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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완 Mar 11. 2021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샌델 / 와이즈 베리

“성공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 누구나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이야기이고 진리로 여겨졌던 이야기이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학 입시와 관련하여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눈물겨운 노력을 통해 S대에 입학한 뉴스를 TV를 통해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 인가 이러한 뉴스가 사라졌다. 최근 정보의 접근성이 높은 위치에 있는 일부 사람들이 본인들의 유리한 점을 기반으로 부당한 이익을 챙긴 사건으로 인해 일반인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언급한 두 가지의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 공정과 공평이 과연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현재의 사회적 환경 하에서 본인의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공정한 경쟁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인지… 정보의 비대칭성 기반의 경제구조 속에서 과연 공정하고 공평한 경쟁의 규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인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열심과 노력이 결실로 이어지고 있는 세상인지… 이 책은 우리가 당연히 여겨지고 있는 사실에 대해 큰 의구심을 던져주고 있다.

 

과연 공정한 경쟁이 일어나고 있는가?  

 현재 소위 명문대에 진학하고 있는 학생들이 오로지 그들의 능력과 재능 그리고 노력으로 입학을 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학생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다른 요인들이 입시라는 경쟁에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실제로 하버드와 스탠퍼드의 경우 3분 2의 학생들이 상위 5 분위 가정 출신이며, 하위 5 분위 출신자는 전체 4% 미만이라고 한다. 그 밖의 아이비리그의 학생들의 경우 소득 상위 1% 출신의 학생들은 하위 50% 가정 출신 학생들보다 그 수가 많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아메리카 드림”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열심히 노력한다면 사회적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드림”은 현실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글자 그대로 그저 꿈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미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국민들의 학력 수준이 올라가고 있는 대다수의 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학력 수준이 높아지고 재력을 가진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명문대의 간판을 남겨 주기를 원했다. 명문대 간판은 사회에서 “능력 지표”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부모들이 누리고 있던 사회적 혜택을 자녀들도 이어갈 수 있기를 원했다. 이러한 동기들이 결국은 학생들이 경쟁해야 할 경쟁의 판에 부모들이 개입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적지 않은 재정을 경쟁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공정하고 공평해야 할 학생들의 순수한 경쟁의 결과가 부모들의 권력과 재력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부모들의 헌신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결실을 맺기 힘들기 때문에 상위권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의 노력은 인정해야 하지만 그 학생들은 스스로 공정한 경쟁에서 스스로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대다수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공정성에 다른 개입이 있었지만 이를 당연한 게임의 디폴트적 요소로 간주하게 된다면 이것은 전체적인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단지 그들 만의 리그라는 불공평한 경쟁 구조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능력주의가 과연 최선인가?  

 현재 처해진 상황을 극복하고 사회적 상승을 위해서는 이에 준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공평하게 교육을 받고 이를 통해 능력을 갖춘다면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가 제공된다고 대다수의 미국 대통령은 강조해 왔다. 특히 클린턴, 오바마 대통령은 이러한 주장에 더 큰 힘을 실어왔다.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 또한 고등교육을 통한 능력 주의자들이 기회를 얻는 세상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 우선주의는 결과적으로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능력주의가 기반이 된 엘리트 중심의 정치와 경제구조에 대한 저학력 노동자들의 불만과 불평을 도널드 트럼프라는 대안을 선택함으로 드러냈다. 능력을 갖추기 위한 유명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모든 과정과 입학 후에도 형성되는 모든 다양한 관계는 애초부터 공평하게 주어진 기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이러한 과정의 불공평과 불공정에 대해서는 언급 없이 모든 과정을 무사히 마친 사람들에게는 능력을 갖춘 자들로 인정을 하고 그렇지 못한 상당 수의 사람들에게는 스스로의 노력 부족으로 모든 실패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이러한 능력주의는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굴욕과 상실 삼을 남기게 된다. 

 또 하나… 모든 능력을 갖춘 자들이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성공에는 반드시 우연(운)이 따라야 한다. 능력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다만 열심히 시도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우연(운)이 찾아올 수 있는 확률이 좀 더 높을 뿐이다. 띠라서 성공에 대해서 사람들은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성공에 대한 결실을 나눌 수 있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결과에 대한 평등보다는 기회에 대한 평등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교육시스템의 혁신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스스로의 성공에 취한 능력 주의자들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교육 수준에 따라 정의되며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불평등의 문제는 교육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실패로 치부해버린다. 교육 시스템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세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첫 번째는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않아도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의 평등’을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두 번째는 우리의 운명성을 제대로 인지하고 이를 통해 겸손 해져야 한다. 겸손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리고 마지막은 성공한 사람들은 그 결실을 사회 구성원들과 나누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 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모두가 우리 업적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행운의 덕임을 찾아내고 이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공정한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은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는 반드시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꿈이 사라지는 세상은 미래가 없기 때문이며 희망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점점 많은 사람들이 꿈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포기’라는 단어들이 우리 삶 속에 너무나 자주 등장하고 있다. ‘포기’가 ‘희망’으로 바뀔 때 그 사회는 살만 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가 꿈을 꿀 수 있는 공정한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 과연 우리 사회는 모두가 꿈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올바른 고민과 노력을 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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