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이라는 이름의 착각
한 선배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외부 자문회의에 참석했는데,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의결서에 먼저 서명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회의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었다.
선배는 그 자리에서 서명을 거절했고, 결국 회의에 참여하지 않고 나왔다고 했다.
누군가는 조금 과한 대응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선택이 더 적합했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회의에서의 의결은 단순한 절차가 아니다.
그건 하나의 흐름이다.
논의가 있고, 판단이 있고, 그 다음에 책임이 따라온다.
이 순서가 바뀌는 순간, 의결은 더 이상 의결이 아니다.
서명을 먼저 한다는 것은 판단보다 책임을 먼저 지는 구조를 만든다.
회의는 진행되겠지만, 이미 결론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그 순간 회의는 토론의 장이 아니라 형식적인 이벤트로 변한다.
이런 방식은 대부분 ‘효율’을 이유로 등장한다.
회의 시간을 줄이고 싶고, 형식적인 절차를 간소화하고 싶고, 의사결정을 빠르게 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이건 문제를 잘못 짚은 해결 방식이다.
비효율의 원인은 대부분 회의 자체가 아니라 준비 부족에서 나온다.
자료가 충분히 공유되지 않았고, 쟁점이 정리되지 않았고, 참여자들이 사전에 생각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회의가 길어지고, 그걸 줄이기 위해 의결을 앞당기는 방식이 등장한다.
하지만 서명을 먼저하는 방식으로 효율화를 꾀한다는 것은 해결이 아니라 우회다.
외부 자문위원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그 의사결정에 함께 기록된다는 의미다.
문제가 생겼을 때 “나는 자세히 몰랐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기록에는 이미 서명한 위원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명하는 것을 매우 조심한다.
그건 까다로움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지키는 방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서명을 한다는 것이다.
관계가 불편해질까 봐, 괜히 분위기를 깨기 싫어서, 혹은 그냥 별일 아니라고 생각해서.
하지만 이게 반복되면 조직은 점점 이렇게 변한다.
회의는 있지만 토론은 없고,
의결은 있지만 판단은 없고,
책임은 있지만 주체는 없다.
결국 남는 것은 형식만 유지되는 구조다.
속도를 높이고 싶다면 의결을 앞당길 것이 아니라 준비를 앞당겨야 한다.
회의 전에 충분한 자료를 공유하고,
참여자들이 미리 의견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하고,
쟁점만 회의에서 다루는 방식.
이렇게 하면 회의 시간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그리고 의결은 회의가 끝난 직후, 가장 빠르게 이루어지면 된다.
속도와 정당성은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다.
설계의 문제일 뿐이다.
그 선배는 예민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판단 없이 책임을 지는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전문가로서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태도에 가깝다.
이 이야기는 특정 기관이나 특정 사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을 하면서 얼마까지 타협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원칙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분위기를 위해 기준을 낮출 것인지.
그 선택은 결국 각자의 이름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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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I Alchemist & Maestro 두드림(Two Dreams)
- Orchestrating AI, systems, and human judg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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