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롱 Apr 21. 2024

늙으니 비로소 보이는 남편의 지혜

오늘도 배웁니다


 늘 가성비, 효율을 따지는 나와 달리 남편은 본인의 안위를 가장 우선순위에 둔다. 얼마 전 결혼한 동생 부부가 월요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 집에서 새벽에 출발한다는 얘기를 듣고 남편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됐다. 

 "전날 공항 근처에 가서 자는 게 낫지 않아?"

 "애들은 집에서 자는 게 편할 수도 있지."

 "그래도 그 새벽에... 난 못해, 못해."

 남편은 아침잠이 워낙 많아서 일찍 일어나야 할 일이 있으면 근처에 가서 자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집을 사랑하고 집밖에 모르는 나는 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숙박비를 쓰더라도 하루 컨디션이 좋을 수 있다면 근처에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남편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생활신조 중 하나는 '예약은 필요 없다'이다. 우리는 MBTI가 P라서 계획형 인간은 아닌데 나는 유독 예약에 집착한다. 특히 어딜 가려고 하면 기차가 있는지부터 알아보는 (버스 시렁) 병적인 습관이 있다. 한 번은 남편과 같이 친구들 모임에 가기로 했는데 금요일 저녁이라 집에 돌아오는 기차가 여의찮았다. 

 "냅둬, 그냥~ 없으면 서서 오면 되지~"

 "금요일이라 입석도 없다구."

 "우리 탈 자리는 있어, 냅둬~"

 "아, 아니라니까 그러네"

 모임에 가는 내내 악착같이 새로고침을 눌러 결국 예약을 했고 남편에게 힘껏 생색을 냈다. 

 "내 덕분에 집에 편하게 가는 줄 알아."

 "뭘 또 힘들게 했어, 그냥 냅두지~"

 하지만 우리는 그 기차를 못 탔다. 낯선 동네에서 역으로 가는 버스 타는 곳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 시간을 놓쳤기 때문이다. 힘들게 예매한 기차를 취소하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까 새로고침 백오십 번 눌러서 예약한 건데..."

 "그러니까 내가 냅두라고 했잖아~"

 결국 예약이 필요 없는 다음 기차를 타고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예약을 해도 안 해도 집에는 올 수 있는 것이었다.


 허구한 날 동동거리는 나와 달리 남편은 느긋하고 걱정이 별로 없다. 다음 달이면 같이 산 지 5년이 되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원래도 걱정이 많았던 나는 결혼하고 걱정이 더 많아졌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날이 좋은 날은 눈이 부시지 않을까 비가 오는 날은 길이 미끄럽지 않을까 별 걱정을 다한다. 걱정 평민에서 걱정 왕으로 진화한 느낌이다. 

 며칠 전 생신을 맞아 엄마를 모시고 일본에 다녀왔다. 엄마의 보호자이자 가이드이면서 재롱둥이 등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세상만사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요즘 일본에 감염병이 돈다던데, 지진이 나면 어떡하지 걱정은 정말 끝이 없었다. 급기야 나의 걱정은 국가 안보로 뻗어나가는데... 

 "여보, 내가 일본 가 있는 사이에 전쟁 나면 어떡하지?"

 "뭐라고?"

 "갑자기 북한이 쳐들어오면 어떡해? 그럴 수 있잖아."

 수화기 너머 남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걱정 왕 마누라가 미쳐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했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돌아오지 말고 일단 일본에 있어야지. 거기가 더 안전할 테니까."

 아니 뭐 그런 헛소리를 하냐고 나무라도 이상하지 않은데, 걱정에 ㄱ도 관심 없는 사람이 진지하게 받아주니 아, 내가 지금 진짜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때부터 걱정이 줄고 잠도 잘 자고 여행도 무사히 다녀왔다. 오늘도 남편에게 지혜를(?) 배운다.


photo by 우리 엄마 란이 씨


매거진의 이전글 6연승의 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