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줬으면 그만이지(어른 김장하)

김주완/피플파워

by 김태완

김장하 선생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것은 문형배 전 헌법 재판소 재판관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다. 문형배 재판관은 자신의 평생의 멘토이자 스승으로 김장하 선생을 언급했다. 과거 그가 헌법 재판소 재판관으로 임명되었을 당시 인사 청문회를 통해서도 자신이 그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김장하 선생의 도움과 가르침 때문이었다고 스스럼없이 밝히기도 했다. 문형배 재판관은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웠고 당시 독지가인 김장하 선생님의 도움으로 고등학교와 대학교 전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문형배 재판관이 법관이 되어 김장하 선생을 찾아가 어떻게 은혜를 갚을 수 있을 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때 김장하 선생은 “은혜라고 생각한다면 사회에 갚아라.”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문형배 재판관은 이 말을 평생 간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며, 자신은 보통 사람들의 수준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을 했다고 한다. 실제의 그의 재산은 소유하고 있는 집을 포함하여 4억 남짓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보통 사람들의 평균 재산이 3억 남짓임을 감안할 때 보통 사람들의 수준을 넘어선 자신이 죄송스럽다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가 공개되었다. 당시에는 별 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문형배 재판관의 이야기를 듣고 김장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시청했다. 많은 여운이 남았다. 시청 후에 80세를 넘은 작은 체구에 꾸부정한 자세로 종종걸음으로 길을 걷는 그의 뒷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 거렸다. 수 백억 원은 족히 넘는 기부를 하면서도 평생 자기 차 한 대 소유하지 않은 채 종종걸음으로 길을 걷는 그의 모습은 큰 거인과도 느껴졌다.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후 다큐멘터리의 PD가 저술한 김장하 선생의 발자취를 그린 “줬으면 그만이지”란 책을 찾아들었다. 그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선한 영향력’이란 말이 있다. 이 시대에는 영향력을 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백세가 넘도록 이 시대의 멘토로 존경받는 김형석 교수, 작고 하셨지만 이 시대의 지성으로 지금도 존경받고 있는 이어령 교수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영향력은 글이나 말로서가 아닌 그 사람의 실질적인 행동을 통해 느껴지고 그 행동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때 진정한 영향력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김장하 선생이야 말로 행동으로 우리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계신 진정한 이 시대의 어른이다.

‘김장하’ 란 사람….

김장하 선생은 1944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짓고 있다가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열여섯의 나이에 할아버지의 친구가 운영하는 한약방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한약방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한약 관련 공부에 매진하였다. 당시에는 한의사 시험이 별도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약종상 시험’을 치러 시험에 합격을 하면 한약방을 운영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고, 별도의 학위보다는 중학교 이상을 졸업한 후 한약방에서 일정 기간 이상 종사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했다. 이는 지방에 대한 무의약촌을 해소하자는 정부정책에 기인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김장하 선생은 이 시험에 응시를 해서 열아홉의 나이에 합격을 함으로 한의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지금의 김장하 선생이 있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스무 살의 김장하 선생은 1963년 10월 경남 사천의 석거리에 ‘남성당한약방;을 열었고 몇 차례 이전을 통해 1977년 진주 동성동에 정착을 해서 2022년 5월에 폐업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김장하 선생의 한약방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첫 번째는 약값이 다른 한약방에 비해 훨씬 저렴했으며, 약의 효과가 뛰어났다고 한다. 이른 새벽부터 약을 짓기 위해 먼 곳에서 첫차를 타고 ‘남성당한약방’을 찾는 손님들이 줄을 섰으며, 번호표를 받고 하루 종일 대기하면서 약을 짓고 돌아갔으며, 덕분에 지역 상권이 활성화될 정도였다고 한다.


김장하 선생의 선한 영향력…

김장하 선생은 자신이 번 돈에 대해 “내가 번 돈은 아픈 사람들로부터 벌어드린 돈이다. 따라서 그 돈을 나 자신을 위해 허투루 사용해서는 안된다.”라는 생각을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 또한 그는 “인분을 한 곳에 모아두면 구린내 밖에 나지 않지만, 그 인분을 밭에 골고루 뿌려 주면 귀한 결실로 이어진다. 돈은 인분과도 같은 것이다.”라고 돈에 대한 그의 철학을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김장하 선생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들과 액수는 정확하지 않다.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아서이다. 그리고 그가 장학금이나 기부금을 전달하는 사진 한 장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는 자신의 한약방으로 직접 불러서 개인적으로 장학금이나 지원금을 전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김장하 선생이 지원한 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보다는 생활이 어렵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우선이었다. 그 학생들은 단지 등록금이나 수업료뿐만이 아니라 생활비, 교재비, 용돈까지 지원을 했다고 한다. 재수를 한 학생들은 그 비용은 물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지원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는 장학금이나 지원금을 받으러 김장하 선생을 뵈러 한약방으로 직접 찾아가면 식사 한 끼를 함께하며, 어렵거나 도움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만을 물어볼 뿐 그 어떤 조언이나 요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원을 받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부담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한 번은 김장하 선생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려고 했었다. 그때 김장하 선생이 유일하게 그들에게 화를 내었다고 하고 그 모임을 만들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선생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잘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그들이 이로 인해 받을 수 있는 부담을 생각하는 선생의 생각에서였다. 한 번은 김장하 선생의 도움을 받아 서울대를 진학한 학생이 학생운동으로 인해 수배를 받고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학생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김장하 선생을 찾아와 도움을 주셨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함에 대해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김장하 선생은 “자유로운 국가와 사회 정의를 위해 희생했는데 이 보다 더 큰일이 어디 있느냐”라고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하는 일화는 그의 생각과 철학이 어떤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김장하 선생은 사재를 털어서 1983년 진주에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재임을 했다. 그가 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동안 청탁이나 채용비리는 한 건도 없었다.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가 청탁을 해서 합격한 교사를 이사장인 김장하 선생이 이를 알고 최종 결재 단계에서 이를 불합격 처리함으로 명신 고등학교가 교육부 감사와 남성동한약방의 세무조사를 받아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김장하 선생은 “감사나 세무조사는 가장 대응하기 쉬운 조치이다. 우리는 지적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실제 아무런 지적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세무조사에서는 조사원들이 체면을 살려달라는 부탁을 받아 지적사항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명신 고등학교는 전교조 사태로 많은 교사들이 해고를 당한 시기에도 단 한 명의 교사도 해고되지 않은 전국의 유일한 학교였다. 명신 고등학교에는 이사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개교 당시에는 이사장실이 있었지만 김장하 선생은 이를 마다하고 양호실로 개조했다고 하며, 학교로 출근할 때도 학생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오거나 자전거를 타고 왔다고 한다. 왜냐하면 김장하 선생은 평생 자기 차를 구입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입시 체력장을 할 때면 손수 박카스를 들고 와 학생들을 격려하던 이사장 김장하 선생은 학생들의 기억에 깊게 남아있는 어른이었다. 1991년 8월 그는 이사장 퇴임과 함께 학교를 나라에 기증했다. 그 이유는 “가난함으로 인해 학업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며, 이를 지속적으로 실천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공공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뿐 아니라 김장하 선생은 지역사회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지역사회 문화발전에도 적지 않은 기부를 했고, 지역 언론, 형평사회 조성을 위한 지역 공동체에도 끊임없이 기부를 해왔다. 심지어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한 인물의 묘소가 방치되어 있을 때 이를 찾아 묘비를 세워주고 묘소를 정비해 주기도 했다. 이 일은 묘소 관리인에게 무기명으로 묘소 정비를 부탁하면서 일정 금액을 보내옴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묘소 관리인도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했지만 모든 정황을 미루어 보았을 때 김장하 선생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지역 사회에 많은 재정적 기여를 했음에도 사진 한 장 남아있는 것이 없다. 김장하 선생은 자신의 행동을 남겨 놓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질색을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누군가를 취재를 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할 때 이를 수락받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설득작업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김장하 선생을 취재한다고 할 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취재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려고 했다고 한다. 심지어 연락을 하지 않은 사람도 연락이 와 도움을 주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에 대한 지역사회 사람들의 생각과 존경심을 알 수 있었다.


김장하 선생의 삶과 철학…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복지시설에서 몇만 원어치 봉사를 하면서 사진을 찍어 백만 원어치 홍보를 한다. 봉사에 대한 가치를 되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산이 참 좋다고 이야기를 하거나 꽃을 바라보면서 참 이쁘다고 이야기할 때 산이나 꽃이 나에게 무언가를 해 주기를 바라지 않듯이 사람도 그 상대방 자체를 인정하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언가를 준다면 아무런 갈등도, 괴로워할 일도 없을 것이다. 김장하 선생은 대가 없는 나눔, 간섭 없는 지원, 바랄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베풂 이런 삶을 몸소 실천해 온 사람이다. 김장하 선생이 가장 좋아하는 말는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 즉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군자가 아니겠는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다는 뜻으로 선생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 일치한다. 또한 그는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삶 지침은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않는다”라고 한다. 이것만 지켜도 세상에 다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줬으면 그만이지”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의 삶은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 자신만을 채우기 급급하고 하나를 주면 두 개를 얻고자 하는 각박한 이 시대에 세상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도덕경의 한 문구가 생각이 났다. “성공명수신퇴 천지도(攻城名遂身退 天之道), 공을 이루고 이름을 이루면 몸을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리이다.” 사람들은 작은 것이라도 공을 세우면 자신의 이름 석자를 어떻게든 드러내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세운 공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드러날 때 진정으로 의미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김장하 선생은 자신의 행위를 단 한 번도 드러내고자 한 적이 없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의 업적과 관련된 일이 언급되면 안색이 변하고 입을 다문다. 그래서 그가 그동안 베푼 금액이나 사람의 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선한 영향력은 적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과 삶을 바꾸어 가고 있음은 확실하다. 우리는 김장하 선생이 될 수 없지만 그의 영향력으로 인해 그를 닮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늘어간다면 우리 사회는 모두가 살만 하다고 느끼는 세상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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