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은우 Sep 23. 2015

잔꽃 (스터디 주제: 30분이 흘렀다 15.04.17)

작문 스터디 #2015년 4월 17일 주제 : 30분이 흘렀다




  쭈글거리는 얼굴의 주름은 그녀가 연신 미소를 지을 때마다 깊어졌다. 서쪽 동산을 너울너울 넘으며 기우는 햇살은 혼신을 다해 타올랐고, 그 메아리가 어렴풋이 따스한 빛으로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오목한 주름에 그늘은 깊게 파고들었고 그 깊이는 그녀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깊어 보였다. 그녀는 누렇게 바랜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한 때는 한껏 고운 짓을 했을 진분홍 잔꽃무늬가 소담히 삭아있었다. 그 꽃들은 넓은 밭에서 그녀가 홀로 호미질을 할 때, 그녀의 머리 위에서 재잘재잘, 까르르 대며 이따금 부는 산들바람에 흐드러지며 함께 늙어왔을 것이다.


  옥수수가 익어가는 토담 아래 평상에서 그녀는 내 곁에 앉아 내 손을 연신 쓰다듬고, 손가락 하나하나 셈을 하듯 짚고, 도톰한 손바닥 살을 조몰락거리었다. 허여멀겋고 통통히 살이 올라 물렁이는 내 손은 그녀의 두툼하고 거친 손과 대조되었다. 여린 내 손을 품은 단단한 손의 온기를 느낄 때, 그녀의 뱃속에서 느꼈던 안도감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이윽고 내 등을 쓸어내리며 나를 품에 안고서 "잘 왔다. 고운  것"이라 말하는 내 어미의 품 속에서 애써 버티며 잡고 있던 보잘 것 없는 내 깡다구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서울살이는 녹록지 않았다. 어린 시절, 이 외딴 시골에 다큐극장인지 무엇인지를 찍겠다고 카메라를 맨 아저씨가 불쑥 왔었다. 들킬세라 전신주 뒤에 숨고, 철이 아저씨네 대문 뒤에 숨으며 카메라를 쫓아 다녔었다. 투박한 검은 카메라 앞에서 이장 아저씨는 주절주절 이야기를 풀어댔다. 아저씨의 수다를 잠자코 들은 뒤 카메라는 가만히 세워져서는 마을의 소가 지나가는 것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노랗게 물든 황금 들녘을 죽 스치는 카메라 렌즈가 순간 '반짝' 빛나는 것을 봤을 때, 신비한 눈빛과 눈을 마주친 것 같았다. 나는 저것으로 세상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을 담아 보겠답시고 8년 전,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서울로 향했다. 이윽고 오늘에서야, 서울의 회색 먼지를 퀘퀘히 뒤집어 쓴 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무엇이 세상인지 알지 못한 채, 초점 없이 내게 할당된 분량을 채웠다. 방송사의 성격에 맞게, 프로그램 타이틀에 걸맞게, 방송물 좀 먹었다는 잔뼈 굵은 선배의 '이건 이렇게 해야지.'란 훈계에 내가 담은 세상은 이리저리  짜깁기되어 완성되었다. 약 30분. 내 세상도 네 세상도 아닌 30분 간의 영상은 덧없이 세상에 보여졌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영상을 두 번 볼 수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메라의 빨간 불을 켜는 데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아무  말없이 짐을 싸들고 온 나를 품에 안고서 내 몸과 마음에 가득 낀 회색 먼지를 탈탈 털어내는 양, 등을 쓰다듬으며 '고운 것'이라 말하는 내 엄마. 그 품 속에서 티 없이 맑은 아가로 돌아간 듯 싶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냐고, 무엇이 고민이어서 이리 쓸쓸히 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햇살이 좋은 날, 마당에 빨갛게 익은 고추를 잘 펴서 널어 말리는 일을 도와달라셨고, 이따금 장을 볼 때 따라 나서길 바라셨다. 잘 익은 옥수수를 삶아 마루에서 호호 불어 나눠먹고, 밭고랑에 핀 봉숭아를 따다 희희 호호 서로 손에  물들여주었다. 맛깔나게 무친 나물을 그녀는 내 입에 쏙 넣어주며 해사하게 웃었고, 주말에는 읍내 목욕탕에서 서로 등을 밀어주며 우리는 두런두런 일상을 함께 보냈다.


  그렇게 함께 몇 계절을 보냈다. 어느 날은 잠이 들지 않아 옆에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코롱코롱 컬컬한 숨을 내쉬며 잠든 그녀의 모습은 여렸고, 고왔고 그리고 퍽 늙었었다. 그녀의 얼굴에 파인 주름들은 그녀가 살아온 시간 동안에 울고, 웃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견디고, 미소 짓는 표정들의 흔적일 것이다. 나는 문득 그녀의 표정들을 간직하고 싶어 졌다.


  소담스러운 그녀와 나의 일상에 이따금씩 카메라를 놓고선, 잔잔한 눈빛으로 그녀를 지켜보게 했다.

어느 날은 그녀에게 옛날 아가씨적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더니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마을 축제 때, 고운 치마를 입고 소고춤을 추던 일을 말해주었다. 탱그랗게 부푼 볼을 말갛게 물들이며 곱게 춤을 추는 소녀였던 자신의 모습을 추억하는 그녀의 표정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느 날은 햇빛에 바싹 말라 포슬거리는 이불에 그녀는 눈을 감고 볼을 비볐다. 얼굴에 포근한 미소가 번졌다.

어느 날은 그녀와 내가 함께 소풍을 가려고 옷장에 아껴뒀던 옷으로 잘 차려 입고선 머리도 꼬불꼬불 말고 화장을 했다. 빨간 루즈를 바르며 그녀와 나는 깔깔 웃어댔다. 그녀의 표정은 신이 나서 활짝 웃고 있었다.


  어느 날은, 그녀는 심장이 멎어 세상을 떠났다. 길가에 핀 민들레처럼, 소담히 살다가 어느 순간에 고요히 꽃잎을 거뒀다. 몇 해 동안 그녀와 함께 지낸 시간들이 꿈결같이 아른거렸다. 이로부터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문득 그녀가 떠난 빈 자리가 헛헛할 때면 그녀의 표정들을 담은 카메라의 기록을 찾아 또 다른 세상으로 그녀를 부른다.


  그녀의 모습을 담은 영상 속, 그녀는 몇 번이고 미소 지었고, 그녀가 그리울 때면 어김없이 화면 속에서 내게 고운 표정을 지어주었다. 그녀의 표정들을 모아 다듬은 영상을 틀고 30분이 흘렀다. 끝을 말하는 까만 화면이 고요히 흘러나왔다. 마치 그녀의 주름을 깊숙이 비추는 화면 같았다. 수없이 표정을 지었을, 미소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도록 한, 그녀의 세월들을 어렴풋이 상상한다. 내가 진정 담으려고 했던 세상이자, 그녀의 세상은 그녀가 짓는 표정 속에 깃들어 있었다.



keywor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