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일력 3/15

by Julie
밝음은 어둠에서 생겨나고
느껴 통하는 것은
조용한 곳에서 이루어진다.
감춤은 드러남의 뿌리요
고요함은 움직임의 주재자다.

장유 <몰래 닦아 간직하게>


오늘의 문장은 민음사 출판 <한국산문선>4권에 나와있다. 4권은 선조부터 인조 때까지 살았던 문장가들의 글을 모았다.

장유는 1588년부터 1638년 사이에 살았던 사람으로, 인선왕후의 아버지이자 효종의 장인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홈페이지에도 인물설명이 자세히 나와있다.

장유의 호인 ‘계곡’에서 따 와, <계곡집>이라고 이름을 붙인 문집이 전해온다. 다른 이름으로 <계곡선생집>이라고도 부른다.


<계곡집>은 장유 사후, 그가 생전에 정리한 원고를 아들 장선징이 정리해 1643년 간행했다. 총 36권 18 책으로 구성되었고, 아들이 <계곡집> 뒤에 덧붙인 <계곡만필>은 말년에 투병할 때 틈틈이 써둔 글을 모은 것이다. 병자호란, 담배, 문장론, 유몽인 비판 등 다양한 주제가 208개 조목으로 담겨 있다고 하는데, 엄청난 메모광이자 글덕후였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의 문장은 <잠와기> 에 나온 문장이다.

검색하다가 위 사이트를 찾았는데, <계곡집> 해설본 전문이 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다. 장유도 평소에 자기가 써둔 글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 둔 것 같다. MBTI 검사를 한다면 J형이 아닐까.


총 36권 중 제8권에 나와있다. ‘잠와’라는 집을 지은 집주인이 장유에게 기문을 하나 지어달라 청해 온다. 민음사 일력 덕분에 <한국 산문선>을 종종 찾아보면서, 옛 문인들이 정자나 집에 대해 남긴 <ㅇㅇ기>라는 제목의 글을 보게 됐다. 요즘으로 치면, 새 책을 출간할 때 인지도가 있고 신뢰를 얻은 사람에게 추천사를 부탁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잠와’의 집주인은 이명준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 활약한 인물인데, 병으로 일을 그만두고 내려와 자신의 호를 따 ‘잠와’라는 집을 지었다.

이명준의 자는 ‘창기’이고, 호는 ‘잠와’다. ‘자’는 성인이 되고 난 뒤에 성인으로 대접받으며 불리는 이름이다. <잠와기>에서 장유는 이명준을 ‘창기 씨’라고 칭한다. 또, ‘호’는 자신이 추구하는 정신적 지향점을 상징하는 단어로 짓는다.


장유는 기문을 청한 집주인의 뜻을 헤아리며, 유교경전 중 ‘주역’과 ‘서경’을 참고 삼아 글을 써나간다. 세상의 때와 개인의 자질이 항상 같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가 좋아도 개인의 자질이 부족할 수 있고, 개인이 뛰어나도 나서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


개인의 자질이 경지에 미치지 못함을 침잠(沈潛)이라 한다. 장유는 이명준이 자신의 호에 ‘잠(潛)’이라는 한자를 쓰긴 했지만, 그 뜻은 아닐 거라고 짐작한다.


밝음은 어둠에서 생겨나고
느껴 통하는 것은 조용한 곳에서 이루어진다.
감춤은 드러남의 뿌리요
고요함은 움직임의 주재자다.

군자가 도를 행하는 것도 이와 같기에, 지금은 몸이 아파 활약하지 못하는 듯해도 안으로 조용히 내공이 쌓이는 중이라는 뜻이다. 인용한 문장에서도 그 의미가 잘 전달된다.


양자운(揚子雲)은 말하기를 ‘하늘에 침잠하면 하늘이 되고 대지에 침잠하면 대지가 된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중니(仲尼)는 문왕(文王)에 침잠하였고 안연(顔淵)은 중니에 침잠하였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장유는 이명준의 능력이 뛰어남을 알고 있다. 비록 지금은 잠시 쉬어가지만, 밝음이 어둠에서 생겨나듯 내공을 쌓는 시간일 뿐이다.


옛사람들은 매일 글을 쓰고 살아서 그런지, 문장이 이어지는 흐름이 되게 좋다. 직설적으로 ‘임마 힘내!’라고 말하기보다 은은하게 그 뜻을 풍긴다.




내용을 찾아보기 전에 일력에 나온 문장만 봤을 땐, 밝음과 어둠,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이 따로 나눠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양면이라는 말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바깥에서 활동하려면 집에선 좀 늘어지게 쉬어야지.


너무 밝게 웃는 사람 마음속엔 슬픔이 있다는 말도 떠올랐다. 그런데 그런 의미는 아니네.




날이 살짝 더워서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들어갔다. 한 바퀴 삭- 도는데 월드콘 신제품이 나왔다. 무려 프리미엄! 고급이라 400원 더 비싸다. 새로 나와 바삭하고 맛있는 아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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