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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inssoon Feb 21. 2019

첫 만남, 너흰 기적이었어

신생아 집중 치료실(NICU)에서 보낸 한 달을 돌아보며.

 오전 9시 30분, 통제구역의 문이 열린다. 10여 분 전부터 도착해 손을 씻고, 위생 앞치마를 입고, 휴대폰을 소독한 후 초조하게 기다리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언뜻 보면 특별한 공통점이 없는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정으로 조금 일찍 세상에 태어난 이른둥이의 엄마 아빠들이다. 출산 후 합병증으로 중환자실을 오가느라 3일 만에 아이들을 만나러 간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고픈 마음과 달리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가장 마지막으로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 들어섰다. 그사이 신생아 집중 치료실 출입 4일 차가 된 남편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나를 이끌었다. "누구 먼저 만나볼래? 슈복이? 또복이?"


 예정대로 태어났다면 신생아실 창문 너머로 나란히 누워 있는 두 아이를 동시에 만났겠지만, 두 달이나 일찍 태어난 아이들과 첫 만남이 이뤄진 곳은 대학병원 신생아 집중치료실(NICU), 두 개의 인큐베이터에서였다. 순서를 정해야 한다면 1분이라도 먼저 태어난 첫째 아이부터 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작구나, 정말 작구나.



 핑크색 종이가 붙어 있는 인큐베이터 앞에 먼저 섰다. 성별에 따라 색깔을 구분해놓은 듯한 이 종이엔 이름(000 아기 1), 성별, 출생일과 출생 시 체중, 재태 기간, 주치의 이름 등이 적혀 있었다. 출산 3일 만에 딸아이를 처음 만난 느낌은 '작구나, 정말 너무 작구나'였다. 3일 동안 남편이 찍어온 사진들을 보고 또 보면서 혼자 상상했던 것보다 실제가 훨씬 작았다. 내 생에 이렇게 작은 아기를 본 적이 있던가, 아니 상상이나 했던가 싶을 만큼...


 하루 두 번 아이들 면회만 다녀오면 어깨가 축 늘어져 한 동안 말이 없던 남편의 마음도 와락 이해가 되었다. 그 작은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고 싶어 더듬더듬 인큐베이터에 손을 올려보았다. 처음 만져보는 인큐베이터는 딱딱했고, 생각보다 따뜻했다. 한 달, 아니 몇 주라도 더 품고 싶었던 내 아이가 엄마의 체온 대신 의지하고 있는 인공의 온기, 그곳에서 아이는 작은 등을 들썩이며 힘겹게 세상에 적응하고 있었다.  


 아이를 보러 가기 전엔 인큐베이터를 붙잡고 너무 많이 울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 눈물에 가려 아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염려와 달리 아이 앞에선 이상할 만큼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 덕에 눈물의 방해 없이 맑은 눈으로 한참 동안 잠든 아이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태명을 부르며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더 오래 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 순간, 내내 눈을 감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반짝 눈을 뜨더니 내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내가 보이는 것도, 내 말을 이해한 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마치 '사랑한다'는 말에 답하듯 힘겹게 깜빡이는 까만 눈동자를 보니 애써 담담했던 마음 한편이 저릿저릿했다. 글로만 배웠던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라는 말이 내 목과 혀로 절절히 와 닿는 것 같았다. 그건 우리의 첫 교감이자 그 작은 아이가 내게 보낸 위로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예감했다. 1670g으로 태어난 이 아이는 무탈하게 자랄 것이고, 앞으로도 이곳에서 내가 눈물 흘릴 일은 없을 거라고 말이다.


 잠시 먹먹해진 마음을 추스르고 이번엔 파란 종이가 붙어 있는 인큐베이터 앞에 섰다.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선 쌍둥이라고 인큐베이터를 나란히 배정해주는 배려 같은 건 없다. 철저히 아이의 건강 상태에 따라 정해진 구역에서 케어하는 것이 원칙인 듯하다. 둘째 아이는 (의료진의 기준에 의하면) 좀 더 나은 상태였다. 몸무게는 고작 120g 더 나갈 뿐이지만 첫째 아이와는 거리가 많이 떨어진 (좀 더 상태가 괜찮은 아이들이 머무는) 구역의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었다. 한 아이만 보기에도 너무 짧은 30분을 쪼개어 두 아이를 봐야 하는 것도 아쉬운데 아직 온전치 않은 몸으로 멀리 떨어진 두 인큐베이터를 오가자니 정말 1분 1초가 아까웠다.        

    

 임신 중 유난히 태동이 심했던 둘째 아이는 내 배보다 훨씬 크고 넓은 인큐베이터에 혼자 누워 있는 것이 의외로 편안해 보였다. 태동은 태아가 기분이 좋을 때 하는 행동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상하게 나는 둘째 아이가 태동을 할 때마다 왠지 이건 불편함의 표현이란 느낌이 들곤 했다. 그래서인지 팔다리를 쭉 펴고 쌔근쌔근 자고 있는 아이를 보니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더 작은 아이를 먼저 봐서 두 번째는 충격이 덜했을 수도,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이 상황을 나름 합리화 혹은 스스로 위로하고 싶은 본능 탓에 내 눈과 마음이 이상 반응을 보인 걸 수도 있지만, 둘째 아이는 첫째에 비해 좀 더 편안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30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사랑에 빠진 연인과 헤어지기 싫어 몸부림치는 사람들처럼 남편과 나는 마지막 1분까지 두 인큐베이터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그리고 '혹시라도 둘 중 하나를 덜 봐준 건 아닐까?' 싶어 애가 탔다. 결국 나올 때도 마지막으로 신생아 집중 치료실 문을 나섰고, 내 뒤로 통제구역의 문은 굳게 닫혔다. 다음 면회까지는 9시간! 문이 닫힘과 동시에 나의 기다림은 다시 시작되었다.           


한 달, 기적이 일어나기 충분한 시간



 그로부터 한 달, 하루 두 번씩 애틋한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었다. 면회 시간엔 담당 간호사가 그날그날 달라진 아이의 몸무게, 분유 섭취량과 다른 특이사항을 알려주는데 그 숫자들은 매일의 희비를 결정할 만큼 당시 내게 절대적인 의미였다. 워낙 작게 태어난 아이들이니 단 5g이라도 늘었다면 그렇게 기쁠 수 없었고, 반대로 몸무게가 줄었다는 날엔 하루 종일 속이 상했다. 대부분 아이들은 양수의 수분이 빠지느라 출생 후 일정 기간 동안 몸무게가 줄어든다고 하는데, 다시 출생 시 몸무게를 회복하는데 짧게는 며칠, 길게는 2주가량 걸린다고 했다.


 다행히 둘째 아이는 며칠 만에 몸무게가 증가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더 작게 태어난 첫째 아이는 날마다 15g, 20g, 때론 50g씩 몸무게가 줄었고, 보름이 지날 때까지 출생 시 몸무게를 회복하지 못했다. 수유량도 처음엔 단 몇 ml부터 시작해 조금씩 늘려가는데 입에서 위까지 연결된 튜브로 미숙아 분유를 천천히 주입한다. 아직 빠는 능력이 없는 이른둥이에겐 이렇게 튜브를 통해 분유를 공급하고, 2시간 후까지 소화가 되지 않고 위에 남아 있는 분유는 뽑아내 제거한 후 다음 수유를 진행한다. 매일 아이들을 보러 갈 때마다 오늘은 수유량이 조금이라도 늘기를, 분유를 모두 잘 소화시키기를, 토해내지 않기를... 그래서 하루빨리 쑥쑥 자라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돌이켜 보면 신생아 집중 치료실 출입 초기는 한마디로 '일희일비의 나날'이었다. 아이의 몸무게는 하루 만에 100g이 늘었다가 바로 그다음 날 105g이 줄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도 들쭉날쭉 얼마나 요동쳤는지 모른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그 숫자들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몸무게나 수유량이 줄더라도 다른 코멘트가 없다면 그것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몸무게가 며칠 연달아 줄어도 주치의는 '괜찮다', '곧 회복될 거다',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한다. 건조하고 단호한 말투에 순간 속이 상해도 두고 보면 그 말은 맞다.


 정작 심장이 철렁하는 순간은 몸무게와 수유량 외의 이야기가 나오는 날이다. 둘째 아이가 자꾸만 이유 없이 분유를 토해서 장에 대한 정밀 검사를 한다거나, 두 아이 모두 하루 몇 차례씩 서맥이 나타나 24시간 심전도 검사를 한다거나, 심장에 구멍이 있다는(이른둥이가 아니라도 신생아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증상이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구멍이 막힌다고 하지만) 등의 말을 들으면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숨 막히는 불안감을 달랠 길이 없다. 하지만 더 심장 떨리는 일은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선 그보다 두려운 일이 허다하다는 사실이다.


 그 작은 아기의 심장을 수술해야 한다거나, 폐에 이상이 발견된다거나, 수유량이 도무지 늘지 않아 정밀 검사를 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며칠에 한 번씩 이웃 인큐베이터에서 들려온다. 그보다 심각한 이야기는 상담실에서 따로 전달되는 듯한데, 가끔 상담실 문이 오랫동안 닫혀 있으면 그 안에서 또 어떤 부모의 억장이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는 800g 대의 몸무게로 태어나 두 달이 넘도록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는 아이도 있고, 2kg대의 몸무게로 벌써 몇 차례의 수술을 견뎌낸 대견한 아이도 있다. 그리고 그 옆엔 아이들만큼 대단한 부모가 매일 묵묵히 아이의 곁을 지키고 있다.  


 "선생님, 몸무게가 보름 넘게 회복이 안 되는데 괜찮은 건가요?", "아이 머리가 찌그러진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하루에 몇 번씩 토한다는데..." 신생아 집중 치료실의 시간은 세상의 그것과 다름없이 흘렀고, 처음엔 불안과 걱정만 가득했던 나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금씩 단련되었다. 그렇게 신생아 집중 치료실 생활 열흘 째를 맞은 아침, 드디어 첫째 아이를 직접 품에 안아보게 되었다. 여전히 출생 시 몸무게에 못 미치는 1500g 대였지만 체온과 호흡이 안정적이라 캥거루 케어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1.5kg이라니... 세상에...' 두 팔에 느껴지는 아이의 무게는 놀랄 만큼 가벼웠다. 정말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그 아이를 처음으로 받아 안으며 얼마나 떨었던지... 내 눈엔 세상에서 제일 예쁜 딸,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30분이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아이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어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이틀이 더 지난 뒤엔 둘째 아이도 캥거루 케어가 허락되었다. 진정한 캥거루 케어는 아이와 맨살을 대고 체온을 나눠야 하지만 그렇게 정석대로 캥거루 케어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병원에선 천으로 된 가운을 입고 속싸개에 싸인 아이를 안아주는 것을 캥거루 케어라고 했고, 현실성과 편의를 고려한 방식인 듯했다.


 아이가 둘인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두 아이를 번갈아 안았다. 간혹 내가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가지 못한 날엔 남편이 두 아이를 15분씩 공평하게 안아주고 돌아왔다. 한 팔에 쏙 들어올 만큼 작고 가벼운 아이들은 아직 안는 것도 서툰 엄마 아빠 품에서 쌔근쌔근 잘도 잤다. 내내 자는 모습만 보고 돌아오기 일쑤였고 너무 작고 여린 피부를 마음껏 쓰다듬지도 못했지만,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의 감동과 뭉클함은 인큐베이터만 쓰다듬다 발걸음을 돌리던 때에 비할 수가 없었다.


 인큐베이터 위 모니터에서 물결로만 존재하던 아이의 심장박동을 내 손으로 처음 느꼈을 때, 그 작은 가슴을 울리는 힘찬 진동은 내 심장까지 쿵쾅쿵쾅 뒤흔들었다. 나는 아이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고요한 인큐베이터 안에서 무척이나 그리웠을 엄마의 심장 소리를 잠시라도 다시 듣게 해주고 싶었다. 유유자적 양수를 떠다니며 24시간 내내 들었던 엄마의 심장 소리가 갑자기 멈췄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 엄마의 목소리 대신 차가운 소음만 가득한 병원에서 얼마나 외로울까...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린 다시 만났고, 그렇게 가까이 서로의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열흘이나 기다려야 했지만 그것이 보름이 아니고 한 달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기적처럼 내게 온 아이들은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서 그 작고 여린 몸으로 하루하루, 그리고 꼬박 한 달을 기적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로부터 18개월이 지난 지금, 두 아이가 만드는 기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몸무게는 태어났을 때보다 5배가 넘게 늘었고, 이른둥이라는 사실도 굳이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 훌쩍 자랐다.


 혼자 놀이에 심취했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애교를 가득 담은 눈으로 씩 웃어주고, 어디서든 팔만 벌리면 1초의 망설임 없이 달려와 내게 안기는 아이들. 이런 일상이 매 순간 기적임을 알게 해 준 것도 아이들이 내게 준 또 하나의 기적이다. 오늘도 나는 내 팔을 하나씩 붙잡고 잠든 아이들에게 속삭였다.

"너희의 모든 것이 내겐 기적이야."


네가 내게 왔다는 것, 그건 기적이었어.
너와 함께한 하루하루, 너와 함께한 한 달 한 달... 내겐 모두 기적이었어.
네가 내 아이라는 것, 그게 바로 기적이야.  
-최숙희, <너는 기적이야>(책 읽는 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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