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문득, 늘 마시던 아메리카노 값이 오른 걸 깨닫는다. 4,500원이던 컵이 어느새 5,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요구한다. 빵집 진열대의 소보루는 여전히 3천 원이지만 손안의 무게는 가볍고, 라면은 몇 달에 한 번씩 100원씩 올라 소리 없이 200원이 더해졌다. 버거에서 치즈 한 장이 사라진 것도 이제는 익숙하다.
가격은 멈춘 듯 보이지만, 우리 지갑은 매일 살금살금 털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스니크플레이션(sneakflation)’이다.
스니크플레이션은 세 가지 얼굴로 나타난다. 첫째, 가격은 그대로 두고 용량을 줄인다. 과자 봉지 속 질소처럼 우리 눈을 속인다. 둘째, 한 번에 크게 올리는 대신, 잊을 만하면 조금씩 자주 올린다. 끓는 물 속 개구리처럼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게 만든다. 셋째, 가격과 용량은 유지하되 원재료나 성분을 은근슬쩍 바꾼다.
이토록 다채로운 얼굴의 약탈자가 일상에 숨어들지만, 우리는 별다른 저항 없이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어차피 다 오르잖아.”
바로 그 체념이 문제다. 소비자가 입을 다물면 기업은 더 대담해지고, 정부는 “조용하니 괜찮겠지”라는 착각에 빠진다. 누군가 일부러 담합할 필요도 없다.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 그 침묵 자체가 거대한 ‘담합의 카르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눈 뜨고 당하면서도, 당하는 줄 모르는 연극 속에 앉아 있는 셈이다.
스니크플레이션의 부담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소득에 역진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가 상승으로 인한 연간 추가 지출액을 추산해보면 그 차이는 명확하다. 월 소득 200만 원 가구는 약 48만 원(소득의 2.0%)이 추가 지출되지만, 월 300만 원 가구는 36만 원(1.0%), 월 500만 원 가구는 30만 원(0.5%) 수준에 그친다.
가난할수록 더 가난해지는 구조. 우리의 침묵은 단순한 개인의 체념이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장치가 된다.
해답은 거창한 곳에 있지 않다. 물론 정부는 피부에 와닿는 ‘생활물가 체감지수’를 발표하고, 필수재 가격 급등 시 ‘물가 청문회’를 여는 제도적 장치를 고민해야 한다. 기업 역시 가격 인상 전 원가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소비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변화를 이끌어낼 가장 강력한 힘은 우리에게 있다. 지금 당장 스마트폰 앱을 켜고 매주 같은 품목의 가격을 기록해보자. 라면·우유·계란·사과·빵. 단 다섯 가지 품목이라도 좋다. 매주 화요일, 같은 마트에서 기록하는 것이다.
한 달만 지나도 이 기록은 막연한 체념이 아닌, 날카로운 ‘증거’가 된다. “다 올랐다”는 한숨이 “이건 분명 이상하다”는 명확한 목소리로 바뀔 수 있다.
스니크플레이션은 살금살금 다가와 우리 일상을 잠식한다. 그러나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은밀함은 깨진다. ‘스니크플레이션’이라는 현상을 아는 것, 나의 소비를 기록하는 것, 그리고 이것에 대해 주변과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첫 번째 저항이다. 침묵의 카르텔을 깨뜨릴 힘은 결국, 평범한 우리의 작은 목소리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