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 없다>를 보며 '호모 파베르'를 떠올리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의 인간’.
그래 맞아. 나 또한 회사를 그만둔 뒤 가장 버티기 힘들었던 것이 ‘도구의 부재’였지.
당연히 내 것이라 믿었던 손 안의 도구가 사라진 뒤에 실감한 공허와 자괴감과 열등감. 자랑스러운 직함이 새겨진 빳빳한 명함, 든든한 권위가 깃든 결재판, 누구보다 똑똑한 소리를 냈던 노트북, 퇴근 후 자신감에 취해 쥐었던 고급 포크와 커피잔, 와인잔, 운전대 등.
만수(이병헌)도 그랬을 것이다. 실직 후 가장 거대한 공포는 손에 쥐었던 도구를 강탈당했을 때 찾아왔을 것이다. 제지 회사 공장에서 언제나 손에 쥐었던 권력의 막대기가 지금은 그에게 없다.
더 큰 슬픔은 가족들의 손에도 익숙한 도구가 사라졌을 때 밀려왔을 것이다. 아내 미리(손예진)의 손에서 문화적 자본의 상징인 테니스채가 사라졌다. 대신, 생계유지를 위해 치과 치료 기기를 쥐고 있다.
아들은 넷플릭스를 볼 수 있던 태블릿 PC를 손에서 놔야 했다. 그다음 행동은 사라진 것을 되찾기 위해 스마트 기기를 훔치는 것이었다. 딸도 마찬가지. 첼로 채를 잡지 못한다. 손으로 온기를 공유한 반려견을 뺏겼다.
삶의 안정감은 손에 쥔 도구의 든든함에서 온다. 손에 잡은 도구가 내 정체성을 반영하기에 그렇다. 호모 파베르는 ‘유형, 무형의 도구를 만드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만드는 인간’을 말한다.
만수는 막대기를 열심히 휘둘러 가족과 이층 집과 안락한 삶을 만들었다. 만수의 정체성과 안정감은 종이 롤을 두드리는 ‘막대기’에서 온다. 가족들의 믿음, 가문의 자부심을 되찾기 위해 가장 필요한 도구도 막대기다.
소유했던 도구가 빠져나가 ‘대상’이 될 때, 내 정체성 역시 내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 바뀌어 일상은 공포가 된다.
도구의 부재가 사람의 부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극단적 공포를 생산한다. 만수는 같이 춤추며 잡아야 할 미리의 어깨, 허리도 다른 사람에게 뺏겼다.
다른 방법이 없다. 어떻게든 다시 그 안전한 도구를 손안에 가둬야 한다. 막대기가 아닌 다른 도구를 잡는 건 정체성 혼란과 일상의 공포를 해결할 마땅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도구가 사라지면 합리적 판단력이 흐려진다. 손을 완벽히 통제한 머리와 마음이 붕괴된다. 위치가 전복되어 손이 머리와 마음을 조종하고 통제하기 시작한다.
<어쩔 수가 없다>는 박찬욱 감독의 전작 <헤어질 결심>의 연장에 있다. ‘붕괴’와 극단적 재건의 서사. 만수도 “완전히 붕괴” 되었고, 재건을 위해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범한다.
막대기를 다시 잡기 위한 여정이 스펙터클 하게 전개된다. 머리와 마음의 폐허 위에서 손은 제멋대로 행동한다.
목적을 해결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도구를 잡아 휘두른다. 그게 화분이든, 삽이든, 나무든, 총이든 상관없다. 안정적 상황이었다면, 이들 도구는 가족의 안락함과 평화, 인류애의 확장을 위해 쓰였을 것이다.
애잔한 건, 도구가 사라진 사람들끼리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승부를 벌인다는 것이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가사처럼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슬퍼지지”의 원인을 찾고 처방을 해야 하는데 외면한다.
오직 안전한 도구만을 손에 쥐기 위한 살육의 광란극을 벌인다.
승부에서 이겼어도 근원의 두려움과 슬픔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더 큰 혼란과 공포가 기다린다. 인간의 손이 아니라 기계의 손이 쥔 기계적 도구와 광란극을 펼쳐야 할 시간이 가까워진다.
포클레인 손에 장착된 도구는 숲을 무참히 파괴하고, 로봇 손에 장착된 도구는 사람의 삶을 통째로 파괴한다.
사람이 도구를 잡아 흔든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도구가 사람을 잡아 뒤흔드는 현실을 산다.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있어도 자꾸만 슬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모두가 마주한 실존의 문제다.
도구로부터 출발해 손과 머리, 마음의 경로를 살펴야 한다. 머리와 마음이 황폐하거나 붕괴되지 않았나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머리와 마음을 다독여줘야 한다. 머리와 마음이 진짜 나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