는 동물처럼 말이다.
나는 원래 레퍼런스 체크를 두려워했다. 그 사람은 그 때 바로 나의 가장 약한 부분에 칼을 찔러 넣은 것이다. 나는 왜 그토록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불안해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스스로 나의 가치를 매길 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주의깊게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나의 어떤 점이 빛나는지 알지 못했다. 누군가 '너는 참 빛이 나'라고 하면 그런 줄 알고,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하면 또 그런 줄 알았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것, 미지의 영역은 언제나 우리에게 크든 작든 두려움을 안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의 가치는 저 사람의 평가에 달려 있는데'
그래서 나는 언제든, 어디서든, 누굴 만나든 타인의 평가에 전전긍긍하고, 타인의 반응에 노심초사하고, 타인의 감정에 휘말리곤 했다.
우리는 크든 작든 타인의 평가에 신경을 쓴다. 특히 나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다 못해 불안에 시달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이치에 맞는 일인가? 온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나와 평생을 함께 산다. 나의 겉모습과 속마음을 두루 아는 사람도 오직 나 뿐이다. 나라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도, 생각을 나누는 깊이도 내가 독보적으로 많고 독보적으로 깊다. 그런데 대체 왜, 왜 나보다 나를 한참 모르는 사람들이 나의 가치를 매기도록 하는가? 그리고 대체 왜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가?
이것은 마치 보석을 쥐뿔도 모르는 사람에게 감정을 맡기는 것과 같다. 이 보석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어떤 보석이든 흠은 있다. 그러나 어떤 보석이든 나름의 아름다움도 있다. 흠을 평가해도 내가 평가하고, 아름다움을 평가해도 내가 평가해야 한다. 타인이 이 보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늘어놓는다면, 참고는 해줄 수 있겠지만 월권은 용납할 수 없다. 그는 이 보석을 잘 모른다. 결국 이 보석의 감정서를 작성하는 것은 나다.
'이 보석의 감정서는 내가 작성한다. 내가 작성한 감정서가 가장 정확하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이 보석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내가 최고의 전문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많이, 그리고 누구보다도 꼼꼼히 이 보석을 들여다 봤어야 한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확실히 이 보석의 가치를 단언할 수 있어야 한다. 누가 봐도 이 보석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어야 하고, 그래서 누가 와도 내가 매긴 가치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어야 한다. '자기 성찰'. '깊이 있는 자기 성찰'이 바로 나의 가치를 내가 매기고 이를 인정받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나의 가치를 스스로 매길 줄 알면, 나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다른 이들의 말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들은 나라는 입체 도형의 단면밖에 모른다. 고작 단면만 보고 도형이 찌그러졌네 어쩌네 하는 사람들의 말은 당연히 신뢰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입체적이다. 하지만 나는 상대방의 모든 면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는 상대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이 있을까? 없다. 또한 내가 나를 잘 모르는 이들의 평가를 귀담아듣지 않는 것처럼, 그 역시 그를 잘 모르는 나의 평가를 귀담아듣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의 가치를 매길 줄 아는 능력은 우리 모두가 입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그래서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나를 만든다. 그리고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나를 만든다.
나는 레퍼런스 체크가 두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쥐뿔. 그런거 개나 주라지'라고 생각한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8개월 동안 나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나는 생각보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다.
먼 미래의 어느 날 내가 한 사무소에 이력서를 낸다고 하자. 그 사무소에서 정말 탕비실의 그 분에게 전화를 걸어 나에 관해 물을까? 뭐, 묻는다고 치자. 만약 그 분이 '아... 그 친구... 글쎄요...'라고 대답한다면, 상대방은 정말 '아--- 그렇군요---'하고 나를 안 뽑을까? 탕비실의 그 분이 내게 '경고했던' 것처럼?
에이. 만약 그렇다면 아마 다시는 탕비실의 그 분께 레퍼런스 체크를 위해 연락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분의 안목이 형편없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테니 말이다.
표지 사진: Photo by Elijah O'Donnell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