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나만의 '원칙'은 있어야 한다.
짐 캐리 주연의 <예스맨>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노(no)'를 입에 달고 사는 부정적인 한 남자다. 친구의 소개로 한 세미나에 참석하고 난 후 그는 모든 일에 '예스(yes)'라고 답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의 삶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짐 캐리의 유쾌한 연기가 빛나는 이 영화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는가를 재미있게 그려낸다. 삶을 바꾸는 긍정적 마인드는 바로 '예스(yes)'와 '노우(no)'라는 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영화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예스(yes)'인지 '노우(no)'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예스(yes)'라고 말할지 아니면 '노우(no)'라고 말할지를 결정하는 내 안의 '알고리즘'이다. 이 알고리즘을 다른 말로 내 안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나는 어떨 때 '예스(yes)'하고 어떨 때 '노우(no)' 할 것인가?
이 질문의 답이 바로 나의 '원칙'이다.
나는 비겁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남의 눈치를 보며 '예스(yes)' 혹은 '노우(no)'를 결정했다. 좋고 싫음에 대한 판단도 선뜻 하지 않았다. 왜? 두 가지가 두려웠다. 첫째, 내가 '아니다'라고 혹은 '싫다'라고 말했을 때 상대방이 나를 미워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상대방의 안색을 살펴 그에 맞춘 반응을 해 주곤 했다. 둘째, 내 생각을 말했는데 부정당할까봐 두려웠다. 내 생각이 부정당하는 것은 마치 나 자신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나는 원칙 없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나를 잃어갔다. 나의 시간과 감정은 늘 다른 사람에 의해 흔들거렸다. 원칙을 다루는 방법도 잊어갔다. 나는 언제나 상대방의 눈치를 보고 맞춰 주는 방법을 익히는 데에 급급했다. 자신의 원칙을 세우고, 다른 사람과 부딪히고, 나의 원칙을 고치거나 상대의 원칙을 설득하는 이 모든 과정을 그저 회피했다.
나를 희생해 가며 다른 사람과 잘 지내 보려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내가 언제나 하하호호 웃는다고 해서, 언제나 긍정적인 대답을 해 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가식적이라며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런 사람들이 나도 싫어져서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늘 날을 세웠다. 하지만 역시 잘 되지 않았다. 차가운 태도에 거절과 반박을 일삼는다고 사람들이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모든 상황이 너무 싫었다. 내가 문제인 걸까, 사람들이 문제인 걸까. 미궁에 빠진 듯 답답하기만 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한다. 나에게 사람들의 마음, 그리고 그것의 복합체인 인간관계는 도대체 알 수가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사람은 잘 모르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졌다. 그리고 내가 싫었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해내는 관계 맺기를 이토록 어려워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나는 왜 나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런 일에 힘들어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에 대한 자괴감은 한데 뭉쳐 나를 짓눌렀다. 오랫동안 짓눌린 마음은 결국 곪아 터졌다. 8개월 동안 우울증을 치료하며 계속 원인을 고민했다. 6개월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 무렵 졸업논문을 잘 마무리했다. 그 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사들였다. 수십 만원 어치의 책이었다. 그 중에 일부가 '말'과 '인간관계'에 대한 베스트셀러들이었다. 스무 권 정도. 그것을 모두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다.
'뭐야... 전부 다르잖아?'
그 모든 베스트셀러들이 하는 말이 전부 달랐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이다'하는 포인트가 작가마다 달랐던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같은 상황을 두고 완전히 상반된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왜일까? 고민 끝에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정리했다.
'원래 정답이 없는 거였구나'
인간관계란 원래 정답이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같은 상황이라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나만의 기준, 즉 '원칙'이 그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하루 동안 나의 원칙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말과 행동은 무수히 많이 있다. 앞서 '예스(yes)' 또는 '노우(no)'라고 단순하게 이야기했지만 삶이 어디 그렇게 단순하던가. 생활 속에서 표현되는 방식은 아마 이보다 훨씬 다채로울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오늘 나는 전화 중국어 수업을 했다. 전화 중국어 수업에는 '녹음 서비스'가 포함되어 있다. 매 시간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은 내게 녹음 파일을 보낸다. 그런데 오늘 전화를 끊기 전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깜빡하고 오늘 수업 녹음을 안 했어, 미안해!" 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사람은 'yes, 상관 없다'라고 말하고 넘어갈 것이다. 녹음 파일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녹음 파일이 중요한데도 '상관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선생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no, 상관 있다'라고 짚고 넘어갈 것이다. 녹음 파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혹은 수업료를 내면서 맺은 약속대로 서비스를 받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는 선생님과의 관계가 오늘의 녹음 파일보다 더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상관없다"라고 말했다. 복습은 그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억나는 내용을 스스로 메모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내용은 선생님에게 따로 여쭤봤다. 물론 예전의 나였더라도 "상관없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엄연히 다른 대답이다. 예전의 나는 선생님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할 대답을 찾아서 그것을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선생님과의 관계가 녹음파일보다 더 중요해'라는 나의 원칙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했다. 전혀 다른 마음으로 전혀 다른 의미의 말을 한 것이다.
나만의 원칙을 세우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나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이 좋고 싫은지? 무언가를 희생하더라도 꼭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이것을 스스로에게 묻고 그 답을 잘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매일 우연히 마주치는 무수한 상황들에 대해 나의 답들을 적용해 보아야 한다. 나는 사람들의 반응이 두려워서 원칙을 지웠고, 원칙을 숨겼다. 그랬던 나날들을 후회한다.
사람들은 내가 나의 원칙을 내세운다고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내가 고민한 원칙에 따라 '예스(yes)' 또는 '노우(no)'를 이야기할 때,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사람들은 오히려 나의 '예스(yes)'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나의 '노우(no)'에 순수하게 수긍하게 된다. 즉 원칙 있는 yes와 원칙 있는 no는 존중받는다.
또 사람들은 나의 원칙이 자신의 원칙과 다르다고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원칙이 다르다면 오히려 우리는 모두 '원칙을 가진 사람'이라는 한 울타리 안의 가족인 셈이다. 다만 우리가 가진 원칙의 '내용'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각자의 원칙을 설명하고 생각을 조율하면 될 일이다. 나를 지우고 타인에게 맞추기에 급급하던 과거의 삶보다 훨씬 낫다.
매일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긍정 혹은 부정, 동의 혹은 반대와 같은 단순한 선택일 수도 있고, 다양한 반응 혹은 행동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수도 있다. 그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봐서, '다들 이렇게 하니까'라는 생각 뒤에 숨어서 나의 행동을 결정해서는 안된다. 똑같이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봐서 행동하더라도, '난 주변 사람들과 비슷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라는 기준이 있는 것과, '다수의 의견이 중요하니까...'라고 나를 지워버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나는 원칙 없는 사람으로 살았던 나의 그 시절이 마음 아프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때로 돌아가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라고 나를 달래 주고 싶다. 너의 생각을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지 않을 거라고 알려주고 싶다. 미움 받는게 무서워 차라리 스스로를 지우려 했던 나를 토닥여주고 싶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예전의 나처럼 살아가고 있다면, 그에게도 나의 이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다.
표지 사진: Photo by Nathan Dumlao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