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1 수요일 <마로니에 백일장>
어제 다녀온 따끈따끈 두발로 일지.
9월에 ‘엽서시 문학 공모전’홈페이지에서 이 포스터를 본 순간, 바로 머릿속으로 계산에 들어갔다. ‘서울까지 차비가 왕복 5만원, 가서 밥 먹고 학림 다방에서 비엔나 커피 한잔 마시려면 7만원 정도 들겠네.‘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백일장은 왠지 꼭 가고싶어진다. 당일 알게되는 글제, 자연 속에서 짧게 집중하여 써내는 한편의 글, 빠르면 당일 발표되는 수상 소식 등 마음에 드는 구석이 많다. 마로니에 백일장은 매년 10월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리는데, 여성만 참여할 수 있다. 보통의 백일장이 주말에 열리는 것과 달리, 평일에 열리기 때문에 오히려 좋았다. 이번에도 엄마와 나의 휴일이 겹치는 수요일에 백일장이 열리기에, 엄마한테 같이 가자고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석 연휴가 지나고 이차저차 9일이 됐다. 갈까말까 고민하던 사이에 금방 백일장이 다가왔다. 전날이지만 엄마한테 한 번 제안을 해 보았는데, 뜻밖에 서울 나들이를 하게되어 좋아하신다. 저녁 8시, 다음날 서울로 가는 버스를 예매했다.
엄마 인생의 첫 백일장이다. 그냥 같이 가자고 한 건 아니고, 평소에 엄마가 보내준 문자, 카톡 프로필의 문구가 시 그자체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낯설어도 잘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는 갑자기 글을 쓰려니 막막한지 물었다.
엄마:
산문이 뭐니?
나:
엊그제 들은 양희은 책 오디오북 <그럴 수 있어>있지?
그것처럼 자기 있었던 일 쓰는거야. 내 일기를 남들이 본다 생각하면 돼
오늘의 두발로 일정
6:35 터미널
8:45 동서울 터미널 도착
10:00 마로니에 백일장 시작
2:00 접수 끝
5:00 시상식
8:00 동서울 터미널
10:10 터미널 도착
밤 12시에도 잠들지 못하면 이것저것 보면서 놀곤 하는데, 이번만은 강제 취침! 다음날 아침 6:35에 시외버스를 타러 가려면 집에서 6시엔 출발해야한다. 불 끄고 금방 잠들었다.
알람 듣고 벌떡 일어나 대충 씻고, 전날 챙겨둔 가방을 들었다. 아침 공기가 쌀쌀해서 얇은 패딩을 입어도 될 정도였다. 추분도 지나고 해가 점점 늦게 뜬다. 해 뜨는 시간인 6:30 전이라도 하늘이 어스름히 밝아온다.
출발시간 5분 전에 터미널에 도착했다. 바로 직전 6:30에 출발하는 버스가 매진이라 놀랐다. 이 새벽에 다들 어딜 가는건가?
정시에 출발한 버스엔 우리까지 네 사람이 탔다. 버스가 금강대교 위로 들어서자 마침 해가 뜨고 있었다. 호텔 건설 현장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헬멧을 쓰고 길을 건너갔다.
평일 아침의 출근 시간에 걸려서, 버스가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9시 쯤이었다. 10시인 백일장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다. 강변역에서 2호선을 타고 DDP에서 4호선으로 환승, 목적지인 혜화역에 내렸다.
출구쪽 계단으로 움직이는데 엄마가 말한다
엄마:
이 사람 쓴 거 봐. 이런 식으로 쓰면 되니?
스크린도어에 시민 응모작 시가 인쇄되어있었다. 맞아 엄마.
접수처에서 현장 접수를 하고, 올해도 준비된 샌드위치와 음료를 받았다. 동아제약, 동아 오츠카에서 후원하는 백일장이라 간식과 기념품도 챙겨주어서 좋았다. 넉넉히 도착해서 시작하는 시간 전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24개의 글제 중에 4개의 글제가 선택되었다. 왠지 마음이 가는 ‘새벽’을 골랐다. 엄마는 ‘서랍’ 을 골랐다. 무대 뒤편 배경 현수막에 동그란 구멍 4개가 뽕뽕 나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여기에 글제 4개가 들어가 있었다. 세심하다.
글제가 발표되고 모여있던 사람들이 각자 흩어졌다. 아르코 미술관 화장실에서 손 씻고, 붉은 벽돌 건물 앞에 가져온 돗자리를 깔았다. 다이소 가면 천원에 팔법한 목욕탕 방석도 챙겨왔다. 작년에 신흥사 음악제에서 받아온 것이다. 요긴하게 들고 다니며 쓰고있다.
간식으로 받은 서브웨이 샌드위치와, 후원사 동아오츠카의 콤부차를 먼저 먹었다. 샌드위치 안에는 채소만 들어있었는데, 그래도 이 많은 인원에 이게 어디냐 싶다. 나중에 기념품 추첨할 때 불리는 접수번호를 보니 400여명이 모인 것 같다.
다 먹고 연습장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온다. 내 친구 어자매였다! 2019년에도 마로니에 백일장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나처럼 친구들도 그때 이후 처음 오는 거라고 했다. 서로 응원하며 헤어졌다.
그늘에 계속 있다보니 추워졌다. 미리 알아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마로니에 공원 건너편에 서울대 병원과 학림 다방이 있다. 옮긴 카페에선 글 쓸 목적으로 있다가, 짬이 날 때 학림 다방에 가서 비엔나 커피를 마시고 싶었는데 결국은 못갔다. 아쉽구나!
학림 다방 옆 골목을 돌아 성균관대 앞 할리스 커피에 갔다. 평소에 바닷가 앞 할리스 커피에 자주 가는데, 고객층이 달라서 느껴지는 기운이 달랐다. 삼삼 오오 모여 대학교 앞 거리를 걸어가는 청춘의 에너지. 예전에는 뭔 소리람싶었던 이야기가 새삼 다가온다. 이제 나에겐 이런 에너지를 뿜는 동년배가 수백명씩 모여 주변을 지나갈 기회가 없는 것이다. 뿔뿔이 흩어진 현대인들만 있을 뿐.
3,4층은 공부하기 좋게 조용한 분위기라 2층에 앉았다. 거리 구경 하며 이생각, 저생각 하다가(저 닭강정 맛있나보다. 학생들이 많이 사가네?) 문득 집중해서 시를 써냈다. 엄마가 쓴 시는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맞춤법 검사기를 한 번 돌리려고 타이핑을 치다보니 보게되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엄마가 평소에 쓰던 문자처럼 멋진 시였다.
1시 36분. 2시까지 접수 안하면 안받아준다고 이야기를 들어서 온길을 서둘러 되돌아갔다. 그 사이 거리엔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가득했다. 접수대에 가니 산문 부뮨에만 긴 줄이 지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다음엔 아동문학을 써봐야겠다. 시상 인원은 부문별로 똑같은데, 참여 인원이 산문쪽에 치우친다.
시상식까지 준비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배고파서 밥부터 먹으러갔다. 근처에 있다는 신계숙 교수님의 ‘계향각’을 구경하고 가려고 대학로 공연장이 모여있는 공원 뒤쪽 동네로 걸어갔다. EBS <맛터사이클 다이어리>에 출연하신 중식 전문 교수님이신데,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할리 데이비슨 바이크를 타신다. 가게 앞에 왠지 그 바이크가 아닐까싶은 것이 서 있었다. 시간이 되면 낙산 공원도 가보려고 했는데, 이번엔 못갔다.
학림 다방 옆 골목에 있는 우동집에 갔다. 런치타임 4분을 남겨두고 운 좋게 서비스 유부초밥을 받았다. 곱배기, 세곱배기도 같은 가격에 먹을 수 있는 집이었는데, 나보다 앞서 주문한 사람의 우동 그릇이 세숫대야만해서 깜짝 놀랐다. 어릴때 유행했던 세숫대야 냉면이 생각났다.
밥 먹고 백일장에서 준비한 박준 시인 강연을 들으러 갔는데 자리가 없었다. 집중이 안될 것 같아서 미리 알아둔 코스대로 창경궁에 갔다. 우동집 뒤쪽으로 주택가 골목이 이어져서 15분정도 걸어 도착했다. 창경궁 담벼락을 따라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는데, 부산, 강릉 등에서 온 수학여행단이었다. 창경궁 입장료는 1인당 천원! 싸다!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는데, 여기서 따로 창덕궁 입장료 3천원을 받는다. 후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하루에 일정 인원만 유료 예약을 받는다고 한다. 창경궁에는 대온실이 있다고 해서 거기까지 걸어갔다. 가는 길 모퉁이마다 곱게 한복을 입은 커플들의 스냅사진 찍는 모습이 보였다. 도심 한 가운데 이런 고즈넉한 장소가 있다니, 절로 사진 찍고싶어지는 곳이었다.
평소에 한옥은 절에 갈 때나 볼 수 있었다. 궁궐이라 그런지 지붕 모양도 특이하고, 지붕 끝에 모양이 서로 다른 장식물이 얹어져 있어 관심이 갔다. 이것도 모르고 지나칠뻔 한 걸 눈썰미 좋은 엄마덕분에 알게됐다.
대온실 가는 길에 아름다운 인공 호수가 있었다. 주변 자연이 물에 비치는 모습이 예뻤다. 단풍 들 때 오면 좋을 것 같다. 호숫가 옆 길이 좁아서 물에 빠지지 않게 천천히 걸어야 할 것 같다.
대온실은 창경궁이 ‘창경원’이라 불리던 때의 가슴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었다. 내부에는 여러 식물이 있었다.
돌아 나오는 길. 궁에 사는 얼룩 고양이가 무심하게 마음에 드는 바위 위에 누워있었다.
시상식이 열리는 마로니에 공원으로 돌아왔다. 혹시 내가 200만원의 주인공? 상금 타면 반은 엄마 드려야지 생각하며 마지막까지 기다렸다. 박수만 쳐주고 다시 혜화역으로. 이런 기대감때문에 백일장에 오는 거니까!
엄마한테 꽤 색다른 나들이가 되었던 것 같다. 아침에 돗자리 펴고 마로니에 공원에 앉아있는데 엄마가 그랬다.
이렇게 여유 있게 서울에 있어본 건 처음인 것 같다.
항상 갈 곳을 바쁘게 찾아다녔잖아
버스 시간까지 여유가 좀 있어서 강변역을 지나쳐 잠실에 내렸다. 백화점 지하 식품관 구경을 하고 동서울 터미널에 갔다. 지하철 창문 너머 밤의 한강을 건넜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동서울 터미널에서 속초를 오거든(혹은 반대이든), 돌아오는 차편은 꼭 프리미엄 버스를 타기를.
누워서 돌아오는 내내 편하게 왔다. 속초와 동서울 노선은 짧아서 프리미엄이 우등보다 5천원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서울에서 부산가는 프리미엄 버스는 꽤 비싸다.)
엄마와 두발로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 잘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