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만나려고

남자는 여자를 자신의 눈에 애정 있게 담은 적이 없다

남자 기억나?
여자 뭐가?
남자 우리 전주국제영화제 갔을 때 말야.
여자 언제? 매년 갔잖아.
남자 재작년에.
여자 네가 전주행 기차 놓칠 뻔 했던 그때?
남자 응, 그때.

  재작년 봄, 여자는 서울에서 전주행 기차를 탔다. 그 기차는 남자가 사는 천안에 들려 남자를 태웠다. 남자가 플랫폼을 잘못 아는 바람에 놓칠 뻔 했지만.

남자 우리는 어떻게 일 년에 서너 번 밖에 못 보냐? 영화제 아니면 얼굴도 못 보겠어.
여자 그러게. 영화제 아니면 얼굴 보기 힘드네. 그런데 재작년에는 왜?

  재작년 그날, 남자는 막걸리를 아주 많이 마셨다. 막걸리를 한 주전자 시킬 때마다 새롭게 세팅되는 안주에 두 사람은 끊임없이 잔을 채우고 부딪치고 비웠다. 여자는 남자가 걱정이 되었다. 두 사람은 이미 세 주전자를 비웠고 테이블에는 간장게장이 올라왔다. 남자는 취기가 오를 대로 올랐는지 여자에게 말했다.

남자 야, 너 내가 왜 매년 전주 오는 줄 아냐?
여자 영화 보러 오는 거잖아.

  여자는 알고 있었다. 남자가 영화를 보러 전주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남자 그래, 영화 보러 오는 거지.
여자 너 취한 것 같아. 그만 일어나자.

  남자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남자 윤이는 어떻게 나를 한 번 안 만나주냐?
여자 취했어. 소란 피우지 말고 나가자.

  여자가 계산을 하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막걸리집 주인이 문 밖을 손짓하며 먼저 나갔다고 말해줬고, 여자는 남자의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예약해놓은 게스트하우스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여자 그쪽 아니야.

  남자가 멈춰섰다. 여자는 달려가서 재킷을 걸쳐주며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약간 충혈된 남자의 눈동자는 텅 빈 것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저 너머를 보여주는 것 같아 여자는 눈을 돌렸다. 남자는 여자를 자신의 눈에 애정 있게 담은 적이 없다.

여자 가자. 
남자 우리 오목대 올라가자.
여자 이 시간에 어떻게 올라가? 열두시 넘었어.
남자 거기 올라가도 윤이네 집은 안 보이더라.
여자 그만해.
남자 나 안 취했어. 주사 부리는 거 아니다?

  혀가 잔뜩 꼬여있는 말에도 남자는 몇 번을 더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자 그만해, 이제.
남자 괜찮아. 괜찮아. 취해서 이러는 거 아니라니까?
여자 그래, 그래도 그만해.
남자 첫사랑이 사는 곳 왔는데 어떻게 그만하냐. 그냥 딱 한 번만 보고 싶어서 그래. 저기 몇 백 미터 떨어져 있어도, 뒷모습만 보아도 나 알아볼 수 있어.
여자 그만해. 네 첫사랑 얘기. 나는 영화 보러 전주 온 게 아니라 너 보러 전주 온 거란 말야.

  여자가 말끝을 흐렸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오른팔을 여자의 어깨에 두르고 천천히 전주의 밤거리를 걸었다. 오목대와도 게스트하우스와도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남자 재작년은 왜긴? 그냥.
여자 싱겁긴.
남자 야, 나 뭐하나 물어봐도 돼?
여자 뭔데?
남자 난 오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아니라 너 보러 왔는데,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