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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루 Apr 21. 2019

나다운 색이 필요할 때
(전국정치평론대회 입상작)

<채식주의자>에서 발견한 '표현의 자유'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있어. 그게 뭔지 몰라. 이젠 브레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의 한 대목이다. 소설에서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선언하고 나서, 주변의 무수히 많은 제약들에 부딪힌다.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외부의 압력들은 영혜가 오롯이 영혜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그 속에 수반되는 강한 폭력성은 더욱 배가되어 영혜에게 전해진다.      


   주변에서 마주했던 무수히 많은 제약들. 그리고 영혜가 오롯이 영혜로 살아가고 소리낼 수 없게 막았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강한 법률이 그녀를 막아섰는가? 제도적 제재가 그녀를 옥죄었는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의 선한 의지로서, 다수의 이름으로 그녀를 소수자로 낙인 찍어 버렸다.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다수의 생각. 그리고 민주사회의 원동력이 되는 다수의 의견. 그것이 바로 영혜를 그토록 괴롭게 하던 원흉이었던 것이다.      



   민주사회를 잘 굴러가게 하는 에토스가 민주시민을 행복하지 못하게 한다? 매우 모순적인 말이니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보다 자세한 법적, 철학적 설명을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처음 민주사회가 형성될 때, 분명하게 있던 것은 바로 다수에 대한 신뢰였다. 한 사람 혹은 소수에 의해 운영되는 국정은 필연적으로 부패 할 수 밖에 없음을 경험한 바있다. 다수의 뜻에 의한 통치는 부정한 방식으로의 권력 남용을 방지할 것이라고, 말하자면 낙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간과한 민주주의의 핵심이자 장점이 최대의 약점으로 부상하는, 이른바 다수의 횡포가 자행되기 시작한다. 다수의 의견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곧 민주사회에서 권력이 되는 절차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 다수결을 거치면 정당화되는 모습을 보이기도한다. 하지만 소수에 의해 권력이 자행되는 것만큼이나 다수에 의해 권력이 자행되는 것은 나쁘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국민 전체의 대의를 위한 방향이 아닌 식으로의 권력 행사는, 설령 정당한 절차를 따랐을 지라도 합리화 될 수는 없다.      



   국가권력은 곧 다수의 권력이다. 다수의 동의에 의해 절차적 정당성을 얻어 갖게된 권력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의 주류 집단이 갖고있는 인식 또한 다수의 권력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은 자칫하다간 소수의 기본권을 침해 할 수 있는 양상으로 남용될 여지가 언제나 존재한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지양되어야할 일이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 기득권내에서 그리고 소수자 입장에서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헌법적 가치가 바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하는 이유를 두가지로 명시할 수 있다. 먼저 보다 풍성한 민의를 정치에 반영하기 위함이다. 다양한 목소리를 많이 반영하면 할수록 그것이 하나의 척도가 되는거 마냥, 그 정당성은 강해진다. 그리고 이 정당성은 정치적 효능감에 영향을 미치므로 국민을 통합하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다수의 의견에 소수의 의견이 가려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소리가 너무 작아서 들리지 못하는 곳에 확성기를 가져다 줄 뿐 아니라, 다수의 무리에 속해있지만 자신의 주장이 통념에 의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닌지 일깨워주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잠재적 소수자의 핍박을 방지할 수 있다.



   다수로부터의 핍박을 막을 수 있는 구체적 방향성을 세가지 시선을 갖고 이야기해볼 수 있다. 먼저 수용자들의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내가 받아들이는 통념이 진실된 건지, 이 생각으로 하여금 내가 되려 고통받고 살지는 않았는지 깨우쳐야한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자신의 본질을 깨우쳐냈고 그것을 세상에 표현하고 구현해내려는 과정에서 많은 억압을 받았던 케이스이다. 즉 우리 모두 영혜가 본래의 ‘나무색’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 쳤던 것처럼, 우리의 색을 찾으려 애써야한다는 것이다. 



   첫 번 째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듣는이들의 태도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듣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한다. 자기만의 아집에 빠지지 말고, 저들의 말이 맞을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한다. 즉 내가 진리라 믿는 것이 진리일지 검증하는 과정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이다. 논리로써가 아닌 예민한 사안에 대해 감수성을 갖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다루는 담론의 핵심은 바로 '이 감수성을 어떻게 갖게할 것인가'에 있다. 특정 성에만 국한해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하는 습관을 내려놓고 감정적으로 상대 성에 대해 공감할 줄 알아야만이 진정한 이해와 존중이 꽃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무지해서 그런행동을 하는 것보다, 안 겪어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더 고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거리낌없이 나눌 나눔의 장이 마련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장이라 함은 말 그대로의 물리적 수단, 분위기, 법적 제도 모두를 통틀어 말한다. 불편한 점에 대해 이야기해도 ‘뭐 그런거 가지고 까칠하게 구냐’ 따위의 반응이 형성되는 분위기 속에 어떠한 허심탄회한 토론도 피어나긴 힘들다. 국회나 중대한 의사결정을 대신해 진행하는 회의집단에는, 주류가 형성한 거대담론에 반기를 들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게 하기 위해 30%이상의 비주류 세력을 형성해 두는 것이 그 예이다.



   민주주의사회는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세상임과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절대적 가치를 기저에 두고 있는 세상이다. 그것은 바로 ‘모두의 기본권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는 것이다. 내가 소중한 것을 아는 것 만큼 남이 소중한 것을 안다면 필연적으로 존중과 다양성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는 민주사회를 존립할, 나아가 공공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틀이 된다.  



   채식주의자 영혜의 기본권 발현은 주변의 가족과 친구들을 거슬리게 했다는 이유로 비난되고 제재될 명분을 얻지는 못한다. 하지만 주변인들의 기본권이 역시나 침해되는 양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두 소중한 가치 사이의 접점을 찾아가는 것이 많은 이들이 부대끼며 공존하는 사회속 필요시되는 미덕이다.  영혜가 나무색을 찾아 간것처럼 본디 타고난 ‘나의 색’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그것과 세상의 색 사이에 접점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나다운’ 개인이 구성원이 된 사회 속에서 비로소 우린 위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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