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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 Jan 17. 2024

마쓰야마를 다시 갔다

그곳에 유쾌한 기억이 있다

   1월 14일에서 16일, 사흘동안 일본 마쓰야마를 갔다 왔다.

   마쓰야마(松山)는 일본 시코쿠 에히메 현청 소재지다. 현(県)의 수도이자 시코쿠 최대 도시지만 인구 50만에 미치지 못한다. 사철 온화한 기후로, 일본에서는 귤(橘)의 주산지로 유명하다. 마쓰야마 공항과 시내를 다니다 보면 수없이 많은 귤 캐릭터 그림과 각종 귤 가공품 가게를 만나게 된다.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目漱石)가 한때 중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했던 지역이며 그 때의 경험으로 쓴 소설 도련님(坊っちゃん)의 무대이기도 하다. 소설 제목을 딴 메이지 시대풍(風) 봇짱열차는 아직도 관광객들을 위해 운행하고 있다.

   변방 도시는 번화하고 복잡한 4차선 도로에서 한블럭 떨어진 이면도로와 같다. 그 곳에는 목욕탕과 카센터도 있고 아이들이 차량을 피해 숨바꼭질 하다가 분노한 운전자들에게 쌍욕을 듣는 구경거리도 있게 마련이다. 이처럼 일본이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변방 지역의 변방 도시는 색다른 정취를 보여준다. 지하철 대신 노면전차(tram)가 시내 주요 교통수단이고 출퇴근 시간에도 교통 체증 따위는 거의 없다. 시내 최대 상업지구라는 오카이도(大街道)는 서울 명동의 골목 하나를 10배로 늘리고 상인 숫자를 10분의 1로 줄이면 비슷한 그림이 만들어질 것 같다. 대도시의 흔한 호객꾼은 보기 힘들고 저녁 8시만 되면 문 닫기 바쁘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도고(道後)온천 주위에는 유카타를 입은 젊은이들이 활보한다.

   한국에서는 제주항공이 인천공항-마쓰야마 직항을 매일 1회 운행하고 있다. 최근에 에어부산이 김해공항에서 주 3회 왕복하는 직항편을 개발했다고 들었다. 원래 일본에서도 거기가 어디냐고 하는 도시라 한국인은 그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텐데, 코로나 엔데믹 상황에서 에히메 현이 한국 관광객 유치를 위한 굉장한 홍보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로, 본래 외국인 한명도 없는 찐 일본으로 국내 유튜버들이 소개하는 도시에 근래 한국인이 폭증했다.


   나에게 마쓰야마는 특별한 기억이 있는 도시다. 여행사 <여행이지>에서 항공권과 2박 숙박권이 포함된 에어텔 상품을 40만원 내외로 제공하고 있는데, 내가 이것을 덥석 이유는 그토록 자주 가던 일본을 안가게 된지 10여년이 흐른데다, 그곳이 마쓰야마이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기억이란..




   그 때가 2011년 늦가을이었다. 당시 나는 경남 창원에 있는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었고 마쓰야마에는 인근 니이하마(新居浜)로 출장을 가서 한국으로 복귀하러 들른 참이었다. 부산으로 가는 직항편이 없을 때여서 마쓰야마 공항에서는 후쿠오카로 가는 국내선을 타기 위한 표를 끊었다.

   체크인을 하고 검색대까지 통과한 뒤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안내방송이 있었다. 항공사인지 공항 직원인지 모를 영감이 종을 흔들었다. 내가 타야 하는 후쿠오카행 일본항공(JAL)기가 결항된다는 것이다. 앉아있던 승객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곧이어 위탁 수하물을 몇명의 직원이 수레에 싣고 왔다.

   제복을 입은 직원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대충 마쓰야마 역에서 히로시마로 가는 열차가 몇시에 있고 거기서 후쿠오카로 어떻게 가시라는 말인 것 같았다. 이어 승객들은 직원이 내주는 현금을 받아 들고 각기 캐리어를 찾아 공항을 나갔다. 진풍경이었다. 작은 공항이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옥신각신이 없을 수는 없지만 큰 소리 내는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해외 공항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고성으로 항의하는 승객은 한국인밖에 없다고 하는 말이 사실일 것이다.

   다른 승객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만 남았을 때,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후쿠오카에서 부산 가는 아시아나로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다른 교통편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했다. 늙은 직원이 가고 잠시 후 젊은 여직원이 왔다.

   "다음 비행기가 한시간 뒤에 있고 정상 운행합니다. 마침 빈 자리가 있으니 표를 바꿔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타야 할 부산행은 오늘 마지막 편입니다. 다음 비행기가 후쿠오카에 도착하는게 여섯시 몇분인가 되지요? 그러면 제가 갈아탈 시간은 30분 정도인데, 30분이면...후쿠오카 공항이 어떤 곳인지 아시나요?"

   어떤 곳이냐면 승객 몰릴 때 죽음의 공항으로 유명한데다 국내선과 국제선 청사 거리가 더럽게 멀다. 활주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인천공항처럼 지하 셔틀트레인이 있는게 아니어서 셔틀버스나 택시를 타고 공항을 완전히 빠져나와 빙 돌아가야 한다. 체크인과 검색, 도보 거리까지 생각하면 30분은 혀 가망 없는 시간이었다.

   직원이 사라졌다 다시 와서 탑승권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짐을 갖고 타시라고 했다. 아무렴, 말이라고 하나. 짐 찾는 시간이라도 줄여야지. 캐리어에 술 한병이 들어 있었는데 이제 빼 놓아야 했다.

   "선물입니다."

   "술 마시지 않습니다."

   "남편 갖다 드리세요."

   "미혼입니다."

   "그럼 남자친구에게..."

   상황에 맞지 않는 수작도 오고 갔다.


   후쿠오카까지 날아가는 비행기는 7,80인승쯤 되는 쌍발 프롭기였다. 저공이라 그림같은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지만 가는 내내 JAL에 어떻게 항의해야 하나, 호텔비를 쉽게 받아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훨씬 오래 전 타이항공에서 연착으로 인한 레이오버가 발생했을 때 허름하지만 항공사에서 제공한 호텔에 묵었는데, 그 때는 직원이 한국인이었고, 뭐 그런 생각만 하면서 갔다. 그리고, 마침내 후쿠오카에 도착했을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승객 여러분. 먼저 내릴 손님이 계시오니 도착 후에도 자리에 앉아 계셔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비행기가 정지해도 단 한명 일어나는 승객이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승무원이 왔고, 그를 따라 비행기 문을 나서자 트랩 밑에는 직원이 한명 마중 나와 있었다. 그 직원의 뒤로 종종걸음으로 승무원 전용 통로인듯 한 길로(무슨 사무실 같은 공간도 통과했다) 국내선 청사를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출구에는 택시가 한대 대기하고 있었고 내가 타니 곧바로 한국형 총알택시처럼 질주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국제선이었다. 그 상황에서도 뻔한 일인데 굳이 요금을 물어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히 택시 기사는 들은척도 안했고 대기하고 있던 또 한명의 직원이 택시 문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자기를 따라 오라 하는 것이다.


   아시아나 체크인 카운터에서는 즉시 보딩 패스를 내주었다. 택시에서부터 나를 밀착 방어하던 직원은 가는 곳마다 바닷물이 갈라졌다. 체크인 전 가방 검사, 출국심사 전 휴대품 검사가 눈 한번 감았다 뜨니 끝나 있었다. 출국심사는 아예 카운터 한곳을 비워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 얼굴 보지도 않고 여권에 스탬프를 찍었다.

   결과적으로, 국제선 면세구역에 들어간 건 국내선 착륙 15분만이었다.


   국내선에서 나를 안내한 직원이나 국제선 모세나 나에게 수없이 "모시아게 고자이마셍"을 외쳐댔다. 줄잡아 오십번은 들었던 것 같다. 모세는 내가 출국심사대를 통과할 때까지 내 뒤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때 즈음에는 미안하고 고마와 그녀에게 저절로 허리가 90도로 굽혀졌다.


   승객 한명 살리자고 참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했다. 항공사와 공항, 출입국 공무원 제각각 따라야 할 조직의 룰이 있을텐데도 짧은 시간에 '초당적 협력'이 이루어졌다. 이름없는 승객들의 협조도 고마운 일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비행기에 한자리 남아 있다는 것도 누군가의 희생 덕이 아니었나 싶다.

   일본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새삼 깨달았다.




   사실 마쓰야마 성(城) 이외의 볼 것과 도고온센에서의 목욕 이외의 체험은 딱히 없다. 대처(大處)의 활달함은 애시당초 없고 소도시의 아늑한 정취는 두시간만 즐기면 감흥을 잃는다. 전철로 한시간 거리인 우치코(內子)까지 포함해야 관광이란게 성립될 듯 하다. 그럼에도 갔다 오기를 참 잘했다.

   좋은 기억은 그 자체가 관광이다. 보이는 게 다 예쁘고 정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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