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포옹 이야기

수업에서 학생들과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싶나요?(수업관1)

by 허현

의미 또는 가치 없는 이야기?

처음 교사로 발령받고 아이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언행의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많이 실망했다. 잔소리와 질책도 자주 했다. 한편으로는 나의 무능력함을 자책했다.

학습적인 면에서는 소위 부진아 지도를 말할 수 있다. 가르쳐 준 것을 하루는커녕 한 시간도 안 되어 기억을 못하고 똑같은 문제를 어려워한다. 아니 이것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서라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아예 노력하는 것조차 포기한 모습이다.

생활지도나 태도적인 측면에서는 최소 두세 번 많으면 다섯 번이나 반복 설명이나 안내했음에도 듣지 못했다거나 이미 설명하거나 안내한 것을 다시 물어볼 때 답답하고 화가 났다. 학습준비물이나 교과서도 챙기지 않은 것을 당연히 여기는 모습이다. 자신이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르면서 교사에게 찾아달라는 모습에 짜증도 난다. 점점 아이들을 향한 지도라는 잔소리가 늘어난다.


교사에 자리에 여전히 머무르는 풍경 이야기

이런 교실 상황에서 다른 직업을 찾아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IMF이후 코로나19를 거치며 3포, 5포, 7포니 하는 시대에 안정적으로 월급이 나오는 생계수단이라서 일까? 그렇지는 않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요리를 배우고 한식조리사 자격증도 따고 큰 뷔페식당이나 대학식당에서 몇 년간 근무하며 돈을 벌었다. 먹방이나 요리 프로그램이 지금도 많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도 요리사는 인기 직종이었다.

교권이 많이 실추되었음에도 명예퇴직을 신청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책을 많이 읽을 수 있고, 다양한 연수도 많이 받아 개인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일까? 많이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니다. 20여 년이 훨씬 넘었음에도 여전히 기억에 남은 풍경이 하나 있다. 직장생활을 하다 군대를 다녀오고 학력고사 세대가 수능을 보기 위해 제가 졸업한 사립고등학교로 원서를 쓰러 갔다. 고등학생 때보다 작아진 운동장과 더 낡아진 학교 건물 모습이었다. 선생님들도 좋은 기억으로 남은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이 여러 분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신 선생님들이 반갑고 따스하게 그려졌다.

16년 전 교사로 첫 발령을 받고 그 다음 해 2월 봄방학 전 종업식 때, 2학년 여자 아이가 한 말

“선생님 미소 띤 얼굴이 좋아요.”

10여 년 전 5학년 아이들을 담임할 때 국어 교과서에 있던 ‘마당을 나온 암탉’을 지금의 말로 ‘온 작품 읽기’나 ‘한 학기 한 권 읽기’를 할 때 마지막 장을 앞두고 체육 전담수업을 위해 아이들은 교실을 비웠다. 내가 잎싹의 결말이 궁금해서 읽다가 훌쩍거리게 되었는데, 마침 체육수업을 마치고 오던 책과는 거리가 먼 축구를 좋아하는 남자 아이가

“선생님 왜 울어요?”

할 때 운 것이 조금 창피해서 잠자코 있었더니, 내 손에 있던 책을 보고는 학교도서관에 가서 빌려서 읽던 장면이 그려진다. 8~9년여 전 3학년 담임을 할 때 학부모 공개수업을 하며 부모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여러 자료로 경험케 한 다음, 자기 엄마의 모습을 시로 쓰고, 쓴 것을 낭송하며 펑펑 우는 여자 아이의 장면도 떠오른다. 최근에 머리카락을 짧게 깎고 학교에 갔을 때 알아보아 준 몇 아이들의

“선생님 머리 깎으셨죠?”

라는 관심의 말들, 지난주 금요일 현장체험학습으로 해인사 소리길 약 6km를 걷고 해인사 앞까지 힘들지만, 중간에 버스 탄 아이들과 달리 버스 타지 않고 저와 동행한 세 명의 여자 아이들의 모습도 촬영이 되어 저장된다.


마음에 스며들기를 바라는 이야기

이러한 풍경들을 자주 볼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의미 없거나 가치 없게 느껴지는 풍경을 자주 만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즉, 아이가 지식, 정서, 태도, 행동 등이 내면화 또는 체득, 습관화가 잘 안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에서 말한 것처럼

“한 사람(한 아이)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 아닐까? 일생은 그 아이의

“그(한 아이)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어린이지만, 아주 거대한 이야기 덩어리를 가지고 오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은 다른 말로 하면 한 사람의 이야기요 한 사람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세계관)가 수정이 되거나 새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이 이야기가 한 순간 또는 몇 시간의 수업이나 생활 지도로 바뀔 수 있을까? 또 교사가 의도한 이야기대로 바꾸는 것이 정말 올바른 것일까?

교육계에 떠도는 말 중에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거나 “교사가 가장 좋은 교보재(교육자료)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학교라는 공간 또는 수업이라는 교실 장면에서 교과라는 교육 또는 교과 내용이 교사의 이야기 즉 교사의 정체성이 아이의 이야기와 만나야 한다. 아니, 만날 수 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아이와 교사 즉, 우리 각자의 삶(일상) 또는 삶의 이야기가 우리의 수업이나 학습, 학교 생활 안으로 들어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

이솝 우화에서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은 바람(잔소리, 훈계 등)이 아닌 햇볕이었다. 이 햇볕을 저는 ‘환대’라고 말하고 싶다. 교육학에서도 ‘허용적 분위기’나 ‘라포’가 형성된 곳에서 수업이든 상담이든 잘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서현숙 선생님이 쓰신 ‘소년을 읽다’에 보면 ‘소년원’에 온 아이들을 위한 국어수업을 준비하시는데 그 모든 것을 수업 속에서 아이들을 ‘환대’하는 것으로 표현하신다. 차가운 쇠창살이나 콘크리트벽, 정리 안 된 교실의 을씨년스러움 등이 느껴지던 공간에서 책이나 공부와는 담을 쌓았던 아이들이 ‘찐득한 시간’을 누리고 따스함, 희열 등을 맛보게 된다. 물론, 찐득한 시간을 맛보았다고 해서 계속 달라진 이야기대로 산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달라지는 씨앗들이 뿌려진 그림이 그려진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고아’, ‘과부’, ‘나그네’를 환대하라고 말씀하시고, 나그네를 ‘환대’한 아브라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의 의미도 ‘들을 수 있는 마음’이라고 한다.

나의 수업 속에서 학교 생활 속에서 ‘환대’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그 아이가 하는 말 뿐만이 아니라 그 아이 자체를 잘 들어주는 것이고, 교사의 얼굴 표정과 말씨가 굳어 있고 딱딱한 것이 아닌 환하며 친절한 것이 아닐까? 또 방치나 유약함이 아닌, 단호해야 할 상황에서는 사랑과 연민을 품은 단호함이 아닐까? 교사와 아이들 사이만 환대의 만남과 환대의 이야기가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끼리도 환대하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먼저 교사 자신이 자신을 환대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교사와 아이 사이, 아이들 사이에 환대가 일어나지 않을까? 실화를 바탕으로 토리 L. 헤이든이 쓴 ‘한 아이’라는 이야기에도 상처가 많은 아이(쉴라)가 다양하게 말하는 것을 잘 들어준 토리 선생님 이야기로 제게는 보고 들리는 것 같다.

이런 따스한 포옹이 제가 머물러 있는 학교, 교실, 수업 등의 장면에서 아이, 교사, 아이들 사이에 기록되고, 촬영되고, 그려지고, 저장되는 이야기나 풍경의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비록 아이가 따스한 포옹을 다른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하게 될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면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듣기

이 글은 2년 전인 2022년 10월에 쓴 글이다. '환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beside books 출판사를 통해 출간한 교육철학 에세이에 한 꼭지로 쓴 글이기도 하다. 이 글을 지금 다시 곱씹는 이유가 있다. 작년에는 비교적 이 글에서 쓴대로 아이들 들었던 것 같다. 올해 5월에 작년 5학년 아이들로부터 스승의 날 즈음에 전화가 왔다. 아주 오랫만에 이런 전화를 다시 받아 본 것이다.

지금은 2학년 아이들을 맡고 있고, 여름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아이들을 들어주고 환대하기는 커녕 내 자신을 들어주는 것조차 못하고 있다. 바쁘다는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들어주지 않아 힘들어서 나도 못 듣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년의 듣는 마음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것일까? 나를 듣거나 아이들을 듣기보다 다른 것을 듣고 환대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이렇게 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 처음으로 와서 다시 듣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형사들도 수사가 미궁에 빠지면 처음으로 되돌아간다고 하지 않는가? 처음부터 다시 듣고 살핀다고 하지 않는가?

작년 5학년 아이들과 지금 2학년 아이들은 다른데 같은 잣대로 듣고 있어서 일까? 같은 잣대로 듣기에 잘 안들리고, 잘 안 들리니 힘들고, 더 듣기가 싫어지는 악순환이 생긴 것은 아닐까? 7명의 3배 가까이 되는 20명이라 힘에 부쳐서 일까? 한 덩어리가 아닌 20명의 아이들 각각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방법이 있기는 한 것일까? 어떤 것부터 시작하면 될까?


하프타임의 기적

여름방학이 코 앞에 다가온 지금에야 듣기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출발하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축구에서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 시작하기 전에 하프타임이 있는 것처럼 저에게는 올해의 하프타임이다. 하프타임의 시간 동안 잘 들어야 후반전에 분위기를 바꾸어 기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5월 25일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AC밀란과 리버풀의 경기에서 객관적인 전력이 AC밀란에 비해 열세였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AC이 이길 것이라 여겼다. 예상대로 전반전에 3:0의 스코어로 리버플은 지는 것으로 마쳤다. 하프타임 베니테스 감독의 격려를 들은 선수들은 다른 전략으로 후반전 시작 5분만에 3골을 넣어 동점을 만든다. 승부차기 끝에 리버풀이 기적을 만든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작년보다 어렵고 힘든 게 사실이다. 포기하지 말자. 전반전의 실패(?)가 반드시 후반전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는 것을 들려주고 보여주지 않는가? 내게서 다른 이에게서 아이들에게서 다시 잘 듣고 전략을 바꾼다면 후반전인 2학기에 수업에서도 다시 기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참고 : 스터디언, 하프타임의 기적 (youtube.com)

keyword
작가의 이전글들을 수 있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