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뻗어 보다. 지푸라기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향해.
"그 상황이 되면 브레이크가 안 걸리나요?"
몇일 전, 유서를 쓰고 숙소 밖으로 나간 이야기를 듣던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는요?"
나는 그러고 나서 여기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했다. 선생님은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잘 하셨네. 그래도 자기 스스로 이렇게 찾아오셨네."
가슴이 울컥했다. 내가 틀리지 않았어. 여기까지 오길 잘 했다. 그런 생각이 들어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의사 선생님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 곧이어 나를 다시 바라본다.
"치료해야 돼요. 약도 먹어야 하고. 조금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최소한 6개월"
그렇구나.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수 있는 걸까.
"지금 이야기한 증상들은 이 약 먹으면 돼요. 약 먹으면 확실히 좋아져요. 일단은 아주 적은 용량부터 시도해 볼게요."
의심이 많은 나다. 확실히 좋아질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생각한다. '피그말리온 효과를 유도하시는 건가?' 선생님은 이미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처방전을 입력하고 있다. 방금 전, "잘 하셨네"라는 칭찬을 들은 순간 느꼈던 작은 희망의 빛을 떠올린다. 약을 먹으면 좋아질 거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그냥 단순하게 믿기로 결심한다.
유서를 쓰고 밖으로 나가 뛰어내릴 곳을 찾았던 그 날. 결국 방으로 돌아와 다급하게 검색창에 '우울증 응급약', '우울증 약', '우울증 치료', '정신과 진료' 같은 검색어들을 입력했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병을 돌보는 의사들의 이야기를 허겁지겁 찾아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결정했다.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로. 병원에 가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우선은 병원을 알고 있을 것 같은 선배에게 연락을 해 본다. 아는 후배가 우울증이 심해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다며 병원을 수소문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는 동생이 우울증이 심해서요'라고 둘러대며 병원 정보를 물었다. 북경대 제6병원. 우울증을 잘 본다는 의사들의 이름도 알려주신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메신저 앱을 닫는다. 내일, 퇴근하고 가 봐야겠다.
퇴근길에 찾은 병원 접수 창구는 이미 불이 꺼져 있다. 접수 창구 유리 위에는 <접수 시간: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4시까지>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미 오후 6시가 가까워지는 시간. 병원에는 아직도 사람이 북적인다. 상황을 살펴 보려고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는 쪽으로 가 본다. 의사 진료실 앞이다. 접수는 4시까지였는데, 오후 6시가 되도록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중국의 병원은 늘 이렇다. 의사는 적고 환자는 많다. 접수 시간에 맞춰서 오면 안 되겠네. 새벽 여섯 시 전에는 도착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린다.
그로부터 이틀 후. 출근하지 않는 날. 크리스마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한다. 택시를 타고 병원 앞에 도착하니 여섯 시. 아뿔사, 이미 늦었다. 문도 열리지 않은 병원 앞에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다. 줄을 서 있는데 앞뒤 사람들이 말을 건다. 다짜고짜 "넌 어디서 왔니?"라길래, "난 외국인인데. 너는?"이라고 물으니, 다른 성에서 왔다고 한다. 아... 전국구로 유명한 병원이었구나.
7시 15분. 병원 문이 열린다. 병원에 들어서며 번호표를 받으니 34번이다. 창구에 가서 줄을 선다. 그런데 이상하다. 창구에 의사 선생님들의 이름이 걸려있는데, 절반은 "꽉 찼음"이라는 글자가 써 있다. 내가 진료를 보려고 했던 선생님들도 마찬가지다. 저렇게 많은 선생님들이 벌써 환자가 다 찼다고? 그럼 저 선생님들이 다 접수를 안 받는다고? 에이, 설마~ 뒷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 믿을 수 없다. 옆사람을 붙잡고 다시 물었다. 확인사살이다. 내가 옆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또 하는 것을 본 뒷사람이 소리친다. "내가 그랬잖아! 맞다니까!"
7시 30분. 접수가 시작된다. 그나마 접수가 가능했던 절반의 의사 선생님들도 이름 아래에 "꽉 찼음"이라는 글자가 달리기 시작한다. 내 차례가 왔다. 이미 남은 것은 이름 아래 적힌 진료비가 가장 저렴했던 두어 명의 선생님들 뿐. 에라, 모르겠다. 그냥 내가 원래 진료를 보려고 했던 선생님의 이름을 던졌다.
"그 선생님은 꽉 찼어. 진료가 미리 예약된 환자만 볼 수 있어"
"나 예약되어 있어"
뻔뻔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했다. 접수원이 잠깐 흔들린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다. 나에게 다시 묻는다.
"너 이 병원 처음 오는거 아니야? 어떻게 예약이 되어 있는데?"
"추천해 준 사람이 있어. 메일로 연락됐어."
아무 말이나 막 던졌다. 그런데,
"그래? 알았어. 그러면 선생님한테 가 봐. 가서 싸인 받아오면 바로 접수해 줄테니"
통한다.
하지만 문제는, 싸인을 받아올 재간이 나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칫, 허술하지 않네. 터덜터덜 창구에서 발을 돌렸다. 이미 거짓말을 해버린 이상, 다른 선생님으로 접수를 하기도 글렀다. 창구 앞에는 아직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다시 줄을 설 수도 없다. 아쉬운 마음에 차마 병원을 뜨지 못하고 로비의 플라스틱 의자에 가 털썩 앉는다.
왜, 병원 진료를 보는 것조차 이렇게 어려울까...
스멀스멀 나를 향해 기어오는 의문들. 내가 무방비 상태라는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왜, 거짓말을 했을까? 왜, 나는 이렇게 멍청할까? 왜, 모든 일이 이렇게 힘들까? 애초에 왜, 나는 여기까지 오게 된걸까? 왜, 이 지경이 됐을까? 왜? 왜? 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계속 나를 후벼파도록 놔 두면 안될 것 같다. 핸드폰을 꺼내 숙소로 돌아가는 택시를 잡는다. 내 몸을 타고 올라오는 의문들을 털어내 버리려는 듯 병원 밖으로 서둘러 나간다. 곧바로 도착한 택시에 몸을 싣는다. 택시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본다.
멀리 쫓아낸 줄 알았던 의문들은 내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또 다시 나를 향해 다가온다. 왜, 자꾸 눈물이 날까? 왜, 나는 무던하지 못할까? 왜, 나는 더 강하지 못할까? 왜, 나는 이럴까? 왜? 왜? 왜?......
감정의 둑이 무너지려는 찰나, 택시기사 아저씨가 나를 부른다. 태연한 표정으로 요금을 지불하고 차에서 내린다. 숙소 건물을 향해 걸어가는 길. 어제 내린 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오늘 또 한 번 눈이 내릴 듯 공기가 희다. 크리스마스지. 하얀 크리스마스. 원래 같았으면 너무 행복했을 완벽한 크리스마스의 모습. 아주 어린 시절의 어떤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눈을 부비며 베란다를 내다보았을 때 간밤에 내린 함박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던 그 모습이 기억난다. 그 때와 같은 하얀 세상, 하얀 공기. 그 때와 다른 나, 내 마음. 이 생각에 이르르자 이제 더는 견딜 수가 없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나를 계속 공격하던 의문들에 의해 내 마음의 성이 함락되어 간다. 그 녀석들이 몰려온다. 마구 밀려 들어온다.
한국으로 가야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가야돼. 한국으로, 한국으로 가야돼. 한국으로. 숨이 가빠졌다. 결국 눈물은 터져 버렸다. 방을 향해 마구 내달렸다. 숨은 더 가빠진다. 한국으로 가야돼. 방에 도착하자마자 황급히 노트북을 펼쳤다. 심장박동도 호흡도 제멋대로다. 눈물이 터져 나와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손이 떨린다. 두 시간 후에 뜨는 비행기가 있다. 당장 표를 사고 벌떡 일어나 캐리어를 끄집어냈다. 뭘, 뭘 챙겨야 하지? 설에 한국에 들어갈 때 엄마에게 주려고 지난 번 출국 때 면세점에서 샀던 설화수 화장품 세트. 동생 부탁으로 샀던 피지오겔 크림 세트. 읽으려고 책상 위에 꺼내 뒀던 <총, 균, 쇠>, <해양 제국>, <김우중과의 대화>. 노트북과 여권. 엉망진창인 감정상태 치고는 놀라운 아이템 선정이다. 핸드폰을 꺼내 택시를 불렀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택시가 빠르게 잡힌다. 방을 한 바퀴 돌며 콘센트를 뽑고 전자제품의 전원을 껐다. 다시 한 번, 가방 속의 여권을 확인하고 캐리어 손잡이를 잡아 쥐었다. 한국으로 가야 돼. 가서 도움을 받아야 돼. 숙소 밖으로 달려나갔다. 택시는 이미 도착해 있다. 손을 뻗어 딸칵, 택시 문을 열었다.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붙드는 심정으로, 택시 위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 온 뒤 동생과 웃으면서 농담을 해요. 두 시간 후에 뜨는 국제선 비행기를 결제해서 타고 온 나는 "진정한 지구 여행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