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병 너 이 새끼
가족과 친구의 방문으로 정신없는 겨울을 보냈다.
'나 퇴사 질렀어.'
라는 메시지 두 시간 만에 두바이행 티켓을 끊은 친구가 도착했고 마치 어제 만난 사이처럼 이곳저곳을 쏘다니다가 친구를 보내고 나니 부모님이 오셨다.
3주간을 정신없이 보내니 어느덧 부모님의 출국날이 되었다.
저녁 9시 비행기라 서두를 것도 없어 느지막이 일어나 세수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보다 일찍 일어난 아이가 그런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엄마 왜 코가 빨개?"
하며 이상한 것을 봤다는 표정으로 총총총 할머니에게로 돌아갔다. 눈물을 삼키려고 화장실에서 심호흡을 25번 정도하고 거실로 나가보니 부모님은 먹을거리를 가득 넣어 왔던 그 캐리어를 열고 돌아갈 짐을 싸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니 다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황급히 방 안으로 도망쳤다.
솔직히 나는 살가운 딸은 아니었다.
부모님이 여행 와 계시는 동안도 툭하면 투덜대기 일쑤였다. 사실 내 인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살갑지 않은 딸로 살아왔다. 스무 살이 넘어 시작된 외국 살이로 함께 지낸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기도 했다. 쌍둥이를 낳고 아이를 돌봐줄 손이 필요하자 그제야 부모님 곁에서 살기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도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다.
쌍둥이를 낳고 손이 부족해 전전긍긍할 적에도 엄마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헬스장으로 가버렸다. 그때는 그런 엄마가 참 서운했고 내 옆에서 손을 보태주는 이모님이 더 고맙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에 와서야 그런 엄마의 모습이 이해가 되고 때론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말이다.
부모님과 3년 만에 만났어도 우린 특별한 감정표현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있었기에 아이들을 사이에 두고 하는 말이 전부였다. 부모님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니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렇게 자빠져 울고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쫓기듯 살아왔던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나는 스스로의 마음조차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나 보다. 부모님이 떠나는 날이 다가오자 나는
홀로 남겨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섭고
슬펐다.
부모님이 출국장으로 떠나는 순간에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고 그런 나를 지켜보던 딸아이는
”엄마, 나는 마음속으로 울었어. 왜냐면 내가 울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해피하지 않거든. “ 이란다. 일곱 살 먹은 어린애보다 못한 내가 참으로 꼴사납다 생각했다.
퉁퉁 부은 눈을 가리고자 선글라스를 쓰고 아이를 하교시키러 나가는 길에 몇 년을 알고 지낸 인도 친구를 만났다. 우리 부모님이 한국으로 돌아가셨다는 걸 아는 그녀가 내 몰골을 보더니
“향수병으로 마음이 힘들지? ” 그런다.
“나도 부모님 만나러 인도 다녀오면 떠날 때 마음이 너무 안 좋아. 이렇게 오래됐는대도 우리 아빤 아직도 울어.” 란다.
휴.
다 그렇구나.
다들 마음속에 그리운 마음 하나쯤은 안고사는 거구나 하니 그간의 끙끙대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이러나저러나 삶은 계속되고
시간이 지나면 이 마음도 점차 희미해질 것이라는 위안으로 하루를 보낸다. 그러다 보면 다시 내 나라 한국으로 돌아올 날이 찾아올 테지.
내일은 밀린 집안 대청소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