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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연의 시간

창작의 어머니로부터의 독립

by 이주인

90년대 초반은 개인컴퓨터 보급이 막 시작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미취학 아동이었던 내 기억 속 첫 컴퓨터는 아마 ‘486’이라 부르던 도스 기반의 컴퓨터였다.


외가 맏이였던 외삼촌의 장손인 외사촌형의 컴퓨터였는데, 기억하기로는 당시 300만 원에 육박하는 돈을 주고 샀다고 기억한다. 지금으로 치면 못해도 1,000만 원은 족히 될 듯한 거액이다. 컴퓨터가 대중화가 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얼리어답터였던 셈이다.


외삼촌은 당신의 자녀에게 교육 그리고 신시대를 열 문명의 최첨단 열쇠를 주었다. 하지만, 내가 본 그 486 컴퓨터의 화면은 영어로 가득한, 그 끝은 언제나 게임으로 다다르던 루틴이 전부였다.


초등학생 당시 난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에 부모님도 딱히 교육열이랄 것이 없었는데, 희한하게 컴퓨터 학원을 보냈다. 관련 자격증뿐만 아니라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부터 문서작성까지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쳐주는 학원이었다.


그렇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될 때는 스마트폰 학원이 없었지만 컴퓨터가 보급될 때는 컴퓨터 학원이 있었다. 그 덕에 지금도 타이핑은 잘하고 있다.


사실 학업성취도가 떨어지는 내게 맞는 솔루션은 일반 학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망이 없다 생각한 건지 아니면 다가오는 디지털시대의 막차라도 타라는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집에 컴퓨터가 생긴 것은 시간이 꽤 지난 초등학교 막바지 겨울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브랜드였는데, 부팅 후 바탕화면에는 지금도 유명한 스타크래프트와 몇 가지 게임이 추가로 설치돼 있었다. 도스 운영체제부터 다뤄온 이른바 ‘컴수저’인 친구는 게임 이야기를 하다가 내게 ‘CD를 굽는다’는 말을 해줬다. 그저 문서 작성이나 좀 할 줄 알던 나는 어떻게 ‘굽는’ 건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컴퓨터를 가지고도 인터넷은 꽤 후에 개통했기 때문에, PC방을 많이 다녔다. 생각해 보면 PC는 단순한 매개체일 뿐 본체는 인터넷이었던 것 같다. 초창기 인터넷은 무법지대와 같았다. 접속해서 검색어를 넣으면 그게 뭐든 거의 다 볼 수 있었고 내려받을 수 있었다. 부족한 것은 속도뿐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불법 다운로드가 성행했던 셈이다. 물론 나도 거기에 동참했고 당시에는 그 무게를 몰랐다.


별 다른 약속이 없는 휴일이면 산책을 좀 하거나 자전거를 타다가 카페에 가곤 한다. 노래나 경제 뉴스를 자주 듣기에 습관처럼 이어폰을 끼는 편이다. 음악이나 기타 스트리밍 등 따져보면 한 달에 고정비도 적잖이 나간다. 언제부터 이 소비패턴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는지는 모르겠다.


‘사람들이 정성 들여 만든 창작물이니 당연히 대가를 지불해야지’나, ‘내가 생각 없이 다운로드한 것이 올바른 행동이 아니었구나’와 같은 아름다움 마음은 아니었다.


굳이 짚어본다면, 어릴 때나 학생일 때보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생겼다는 것. 그리고 그냥 그렇게 해 버릇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라 생각한다.


전 직장을 처음 다녔을 때, 디자인 직무를 처음 맡았다. 이용자로서 소비하던 것의 일부를 만드는 입장으로 바뀐 셈이다. 마침, 같은 쪽에 몸담고 있는 친구가 있어 많이 물어보곤 했다. 보통 모든 질문은 결국 하나로 모이는데 그게 바로 ‘창작’이었다.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내게 친구가 제안한 것은 ‘카피’였다. 물론, 단순한 ‘베끼기’가 아니라 참고해서 비슷한 느낌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 하지 않던가. 그것은 실제로 빠르고 효과적이었다.


지금은 조금 식었지만, 취미로 한창 친구와 사진을 찍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위 말하는 ‘포인트’에 가서 사진을 찍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들. 이 의문은 아마도 친구와 내가 사진에 무언가 담아보려던 같잖은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를 테면 ‘오리지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잘 팔리고 잘 나가는 것을 적당히 잘 버무려 만들어 본들, 내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된 말로 ‘기깔난’ 디자인으로 상사에게 인정을 받아도 그 칭찬은 대부분 내가 레퍼런스를 삼았던 어느 원작자의 몫으로 돌아갔다.


결국 남의 레시피를 보기 좋게 베껴 만들어낸 결과물은 나의 ‘향’이 묻은 무엇인가 일뿐이었다. 여기에서 얻은 보람은 없었다. 아마 이때가 ‘창조의 어머니’에게서 독립할 시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일을 하면서 건방진 생각을 하곤 했다. 그것은 글이든 사진이든 뭐가 ‘쉽게' 팔리는 것인지 알겠다는 것이다. 보통은 어떤 분야를 이끄는 극소수가 있고, 그 밑으로는 그 낙수를 재빠르게 받는 대다수가 있다.


주식시장 격언처럼 굳이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지 않더라도, 눈치껏 안테나를 세우고 있으면 챙겨갈 수 있는 몫은 있다. ‘그걸 아는 사람이 왜?’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결국, '쉽게' 팔릴 가능성이 높은 것은 만들고 싶지 않고, 그걸 넘어서는 ‘대단한’ 것은 내 능력을 넘어선다. 그래서 결코 내가 걸을 수 없을 이 갈림길에서 내 창작을 ‘취미’라 부르는 치사한 한 수를 두었다.


그렇게, 얻는 것은 없을지언정 언제나 내가 오리지널일 수 있게. 이를 테면, 오랜 시간 꾸준히 ‘훈연’을 할 뿐이다. 내 레시피가 맛이 좀 없으면 어떠한가, 그래도 기억엔 남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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