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콩닥거릴때 세련된 클래식

베토벤 월광 소나타

by 꽁스땅스

첫째가 10살, 둘째가 6살 때 피아노 연주 발표회가 기억난다. 피아노 선생님께서 유치부부터 고등학생까지 개인 레슨을 하는 제자들을 위해 만든 무대였다. 두 아이는 선생님과 곡을 정한 뒤 더 열심히 연습을 하는 듯 보였다. 학교, 유치원이 끝나고 틈만 나면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발표회 때 입을 연주복을 챙겨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선생님께 소개를 받아 이대 근처 드레스 숍에 갔다. 아이들은 취향대로 직접 고르고 입어보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2월 어느 날.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제대로 된 무대에서 연주하는 경험이 앞으로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자극이 될 거라는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발표회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무대에서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준비한 대로 멋지게 연주했다. 대부분 두 곡 이상 연주했는데 독주와 듀엣곡이었다. 객석은 가족들과 친구들로 반 정도 채워졌고 익숙한 곡은 익숙한 대로 생소한 곡은 생소한 대로 우리 아이들의 연주이니 박수로 격려하는 분위기였다. 둘째는 무대가 처음이고 어리기도 했는데 조그만 녀석이 흰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앞에 앉으니 내가 다 떨렸다. 잘 시작하나 싶더니 치다가 중간에 악보를 잊어버렸는지 한 마디를 두 번이나 둥당거리다 결국 멋지게 마무리를 해서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첫째는 제법 의젓하게 실수 없이 잘 연주해서 뿌듯했다.


첫째와 같은 학년 남자아이가 무대에 섰다. 차분하게 인사를 하고 페달에 발을 올려놓더니 잠시 심호흡을 하는 듯했다. 그리고 두 손을 피아노에 올리더니 진중하게 낯익은 곡을 연주했다. 초등 3학년 아이가 능숙하게 페달을 다루며 연주한 곡은 월광 소나타였다. 나를 포함한 관객들 모두 호흡을 멈추고 집중했다. 연주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들렸다. 나에게는 그 날 발표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가 되었다.


몇 년 후 레슨 곡을 고르다 그 발표회 기억이 나서 도전했다. 잔잔하고 느려서 쉬울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연주자 입장에서는 난이도가 있었다. 반복되는 멜로디지만 뒤로 갈수록 페달을 다루며 강렬한 느낌을 살리는 게 쉽지 않음을 이 곡을 연주하면서 처음 깨달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y4C8b5D_xvM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월광]

1800년부터 1801년 사이 작곡한 두 개의 피아노 소나타 Op.27(피아노 소나타 13번과 14번)에는 [환상곡풍의 소나타 Sonata quasiuna fantasia]라는 부제가 붙어 있단다. 원래 제목은 '피아노 소나타 14번이다. 소나타 형식을 버리고 환상곡풍의 자유로운 형식을 취한 것으로 베토벤이 기존의 소나타 형식, 피아노 스타일을 넘는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의지가 배어있는 곡이라고 한다.


독일의 시인이자 음악평론가 루드비히 렐슈타프가 베토벤 사후 5년 뒤인 1832년에 1악장을 "달빛에 비친 루체른 호수 위에 떠 있는 조각배"라는 문학적인 비유를 한 것이 자연스럽게 '월광'이라는 부제의 피아노 소나타로 유명해진 것이란다.


환상곡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연주를 들을 때마다 낭만적이고 시적이다. 피아노 소나타 14번은 당시의 베토벤이 사랑했던 제자이자 연인,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헌정한 곡이라고 한다. 연이은 실연으로 큰 절망감에 빠졌고 그의 청력 장애가 갈수록 심해져 괴로워하던 시기에 줄리에타는 진정한 마음의 위로였다고 한다.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던 그는 이 곡 전반에 그의 마음의 높고 낮은 파도를 그대로 나타냈다고 한다.


1악장이 느리면서도 자유롭고 서정적인 분위기와 후반부로 갈수록 격정적인 분위기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어둡고 부드러운 분위기 사이로 일말의 슬픔 혹은 비탄이 언뜻언뜻 내비치는 이 악장은 베를리오즈가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묘사할 길이 없는 한 편의 시"라고 표현할 정도로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단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체르니'는 '멀리서 음산하게 들려오는 야상곡'이라 표현했고 쇼팽은 월광 소나타 3악장에서 영감을 얻어서 '즉흥환상곡'을 작곡하기도 했단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 아다지오 1악장에서 베토벤은 "피아노의 페달을 반드시 써서 극도의 섬세함을 표현해야 한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1악장의 가장 큰 특징은 일정한 리듬이 되풀이되다가 갑작스러운 변화를 꾀하고 있어 마치 정지되어 있는 지점에 미묘한 격렬함을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잔잔한 호숫가에 달이 비친 느낌과 그 표현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고 있는 효과를 자아낸다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RjB7qY0V9cg

2악장은 나한테는 생소했지만 리스트는 "두 개의 심연 사이의 높은 한 떨기 꽃"과 같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처음 들어봤는데 경쾌하면서도 빠르고 특정음에 악센트를 주는 게 재밌게 느껴진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3악장. 저녁식사 후 부엌에서 정리하는데 TV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가슴이 콩닥거린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피아노 소리가 나를 안방 TV 앞으로 뛰어가게 했다. " 무슨 음악이지? 광고음악인가?" 남편한테 물어보니 " 구글 플레이 광고란다. 검색을 해보니 "월광 소나타 3악장"이었다. 내가 아는 월광은 1악장, 드뷔시의 '달빛소나타' 정도였는데 이렇게 빠른 템포이면서도 음 하나하나 힘이 있는 경쾌한 곡이 월광 3악장이라니. 새로운 발견이었다. 나중에 용기 내어 도전해 보았지만 악보나 템포를 따라잡기가 너무 힘들었고 천천히 치더라도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어 땀이 났다. 듣는 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던 아쉬웠던 곡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M5ca-5T2bVc


베토벤은 자신이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피아노를 음악적 실험을 수행하고 독창적인 어법을 창작하는 혁명가다운 음악가로 평가된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도 사용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이 월광 소나타라고 한다. 이 소나타는 출판되자마자 당대의 가장 중요한 연주 목록으로 떠올랐다고 한다. 지금도 피아노 입시곡으로 유명하다. 요즘 나의 경우 3악장을 더 자주 듣는다. 머릿속이 어수선하고 복잡할 때 해소되는 느낌이 좋다. 이 글을 쓰며 1악장부터 3악장까지 찬찬히 들어보니 누군가를 떠올리며 가슴이 콩닥거릴 때 들어야 되나 싶다. 마치 베토벤이 줄리에타를 생각하며 세련된 이 곡을 작곡했을 때처럼 말이다.




덧. 예전에 들었던 구글 플레이 광고 영상을 찾아보았다. 다시 봐도 여전히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https://www.youtube.com/watch?v=L3XRt3-wT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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