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불행, 스치는 행복

by 건강한 오후

퇴직 후 3년이 흘렀을 때, 나는 비로소 세상의 배경막 뒤로 밀려난 기분을 느꼈다. 25년 동안 내가 깔고 앉았던 그 견고한 의자는 누군가의 새로운 이름으로 채워졌고, 나를 찾던 벨 소리는 파도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퇴직 첫 달, 나는 습관처럼 주머니를 더듬었다. 회사의 호출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나도 주머니 속은 잠잠했다. 가끔 울리는 진동은 보험 권유거나 통신사 안내 멘트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오랜만에 전화가 울렸다. 설레는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고객님, 저금리 대출 안내입니다"라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루 종일 입을 떼지 않아도, 누구 하나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거대한 침묵이 되어 나를 눌렀다.


예전에는 내 상실감이 가장 특별하고 억울한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침묵은 5, 60대 사내들이 가장 흔하게 공유하는, 놀랍도록 닮은 무채색의 시간이었다.


얼마 전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진료 번호가 불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낯선 타인이었지만, 모두 비슷한 무게의 근심을 짊어지고 있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중년 여성의 손끝은 갈 곳을 잃어 보였고, 옆자리 노인이 내쉬는 깊은 한숨은 내 폐부까지 서늘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각자의 고통에 갇혀 있었지만, 그 공간의 공기는 묘하게 끈적하며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문득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10년 전, 내가 부서장 시절 아끼던 후배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예전 같으면 그는 복도 저편에서도 나를 알아보고 달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내 얼굴을 확인하는 데 2초가 걸렸다.


"선배님, 여기서 뵙네요.“


그가 건넨 말은 공손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내 어깨 너머 허공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그는 내 양복 안주머니에 있던 그 네모난 종이와 내 이름을 완벽하게 연결했을 것이다. "부장님, 별일 없으시죠?" 하며 살갑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주머니에는 나를 증명할 종이가 없었다. 나는 그저 '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전에 알았던 늙은 남자'일 뿐이었다.


"그래, 자네도 여기 왔구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말을 이으려다 멈췄다. 예전에는 회사 실적, 프로젝트, 인사이동 같은 공통의 언어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이에는 함께 딛고 설 그 어떤 공통분모도 없었다. 그는 곧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나는 대기실 의자에 엉덩이를 깊이 묻었다. 나를 규정하던 갑옷이 사라진 순간, 내 존재의 윤곽이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자동문이 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닫혀버리는 듯한, 발바닥이 땅을 제대로 딛지 못하고 붕 떠 있는 듯한 감각.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직사각형의 종이가 사라지면, 사람의 선명도마저 흐려진다는 것을 나는 머리로만 알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겪는 이 존재의 흐릿함이 바로 대기실의 모두가 짊어진 보편적 풍경이라는 것을. 나만 특별히 외롭고 억울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자신의 상실과 무력감 앞에서 고독하게 앉아 있었고, 그 닮은 등 뒤로 우리는 말 없는 위안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이 무게는 누구나 짊어지고 있구나'라는, 비로소 획득한 인간적 안도감이었다.


진료를 마치고 대기실을 나서는데, 뒤에서 "선배님"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 후배가 자판기 앞에 서서 손짓했다.


"커피 한 잔 하시겠습니까?“


동전 떨어지는 소리. 자판기 버튼을 누르는 둔탁한 소리. 위잉, 기계 돌아가는 소리. 툭, 종이컵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쪼르르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소리. 그 소소한 소음들이 우리 사이의 텅 빈 공간을 메웠다. 그가 내민 종이컵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어깨의 견장도, 지갑 속의 증명서도 없는 우리 사이에 남은 것은 이 자판기 커피 한 잔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가 웃었다. 어색했지만, 따뜻한 웃음이었다.


"건강하세요, 선배님.“


그가 돌아섰다. 나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얇은 종이 너머로 전해지는 뜨끈한 온기. 누구와 비교할 필요도, 성과를 증명할 필요도 없는 정직한 온도였다.


젊은 날의 행복은 크고 명확했다. 대학 합격증, 첫 출근 날 책상 위에 놓인 내 이름이 박힌 명패, 승진 발령장. 그때의 행복은 산 정상에 깃발을 꽂는 성취였다.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고, 측정 가능했기에 뚜렷했다. 그러나 그 무거운 외투를 벗고 나니 행복의 부피는 작아졌다.


톨스토이는 소설의 첫 문장에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고 썼다. 나는 종이컵의 온기를 느끼며 생각했다. 어쩌면 그 문장은 수정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늙음과 상실 앞에서는 정반대다.


우리가 겪는 불행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연락이 끊긴 침묵, 희미해지는 존재감,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무력감. 이것은 내가 특별히 겪는 비극이 아니라, 은퇴한 사내들 모두가 짊어지는 공통의 짐이었다.


오히려 행복이 제각기 달랐다. 누군가는 손주의 웃음에서, 누군가는 아침 산책길의 바람에서,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자판기 커피 한 잔에서 구원을 본다. 불행은 보편적이고 거대하게 우리를 덮치지만, 행복은 아주 작고 개별적인 순간 속에 숨어 있었다.


내 불행이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위로가 되었다. 병원 대기실의 낯선 등(背)들과 나는, 서로의 이름을 모르지만 서로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나는 병원 문을 나선다. 손에 쥔 종이컵은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어 있다. 하지만 이 작은 온기만으로도 집까지 걸어갈 힘은 충분하다. 거창한 이름 없이, 증명할 서류 한 장 없이, 그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쥔 손으로 나는 다시 세상 속을 걷는다.


이것이면 되었다. 정말, 이것이면 되었다.


공지영『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삽입된 글


누구에게나 슬픔은 있다. 이것은 자신이 남에게 줄 수 없는 재산이다. 모든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있지만 자신만은 남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소유한 비극은 있다. 그 비극은 영원히 자신이 소유해야 할 상흔이다.

눈물의 강, 슬픔의 강, 통곡의 강, 슬픔은 재산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 분배되어 있다.


---박삼중 스님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