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구직자. 내 인생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조건 12. 커리어 피봇팅과 이동의 유연성

by 김태완

조건 12. 커리어 피봇팅과 이동의 유연성

"입사 후에도 다양한 직무 경험과 내부 이동이 열려 있는 성장 경로"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시대, 유능한 구직자들은 단순히 '어디에 입사하느냐'를 넘어 '입사 후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 수 있는가'를 가장 먼저 따진다. 이들에게 입사는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다. '커리어 피봇팅과 이동의 유연성'은 한 번 정해진 직무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잠재력과 변화하는 관심사에 따라 조직 내에서 다양한 직무 경험을 쌓으며 스스로 성장 경로를 설계할 수 있는 열린 체계를 의미한다.

특히 역량 있는 구직자일수록 이 조건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들은 이미 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으며, 복수의 선택지를 비교하는 위치에 있다. 연봉과 복지가 비슷한 수준이라면, 최종 선택의 기준은 결국 "이 회사에서 3년 후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좁혀진다. 커리어 유연성이 낮은 조직은 우수한 구직자의 선택지에서 조용히 탈락한다.


1. 우수 구직자가 가장 먼저 묻는 것

전통적인 인사 관리가 직원을 특정 직무의 전문가로 고정시키는 데 집중했다면, 오늘날의 우수 구직자들은 입사 면접 단계에서부터 내부 이동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한다. "이 직무로 입사하면 다른 분야로 이동할 수 있나요?", "사내 공모제가 운영되고 있나요?", "직무 이동 사례가 실제로 있나요?"와 같은 질문이 우수 구직자의 면접장에서 점점 더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 배경에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 있다. 역량 있는 구직자들은 자신이 빠르게 성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성장 속도를 조직이 따라오지 못할 경우 결국 이직이 유일한 선택지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내부 이동이 활발한 회사는 단순히 좋은 회사가 아니라, 자신의 성장 속도를 수용할 수 있는 '안전한 커리어 실험실'로 인식된다. (Herminia Ibarra: Working Identity: Unconventional Strategies for Reinventing Your Career)


2. 커리어 피봇팅: 우수 인재가 조직에 머무는 이유

역량 있는 구직자들은 자신의 커리어를 단선적인 사다리가 아니라 입체적인 그물망으로 설계한다. 마케터로 입사하더라도 데이터 분석 역량을 쌓아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 전향하거나, 개발자로 시작해 제품 기획자로 이동하는 경로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회사를 고른다. 이러한 피봇팅이 가능한 조직은 구성원에게 매너리즘을 극복할 동기를 부여하며, 조직 차원에서는 여러 직무를 경험한 융합형 인재를 확보함으로써 부서 간 장벽(Silo)을 허물고 협업의 질을 높이는 결과를 낳는다.

우수 구직자의 관점에서 커리어 피봇팅 가능성은 일종의 '보험'이기도 하다. 처음 선택한 직무가 자신과 맞지 않을 때, 조직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방향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은 입사 결정의 리스크를 크게 낮춰준다. 반면 한 번 배치되면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한 조직은, 우수 구직자에게 자신의 가능성을 특정 직무 안에 가두는 '경력의 감옥'으로 인식될 수 있다. 입사 제안을 놓고 고민하는 순간, 이 인식의 차이가 최종 결정을 바꾸기도 한다.


3. 고용 브랜드로서의 커리어 유연성

우수한 구직자들은 취업 준비 과정에서 해당 기업의 재직자 후기, 직무 이동 사례, 사내 공모제 운영 여부를 면밀히 조사한다. 링크드인(LinkedIn)이나 잡플래닛과 같은 플랫폼에서 "직무가 고정되어 있어 성장이 어렵다"는 리뷰는 우수 구직자를 가장 빠르게 이탈시키는 요인 중 하나이다. 반대로 "입사 후 원하는 분야로 이동할 수 있었다"는 실제 사례는 어떤 채용 광고보다 강력한 고용 브랜드 메시지가 된다. (Bersin by Deloitte: The Internal Talent Marketplace)

커리어 유연성은 이제 선택적 복지가 아니라 우수 인재 유치를 위한 필수 인프라이다. 특히 디지털 전환과 AI 확산으로 직무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는 현재, 한 가지 직무만을 평생 수행할 것을 전제로 한 고용 구조는 우수 구직자에게 구시대적 조직으로 읽힌다. 자신의 강점과 관심에 따라 커리어를 재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기업만이, 시장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인재들의 첫 번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사례


구글(Google)의 '20% 프로젝트'와 내부 이동 시스템

구글은 직원들이 자신의 본업 외에도 새로운 분야를 탐구할 수 있는 환경을 제도화했다. 업무 시간의 20%를 자신의 직무와 직접 관련 없는 프로젝트에 쓸 수 있게 장려하며, 이를 통해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팀으로 이동하는 것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유연성은 지메일(Gmail)과 같은 혁신적 서비스의 탄생뿐만 아니라, 엔지니어가 경영진으로, 디자이너가 개발자로 성장하는 다채로운 커리어 패스를 만들어냈다.

구직자의 관점에서 구글의 이 제도는 매우 강력한 입사 유인으로 작동한다. "입사 후에도 내가 원하는 방향을 탐색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역량 있는 구직자에게 조직이 자신의 성장 욕구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준다. 실제로 구글이 글로벌 최고 인재들의 지원을 꾸준히 받는 배경에는 높은 연봉 못지않게, 입사 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문화적 신뢰가 자리하고 있다.


현대카드의 '잡 포스팅(Job Posting)' 시스템

현대카드는 국내 기업 중 선도적으로 내부 인력 시장을 활성화한 사례로 꼽힌다. 공석이 발생할 때 외부 채용보다 내부 직원을 대상으로 먼저 공고를 내며, 부서장의 승인 없이도 직원이 자유롭게 지원할 수 있는 직무 이동의 자유를 보장한다. 인위적인 인력 배치가 아닌 직원 개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이 시스템은 구성원이 스스로 커리어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조직의 역동성을 높이고 있다. (현대카드 뉴스룸: 현대카드의 인사 혁신과 잡 포스팅 시스템 사례)

우수 구직자들에게 현대카드의 이 제도는 단순한 인사 정책이 아니라 조직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신호로 읽힌다. '부서장 승인 없이 지원 가능'이라는 조건은 회사가 구성원의 커리어를 조직의 필요보다 우선시한다는 것을 제도적으로 증명하는 장치이다. 이 한 가지 조건이 주는 메시지는 강력하다. "당신의 성장 방향은 당신이 결정한다." 자신의 커리어에 주도권을 갖고자 하는 우수 구직자에게 이보다 설득력 있는 입사 이유는 없다.


제언

커리어 유연성을 갖춘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 설계와 함께 리더의 인식 전환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유능한 팀원을 다른 부서로 보내는 것을 손실이 아닌 조직 전체의 성장으로 바라보는 리더십이 필요하며, 팀원의 이동을 막는 리더가 아니라 이동을 응원하는 리더가 오히려 더 좋은 인재를 끌어당긴다는 역설을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 메시지는 채용 과정에서부터 명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우수 구직자는 면접관의 말뿐만 아니라 실제 사례를 요구한다. "우리 회사에서 직무를 이동한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라는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할 수 있는 조직만이, 역량 있는 구직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커리어 유연성은 제도로 설계되고, 사례로 증명되며, 문화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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