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수 있고, 가야할 길, 가버린 길」(어느 저능아의 심경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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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퇴임 기념 고별 강연 (2001. 9. 11)
「갈 수 있고, 가야할 길, 가버린 길」
― 어느 저능아의 심경고백
1. 윤삼월에 태어난 어떤 아이
1968년 3월, 전임강사로 출발한 제가 이제 정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한 몸으로 두 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장거리 경주의 완주를 한 셈이 아니겠습니까. 특정 종교가 아직 없는 저로서는 이렇게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군요. 이는 오로지 천지 신명의 도움이라고. 또한 돌이켜 보면 이토록 모자라고 서툰 저를 그래도 옆에서 도와주고 야단쳐주고 감싸주시기까지 한 선배, 동료, 후배들의 눈길이 아니었던들 결코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을 터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제가 태어난 해는 1936년 음력 윤 3월 12일이었고, 곳은 경남 김해군 진영읍 사산리 132번지입니다.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 신기록을 세운 바로 그해이지요. 윤삼월에 태어났기에 제 생일은 20년만에 한 번밖에 돌아오지 않거니와, 이로서 저는 당사주나 토정비결 기타 점치기 등에서 예외적 존재였으며, 또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윤달이기에 잉여의 부분이라 자처했던 것이지요. 살아오면서 어려운 고비나 의외의 장면에 부딪힐 적마다 저는 속으로 가만히 뇌곤 했습니다. 이건 단지 잉여 부분이야라고. 그러면 고통도 기쁨도 헛것의 빛깔을 띄어 조금은 평온을 찾곤 했습니다. 한 농민의 장남으로 태어난 저는 둘째 누님(제가 태어났을 땐 큰 누님은 이미 시집가고 없었지요)의 뒤를 따라 산과 개울을 넘어 십 리길의 읍내 국민학교를 다녔으며, 해방을 맞고, 졸업을 하고 중학은 마산에서였습니다. 기차를 타고 겨우 도착한 그곳에서 처음으로 쪽빛 바다를 보았습니다. 제가 다닌 중학은 상업학교였기에 열심히 주산과 부기를 공부했고, 은행 취직이나 대학이라면 상과로 향해져 있었지요. 그러나 어쩐 일인지 저는 은행으로도 상과 대학으로도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잘 설명할 수 없는데, 문학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시, 소설 따위란 대체 무엇인가. 어째서 그것이 나를 매료시켰을까.
이 물음에 한동안 저는 자체분석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외로움이 그 하나. 제가 자란 곳은 마을에서도 떨어진 강가 포플러 숲이었지요. 낮이면 포플러 숲의 까마귀와 메뚜기, 뒤뜰 참새를 벗하며 그들의 언어에 친숙했지요. 밤이면 누님이 펼쳐놓은 교과서가 그 다른 하나. <아까이 도리 고도리……> 등 뜻도 모르는 일본어 동요를 흉내내면서 갖가지 그림과 글자로 채워진 그 교과서들이란 그 자체가 세계로 향한 창이었던 셈. 또다른 하나는 제가 훗날 어른이 된 후 알아낸 것으로, 일제의 근대 교육의 지향 속에 놓인 신칸트학파의 이념이 그것. 후진국 독일의 철학을 도입한 일본 정신계 속엔 물질 경시, 문화 숭배 사상이 스며들었고, 이것이 문학, 예술 등에 대한 교육적 이념에 모종의 몫을 한 것으로 보였지요. 훗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미적 자율성이 그것이겠지요. 적절한 사례라 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제대(帝大) 출신의 유진오, 이효석, 그리고 김사량 등의, 문학하기에의 편향성도 이로써 조금은 설명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자체 분석도 오늘의 이 마당에서 보면 별 도움도, 모종의 위안도 되지 못함을 저는 깨닫고 있습니다. 구약이나 희랍 고전에서는 예언자들이 등장, 태어나는 한 아이에 대해 그의 운명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면을 대하면 저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받게 됩니다. 한 인간의 행로란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 신들도 이를 바꿀 수 없다는 것. 이 사실만큼 인간적인 것이 따로 있을까. 비로소 저마다의 고유한 죽음을 죽을 수조차 있으니까. 어느 별자리 아래 태어났고 그 별이 지켜주는 삶과 죽음이니까. 윤삼월에 태어난 이 아이는 이런 행운에서 아득히 벗어나 있지 않았던가.
2. 학문으로 나아간 길
문학을 하겠다고 혼자 결심했다면 응당 문과 대학을 택해야 했을 터이나 저는 이 점에서도 썩 둔감했습니다. 교사 생활을 하며 문학하기가 그것인데, 제딴엔, 직업과 이상의 동시적 전개 방식이었지요. 얄팍한 생각, 땅짚고 헤엄치기의 생각이라고나 할까. 문학하기가 그렇게 호락호락했을까. 좌우간 대학을 교원 양성 대학으로 하고, 국문학 전공으로 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들어와 보니, 대학이란 문학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학문(과학)하는 곳이 아니었겠습니까. 향가에 앞서 향찰식 표기법부터 시작해야 했고, 두시언해 초간본, 중간본의 표기법 차이 등에 대한 공부가 앞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학문이란, 그러니까 객관적 논리의 세계 탐구이며 또 그 체계화인데, 문학의 경우 기껏해야 섬세하기 짝이 없는 작품을 단순한 몇 개의 논리로 환원시켜 보이는 것이었지요. 이른바 리얼리즘의 속성인 토대환원주의(土臺還元主義)가 그런 사례의 전형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당초의 제 목표인 글쓰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득할 뿐 어느 구석에도 발붙일 데란 없었지요. 아무도 수심(水深)을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겁도 없이 청무밭인가 하고 날아간 초승달의 흰나비 꼴이었다고나 할까요.
제 군번은 0007470입니다. 학보병인 까닭. 대학 2학년때 군으로 도망쳤다고 하면 적절할까요. 갓 수복된 3·8선 말뚝이 서있는 중부 전선 모사단 수색대대 배치더군요. 첫 휴가 때를 잊지 못합니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길조차 막힌 백색의 세계에서 인근 탱크부대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 나와, 미아리 고개를 넘었을 때의 그 낯섦이라니. 붉은 벽돌집 색깔이 그럴 수 없이 낯설었지요. 더욱 아득한 것은 부모 계신 고향으로 가지 않고 학교로 직행했을 때였습니다. <자네, 휴가라서 왔는가?> 교수들도, 급우들도 이 한마디 뿐이 아니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 모두 자기 일상에 매달려 있었으니까. 고립무원이었다고나 할까요.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면접을 보시던 심악 선생께서 <자네 군복무 기간이 어째 이렇게 길었는가>고 물으셨습니다. 잠자코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군복을 벗고 복학하여 대학원에 적을 두게 되었을 땐 벌써 소설이나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깡그리 떨쳐버린 뒤였지요. 학문을 해보겠다는 것, 학문이란 대학에서만 가능하다는 것, 문학의 과학이란 6·25를 마악 끝낸 이 판에선 뉴크리티시즘밖에 없다는 생각을 품었기에, 도서관에서 이들 서적읽기에 한동안 골몰했습니다. 당시의 동숭동 도서관 2층 열람실에는 계간지 『캐년 리뷰』, 『파르티잔 리뷰』, 『예일 리뷰』가 일 년치씩 묶여져 개가식으로 꽂혀 있었습니다. 어학 실력도 돌보지 않고 사전을 찾아가며, 그야말로 판독하고 베끼기를 일삼은 바 있습니다. 제가 이런저런 독서와 눈동냥, 귀동냥으로 얽어 본 느낌을 훗날 적은 것이 [뉴크리티시즘에 대하여](1969)입니다. 제 자신이 힘껏 이해한다고 한 한가지 결실이라고나 할까요. 지금 다시 보면, 혹은 전문가의 안목으로 보면 오해, 독단 투성이임엔 틀림없겠지요. 단지 마음 가난한 한 국문학도가 문학의 학문화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자 고민한 흔적입니다.
뉴크리티시즘이란 무엇일까. 지금도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것이 분석 비평의 일환이라면 정병욱 선생의 [쌍화점고](1962), [나의 침실로]를 분석한 송욱 교수의 [시와 지성](1955), [추천사], [행진곡] 등을 분석한 김종길 교수의 [의미와 음악](1966),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과 체홉의 [비탄]을 대비하여 분석한 유종호 교수의 [서구 소설과 한국 소설의 기법](1964) 등이 아마도 그러한 범주로 분류될 수 없을까.
매우 불행하게도 저는 이러한 분석 비평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선뜻 이런 공부로 나아갈 수 없었는데, 뉴크리티시즘을 낳게 한 역사적·사상적 배경을 조금 알게 된 것에 이 사정이 관련됩니다. 실상 그것은 최재서의 출세 논문인 [T. E. 흄의 비평적 사상](『思想』, 1934. 12, 日文)에서 촉발된 것이기도 합니다. 불연속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신고전주의가 기실은 반휴머니즘에 속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그것은 필경 파시즘에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 뉴크리티시즘이 미국 남부 벤드빌트 대학 중심의 『도피자』 그룹에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이 이로 보면 어찌 우연이랴. 남부 농본주의자들, 노예 해방을 철저히 거부하는 귀족주의적·보수주의적 세계관의 반영으로서 나타난 것이 뉴크리티시즘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New란 새로움이 아니라 인류사의 진행 방향에 역행하는 반동 사상이 아니었겠는가. 한 작품에는 절대적인 해석 하나만 있다는 것. 그것은 전문적 기능 보유자만이 독점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도도한 귀족주의야말로 뉴크리티시즘을 탄생, 존속, 발전시킨 원동력이며, 그 온상이 바로 대학 인문 과학이라는 성채가 아니었을까.
이러한 생각에 미치자 물론 제 공부의 깊이가 모자랐음에서 온 것이지만, 저는 뉴크리티시즘에 대한 회의가 뒤따랐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자질이 제일 잘 드러나는 시 자체에 대해서도 흥미를 잃어갔던 것입니다. 제 석사논문이 [시의 구조적 특성](1962)이었지만 그런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 엷어졌으며, 또한 이는 학문(과학)에 대한 흥미까지 엷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제가 비평가로 문단에 나아가고,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1973)에로 몰두해 갔음은 이런 사정과 관련됩니다. 비평사 연구에서 제가 당황한 것이 카프의 존재였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근대 문학이라 할 때의 그 근대성의 핵심이라는 사실의 발견이야말로 지금껏 제 공부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근대란 무엇인가. 이런저런 규정 방식이 있을 수 있겠거니와, 그 무렵 제가 이해한 것은 그것이 인류사의 어떤 단계에 대한 명칭으로서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A) 국민국가(nation-state), 사회·경제적으로는 (B) 자본제 생산양식(mode of capitalist production)의 전개 단계가 그것입니다. 이를 인류사의 진행 방향이라 한다면, 따라서 보편성이라면, 지역에 따른 불균형 발전론이 문제될 터이며 이를 특수성이라 부르면 어떠할까. (C) 반제 투쟁, (D) 반봉건 투쟁 등이 이에 속할 터입니다. 한국 근대문학을 규정할 때 제가 적용한 도식이 여기 있었지요. 참으로 난감한 것은, 이 보편성과 특수성의 동시적 인식에 있었지요. 이 둘이 거의 절대 모순성으로 인식되어마지 않는 장면이 너무도 의식을 누르기 때문이었지요. 도남, 임화 등의 선학들의 고민도 이로써 조금 이해되었지요. 제가 세워본 <국어(국가어), 민족어, 토착어>, <인공어, 준인공어, 기호> 등의 범주 설정도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혈의 누](1906)의 작가 국초는 일본식 표기체계에 기대었고,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의 작가는 <彼는>이라고 망설임도 없이 적었으며, 춘원의 처녀작이 일어로 되어 있고, [오감도](1934)의 시인 역시 망설임도 없이 일어로 썼을까.
이러한 근대의 과제들이 카프 문학에서 십자포화를 맞고 있는 것처럼 제게 보여마지 않았습니다. 여기엔 한 시대의 인식적 지평에 대한 설명이 없을 수 없는데, 이른바 근대의 이해 지평에 놓인 헤겔주의가 그것입니다. 주인·노예의 변증법을 중핵으로 한 이 사상만큼 근대 및 인간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었을까. 그 직계 마르크스도 루카치도 이 점에서 일치된 것처럼 당시의 제겐 보였지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러운 한 문장도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할 길을 하늘의 별이 지도의 몫을 하는 시대는 복되도다.”
(루카치, 『소설의 이론』, 1916 서두)
하버드 옌칭 장학금으로 도쿄대학에 유학이랍시고 간 30대의 젊은 조교수인 제가 그 대학 정문 서점에서 이 책을 대하고 밤을 새워 읽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잠 안오는 밤이면 이 책을 펼쳐놓고 감회에 젖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무엇이 그토록 가슴 벅차게 했던 것일까. 회고컨대 그것은 <인류사>에 관련되었음이 아니었을까. 인류사의 진행과정의 한 단계인 근대(시민사회)에 대응되는 문학장르가 바로 소설(서사시)라는 것, 따라서 인류사의 근대가 지나면 소설도 당연히 소멸되어 다른 서사 양식으로 변한다는 것. 그러니까 과도기적 현상에 지니지 않는다는 것. 인류사, 이것만큼 매력적인 것이 달리 있었겠는가. 그런 공부라면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인류사와 더불어 진행되는 근대에 대응되는 것이 소설 장르라는 이 대목만큼 매력적인 유혹이 달리 있었을까. 인류사라니! 문학 연구가 그대로 인류사의 진행 방향에 대한 과제라니! 근대도 과도기적인, 지나가는 단계라면 그에 대응된 소설도 같은 운명이라는 것, 탈근대에 오면 소설이 살아남을 이치가 없다는 것. 우리의 근대 문학이란 것도 이 근대의 개념 속에 있다는 것, 민족주의와 계급주의가 십자포화 속에 놓인 것이 카프 문학이었다는 것, 그것이 이른바 보편·특수의 모순성으로 이루어진 역사(주의)였다는 것. 제가 쓴 첫 저술이며 학위 논문인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1973)는 자료 집성집이지만 이런 바탕 위에서 씌어진 것입니다.
3. <역사의 끝장>과 그 징후 읽기
헤겔주의에 기초를 둔 이러한 근대관이 얼마나 도식적이고 일방적이라는 것을, 공부가 모자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덤비던 세월 속에서 제가 크게 당황한 시기가 도래했는데, 구소련 붕괴(1989) 사건이 그것입니다. 역사란 자유의 자기 실현(전개)이라는 헤겔의 처지에서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다시 헤겔을 읽어보는 길밖에 제가 할 일은 거의 없었지요.
두루 아는 바와 같이 세계사의 중심점에서 벗어난 방관자적 처지(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된 뒤에야 나는 것이거니와)에 섰던 헤겔은 나폴레옹의 예나 공격에서 역사의 끝장을 보아버렸지 않았던가. 유럽 전체가 자유로 뒤덮혀졌으니까 더 전개될 정신은 없었던 것이지요.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바타이유 등을 길러낸 헤겔의 직계 A. 코제브는 어떠했던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그는 역사의 끝장을 보고 있었지요. 자유주의적 이념의 승리에서 세계사는 더 나아갈 데가 없었던 까닭. 그 손주격인 F. 후쿠야마는 구소련 해체에서 비로소 역사의 끝장을 보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역사의 끝장 이후의 인간은 어떤 인간형이어야 하는가.
이 물음이 중요한데, 따지고 보면 헤겔에서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욕망)은 위신을 위한 싸움(Prestigekampf)에 있다는 것. 이 욕망이 주인·노예 변증법의 핵, 그러니까 역사 전개의 힘의 원천을 이루는 것인데 역사의 끝장 이후의 인간이란 이것이 결여된 인간이라는 것. 그렇다면 그것은 다만 짐승스런 존재에 가까운 그 무엇이 아닐 것인가. 코제브는 물질적 삶을 즐기는 미국인을 염두에 두었고, 뒷날엔 스노비즘(형식주의)에 떨어진 일본인을 암시해 놓고 있었지요. 그렇다면 후쿠야마는 어떠했을까. 매우 신중하게도 그는 의문 부호를 달아놓더군요(최근 그는 최신 DNA 이론을 동원 『대붕괴 신질서』(1999, 국역)를 내놓았다). 그 이유로 핵무기를 갖추고 있음을 내세우고 있더군요. 요컨대 역사가 끝장난 것이라면 그 이후의 인간형은 어떠해야 하는가. 근대의 종언과 이는 얼마나 같고 또 다른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가 난무하는 시대성 속에서 지금껏 근대 문학에 매달려 문학의 근대적 성격에 골몰하던 저같은 사람은 어떻게 방향 설정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 절벽 앞에서 빛을 찾는 길은, 다름 아닌 제가 전공한 문학, 곧 근대 문학 속이었지요. 당초 하늘의 별이 내가 갈 수 있고 또 가야할 길의 지도몫을 했듯, 내가 전공한 근대 문학이 이번에도 지도 노릇을 해줄 수밖에. 다른 무슨 방도가 따로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번의 경우 그 근대 문학이란 과거 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이 나라 문학의 근대적 성격 해명(체계화된 해석)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서 바야흐로 씌어지고 있는, 이른바 당대(현대)의 문학 읽기가 그것.
이때부터 저는 문단에서 발표되는 중요 작품을 거의 모조리 읽는데 힘을 기울였지요. 제가 비평가로 데뷰한 이래(1962) 월평도 자주 쓰긴 했으나, 그것도 한갓 여기(학문 연구를 위한 보조 수단, 감수성 개발)였지만 이번엔 사정이 전혀 달랐습니다. 길찾기였던 만큼 필사적일 수 밖에요. 어째서 그러해야 했던가. 이 물음은 문학 작품, 그 속에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작품이란 무엇이겠는가. 작가가 쓰는 것이 작품이기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에 귀속되는 것 아닙니까. 저작권의 근거도 여기에서 나오지요. 동시에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초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대적 무의식의 반영이 그것이겠는데, 이는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집단 무의식이라 부를 제3의 영역이 아닐 수 없지요. 그동안 제가 읽어온 과거형, 이 나라 근대 문학은 그 시대적 무의식이 놓인 자리가 뚜렷했는데, <인간은 벌레가 아니다>의 명제로 요약되는 것이 그것. 인간의 위엄에 어울리는 문학, 그것이겠지요. 일제 강점기의 모든 저항 문학, 60·70년대의 분단 문학, 80년대의 노동문학, 다시 요약컨대 <민족 문학=민중 문학>이었던 것. <위신을 위한 싸움>을 전제로 한 주인·노예 변증법의 틀이 거기서 은밀히 작동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러한 과거형 문학에 대체되는, 현재형의 새로운 문학이란 어떠해야 할까. <인간은 벌레(메뚜기, 연어, 되새)다!>의 명제로 정리되는 그 무엇. 윤대녕의 [은어낚시 통신](1994)이 나왔을 때 직감적으로 제가 잡은 감각은 바로 위의 명제였지요. 역사의 끝장 이후의 문학이란, 그러니까 위신을 위한 싸움을 포기 혹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인간형으로 정의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생물학적 상상력이었지요. 물고기나 철새 모양 인간도 한갓 생물의 범주에 든다는 것. 그것도 모든 생물 그것처럼 신비로울 정도로 섬세하고, 난해하며, 또한 아득한 존재물이라는 것. 생물학적 상상력이 논리를 초월하는 대목은 연어의 모천 회귀를 신호로 태양 컴퍼스에 따른 철새의 이동 감각에서도 엿보였으며, 이 낯선 상상력이 신화적 상상력 속으로 넘나들고 있지 않겠는가. 이에 비할 때, 역사의 끝장 의식에 당황하는 이 나라 작가들의 고민에 가득찬 수많은 <후일담계> 문학도 이 신비스런 상상력 앞에서는 한동안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지요.
여기까지가 제가 읽은 현재의 문학 읽기의 첫번째 단계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어디쯤이었을까. 대붕괴와 잇단 혼란 속으로 또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 ‘과연 <인간의 벌레다!>일까’가 그것.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임엔 틀림없지만 또한 벌레가 아님도 사실이 아닌가. 이 물음과 더불어 던져진 것이 사이버 세계(가상 진실)의 지구 규모적 등장입니다. 이 사이버 세계의 전개가 그동안 제게 익숙해온 활자 세계에 던진 충격은 역사의 끝장 의식 그것에 맞먹는 그런 것이었지요. 이에 대처하는 방도 역시 제가 익숙해온 문학 거기에서 해답을 찾을 수밖에요. 현재형 작품 읽기를 조금이라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작품 속에 그에 대한 해답도 응당 들어 있으리라 확신하기 때문. 그동안의 과거형 활자 문학이란, 명제화한다면 <인간은 동물이다!>로 정리되고 있지 않았을까. 살아서 움직이며 이곳 저곳으로 공간적 시간적 이동의 분량 확보에 성공한 문학이었던 것이니까. 활자가 시공의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함이 이를 증거하지요. 사이버 공간의 등장은 무엇보다 시공의 제약에서 자유롭습니다. 이에 맞서기 위한 활자 문학이 <인간은 식물이다!>로 전환될 수밖에. 사이버 공간이 시·공을 초월한 무차별성으로 규정되고 군림하는 것이라면, 활자 문학이란 시·공간에 제약됨을 본질로 하는 것, 동시에 어쩌면 그로써 존재 근거를 삼았던 것. 이에 주목한다면 이 사정이 쉽사리 이해될 수 있겠지요. <인간은 식물이다!>의 명제로서 활자 문학의 영역을 직감한 순종 한국인으로 시인 김지하씨를 들어도 되겠지요. 씨가 6년여에 걸친 옥살이에서도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식물적 상상력에서였던 것. 바람에 날려온 민들레 씨앗이 녹슨 감옥 창가에 착근하여 싹을 틔우는 놀라운 장면을 씨는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기에 어떤 사변적 세계와도 구별되는 생물학적 확실성이 있었지요(『예감에 가득찬 숲그늘』).
그 민들레에서 황금빛 꽃이 필 수도 있을 것인가. 이 물음에 나름대로 모종의 해답을 보여준 시인으로 이번엔 김춘수씨를 들 수도 있지 않을까. 유아론(唯我論)에 빠져 허우적대던 전후 시단의 김수영, 김종삼, 김춘수 등이 4·19를 고비로 각각 유아론(난해시)에서 벗어나 저마다의 길을 톺아가지 않았던가. 의미의 시란 이름으로 김수영이 먼저 돌파해 나갔고, <내용없는 아름다움>을 향해 나간 쪽은 김종삼이었지요. 이 틈에 낀 김춘수가 이런저런 곡절을 겪으며 도달한 곳은 어디였을까. 꽃없이 번식하는 은화식물, 포자(胞子)로 번식하는 버섯류의 상상력이었던 것(『김춘수 전집(2) - 시론집』)
여기까지가 역사의 끝장 이래 제가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 헤맨 과정의 대강의 표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 모색에서 제가 취한 행위가 활자 문학의 방식 그대로의 속성에 따랐다는 점에 주목해 주십시오. <현장 비평>에 쉴새없이 매달렸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4. <징후 비평>의 어떤 표정
방향 모색의 행위란, 그것이 작품을 통해 이루어지는 방식이란 어떠해야 적절할까. 제가 징후 비평이라 이름붙이고, 이런 분야의 한 가지 스타일을 모색한 것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문학 고유의 방식에서 말미암았기에 지극히 문학적인 행위에 속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방식은 두가지였는 바, 그 하나는 작품 읽기와 그것에 대한 글쓰기가 그것. 작품을 읽기란 무엇인가. 작가의 의도 읽기와 시대적 집단적 무의식 읽기로 이를 정리할 수 있겠지요. 어디까지가 작가의 의도적 측면이며 또 아닌가. 어디까지가 집단적 무의식 영역인가를 판가름하기란 쉬울 턱이 없지요. 서로 섞여 있어 구별 불가능 영역일 경우가 대부분인 까닭. 이를 저는 <그것이 모종의 징후로 존재한다>고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 이 모종의 징후란 어떤 경우에도 명시적일 수가 없습니다. 징후적인 것의 포착이란 또다른 징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작품에서 스며나오는 모종의 징후를 또다른 징후로 포착하여 존속시켜 놓기가 그동안의 제 작업이었습니다. 쓰기를 통하지 않고는 절대로, 혹은 결코 포착되지 않는 징후인 까닭. 따라서 읽기만 하고 쓰지 않음이란 무효인 것. 이것이 제가 찾아낸 방식이자 방법이지요. 저만의 독창성이 있다면 바로 이 점에 있겠고 공적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겠지요. 사람들은 이를 두고 현장 비평이라 불렀지만 제 쪽에서 보면 <징후 비평>에 불과한 것입니다. 징후에서 징후에로 건너 뛰기, 실상 이것은 제가 문학에서 배운 기술일 뿐, 무슨 독창적 발견일 수 없지요. 원인을 잘 모르는 병자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고안해낸 가장 그럴법한 방식의 하나가 예술이라면, 그리고 문학도 그 중의 하나라 가정한다면, 이 문학쪽이 지닌 고유성에 제가 기댔다고 봄이 좀더 사실에 가까울 터입니다. 제가 포착한 징후들, 가령 생물학적 상상력도, 민들레 씨앗론 및 포자론도 단지 이 징후 비평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징후를 포착하는 방식이 그것. 사람들은 이를 글쓰기의 스타일이라 부르겠지만 제 처지에서 보면, 스타일이기에 앞선 그 무엇, 요컨대 징후 보존·유지를 위한 필사적 행위라고나 할까요.
제 징후 비평을 두고 사람들은 <흥, 멋대로군> 또는 <자유자재로군>이라고 하기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놀고 있군>이라고들 했습니다. 응당 그런 비난을 받을 만했음도 사실이었을 터. 그렇지만 제 처지에서 보면, 거듭 말하지만 필사적이었습니다. <습니다체>는 물론 주·객의 대화체, 비평가·문학사가의 대화체로 넘나들기도 했고, 논문식 문체와, 심지어 묘사체조차 넘나들기도 한 것은 오직 징후 읽기와 그 징후 표현을 위한 길찾기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니까.
잘 모르긴 합니다만, 헤겔에 맞서 헤겔의 동일성론을 격파하기에 온 힘을 쏟은 『부정 변증법』의 저자 아도르노 역시 이와 비슷한 국면에 한동안 서있지 않았을까.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씌어진다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그가 말했을 때 그때부터 그의 글쓰기는 적어도 종래의 철학적, 논리적 문체일 수 없었던 것. 『부정 변증법』 조차 한갓 수필식으로 묘사되었음은 이를 증거함이 아닐까. 논리로써 논리를 격파함이란 기껏해야 동일성 이론에 함몰되고 만다는 사실을 그는 간파하고 있지 않았을까.
<작가는 나의 스승>이라 공언하면서 징후 비평이란 것에 딴엔 제법 온 힘을 쏟은 모양인데, 그러다 어느새 20세기가 끝장나고 21세기에 서슴없이 접어든 오늘에 와서 그대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 무슨 그럴싸한 모종의 소식이라도 들려 왔던가. 이렇게 제게다 묻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가만히 그 사람의 손을 이끌고 제가 글쓰고 있는 현장을 보여 줄 수도 있습니다.
여기는 제 글쓰는 곳, 서재랄 것까지 할 수 없다 해도 보다시피 제법 종이책들이 가득 벽과 바닥에 널려 있습니다. 이를 두고 『존재와 무』(사르트르)의 사팔뜨기 철학자는 공동 묘지라 했지요. 그 서재 주인이란, 그러니까 묘지기에 더도덜도 아닌 존재. 시체들로 가득찬 공동 묘지에서 이 묘지기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죽은 자에게 자기 몸을 빌어주기에 다름 아닌 것. 자기의 뜨거운 피와 입김을 시체에다 접속시켰을 때, 미라 상태의 시체에 피와 생기가 돌고 드디어 그 입김이 살아남이란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얼마나 그로테스크한가. 얼마나 처절한가. 묘지기로서의 제 모습이 거기 있습니다. 시체에다 몸을 빌어주고 있는, 가사(假死) 상태에 빠진 기괴한 제 모습이 거기 있습니다.
묘지기를 조롱하며 스스로 묘지기임을 거부하고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존재와 무』의 저자가 취한 방식이란 무엇이었을까. 잘 모르긴 하나 글쓰기를 실탄이 장전된 총이라 보고, 이른바 앙가즈망 문학으로 치달은 것은 혹시 아니었을까. 그럴만한 능력도 용기도 없는 저같은 묘지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징후 모색과 그것의 보존을 위해 제 딴엔 온 힘을 쏟다보니 갈데없는 묘지기로 전락해버렸다는 것. 이 필연적 현실에 그대로 안주한다면 무엇보다 징후찾기 및 그 보존이라는 당초의 목표는 어찌 되는 것인가. 본말전도도 유분수라 하지 않겠는가. 당초의 그 목표를 위해서도 단연 시체지기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해야 묘지기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징후 찾기 및 그 보존에 함몰하다 빠져 버린 이 덫에서 제가 벗어날 길이란 혹시라도 있는 것일까. 제게 모종의 위기 의식이 감돌았다면 바로 이 부근이었습니다. <머나먼 울림>, <선연한 헛것>을 좇아 투르판으로 타크라마칸 사막으로, 바이칼호로, 카트만두로 라사로 헤맨 것도 그런 탈출구 찾기였던 것일까.
5. 연구자의 자리와 표현자의 사상
20세기가 저물어가는 마지막 해인 1999년 저는 한 권의, 제겐 제법 뜻깊은 책을 낸 바 있습니다. 『한국근대문학연구방법입문』(서울대학교출판부)이 그것. 제 전공이 <한국 근대문학>인 만큼 그것에 대한 연구방법 입문이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제 출발점인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이래의 총결산이라 할 만한 것입니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이 책의 머리말을 [현장성으로서의 방법]이라 하여 썼는데, 그 내용은 대강 이러합니다.
『발견으로서의 한국현대문학사』(서울대출판부, 1997)는 90년도 이래 제가 대학원에서 강의한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역사의 끝장>을 보아 버린 장면에서 재정립해야 하는 마당이기에 무엇보다 제 자신이 불안하고도 허황해진 느낌을 감추기 어려웠지요. 토대 환원주의(마르크스주의 방법론)를 비롯, 무수한 환원주의식 방법론이 세계 인식의 기초로 되어 있던 상황에 그 동안 익숙해졌던 제 자신의 굳은 체질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만큼 이 사실을 나름대로 드러낼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발견>이라는 말이 지닌 특별한 의미가 주어진 것은 이러한 사정에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발견>만 해 놓으면 그만인가 하는 강한 울림이 이번엔 제 내면에서 움트기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이 울림은 제가 감당하기엔 한층 아득한 것이었지요. 외부에서 주어진 것으로서의 <역사의 끝장> 의식을 대면하고 당황하긴 했지만 거기에는 나름대로 대응할 수 있었는데 <외부에는 외부의 것으로>의 방법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의 당황함은 이와 성격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내부의 목소리에 대응해야 함이란 실로 아득했는데, 왜냐하면 내부의 목소리란 그에 대응되는 외부가 없기 때문이지요. 문자를 쓰자면 <비대칭성>의 상황이었던 것. 내부란 그러니까 내부로 돌파할 수밖에 없는 것. 화두(話頭)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로써 말미암습니다.
90년도 이래 제가 그동안 감당해 온 이런 저런 <발견>이란, 다시 말해 <발견으로서의 한국현대문학사>란, 실상은 <방법으로서의 한국현대문학사>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방법>이란 내면에서 움트는 그 무엇이지요. 제가 인간 인간의 도식을 내세우기도 하고, 작품론 → 작가론 → 문학사 → 작품론 → 작가론 → 문학사의 원환 운동을 문제삼기도 했던 것은 방법의 모색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이 내면의 과제를 방법이라 했을 때 이번엔 이를 조금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화두 속의 과제로 처리해 버린다면 방법 자체가 무의미해지기에 기를 쓰고 여기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
연구자인 저로서는 이 대목이 절체절명의 경지라고나 할까요. 방법이 그냥 방법일 수 없고, 뭔가 토가 달린 방법이어야 했던 것이지요. 방법론이 아니라 그냥 방법이라 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곧 방법이란 <현장성>이자 <사건성>이었던 것. 굳이 이를 현장성 (1)·(2)·(3)으로 나눈 것은 내면에 함몰되기 직전에서 몸을 건져 올리기 위한 몸부림의 일종이었지요.
작품론/작가론/문학사에 각각 현장성을 대응시키는 일의 무의미함을 부추기는 것도 내면의 목소리였고, 거기서 탈출하라고 외치는 것도 내면의 목소리였던 것. 화두이되 화두일 수 없음, 이를 방법이라 부르겠습니다. 표현자의 화두와 연구자의 화두가 각각 다르면서도 불이(不二)라는 인식의 장(場)의 모색, 바로 여기에 제가 가까스로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아직 덜 익은 데가 눈에 띄긴 하나, 제 솔직한 심경만은 그대로 보입니다. 요컨대 연구자의 처지가 이를 수 있는 궁극적인 자리를 엿보고자 한 셈입니다. 다소 어수선하긴 하나, 이 책에서 제가 내세우고자 한 것은 다음 세 가지 범주에 대한 울타리치기와 동시에 묘지기에서의 탈출 의지의 표명 및 방법에 관해서였지요. 세 가지 범주란 무엇인가. 여기에는 조금 설명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제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니까요.
서두에서 잠시 말씀 드렸듯, 제 출발점은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였는 바, 이는 근대 문학에 대한 학문적 영역이지요. 학문(Wissenschaft, science)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이를 국문학에서 자의식의 일종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한국인이 도남(조윤제) 선생임은 모두가 아는 사실. 학문이란 근대적 학문이라 믿고, 한국 문학을 이로써 파악하고자 한 도남의 기본 입장은 <국민국가>의 이념이었던 것. <국어(국가어)>만이 자국 문학이라는 기본항에서 출발, 문학을 <정신과학>(오늘의 해석학)의 일종으로 설정함으로써 도남은 학문(과학)에 기초를 놓았지요. 막연한 방법 이전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신민족주의로서의 국문학의 근대적 학문화가 그 기틀을 세운 셈. 자본제 생산양식이라는, 근대의 또다른 측면인 계급 사상이 근대적 학문의 하나임도 모두가 아는 일. 카프 문학이 이에 해당되는 것. 그 어느 쪽이든 근대적 학문으로 성립되기 위한 기본항은 객관성이겠지요. 그것은 적어도 엄밀한 자료 검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이 쪽에 몸을 담고 노력이랍시고 해왔지요. 약간의 열매로 『염상섭 연구』(1987), 『이상문학 텍스트 연구』(1998) 등을 들 수 있을지 모릅니다.
두 번째 제 영역은, 앞에서도 말했듯, 역사의 끝장 이후의 과제에 관해서입니다. 징후 비평이 그것인데, 이는 묘지기의 신세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지요. 학문 역시 그러하긴 해도 징후 비평은 그 강도랄까, 순도(純度)가 극단적이었던 까닭입니다. 잘 설명할 수는 없으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고나 할까요. 이런 저를 어떤 문학자는 조롱이라도 하듯,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입을 빌어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생명의 황금 나무만이 녹색이다>(『파우스트』)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이에 한술 더 뜨듯, 『법철학 서설』의 저자 헤겔은 이렇게 설파해 놓지 않았던가. <회색에 회색을 거듭 칠해도 생명의 녹색은 되살아나지 않으며 단지 사변적으로 될 뿐>이라고.
이 늪에서 벗어나는 방도는 과연 없는 것일까. 묘지기에서 벗어나기, 미라에게 내몸을 빌어주기에서 벗어나, 내 피와 숨결, 몸냄새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나만의 것>의 영역 개척은 과연 불가능한가.
『한국근대문학 연구방법론 입문』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 찾기에 더도 덜도 아니었던 것.
<비평가>와 <문학사가>의 대담으로 일관된 이 책의 마지막장이 [화두로서의 표현자와 연구자]로 되어 있거니와 연구자의 몫과 비평가의 몫을 조목조목 따져가다 보면 학문으로서의 생명인 논리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징후 탐색 및 그 보존으로서의 징후(현장) 비평에서도, 그 징후에서 벗어난 잉여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이 두 잉여 부분의 발견이야말로 묘지기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길이 아닐 것인가. 제가 이를 두고 이름붙인 것이 바로 연구자와 나란히 선 <표현자>의 개념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연구 및 비평의 자립적 근거를 묻는 것이지요. <소멸의 장소> 찾기라고나 할까요. 이를 조금 그대로 따오면 안될까요. 기행문을 위장한 『머나먼 울림, 선연한 헛것』(2001)의 세계 꿈꾸기가 그것. 이 둘이 마주쳐 공명하기가 그것. <울림>과 <헛것>이 서로 스며들기가 그것. 이 <소멸의 장소>에 이르기가 그것. 이를 조금 옮겨다 놓고 싶습니다.
비평가
선생의 화두란, 표현자의 그것이자 연구자의 그것이 아닐 수 없지요. 생뜨 빗토와르 산기슭에 오두막을 짓고, 광주리 속의 사과를 들여다 보며 <사과가 되라!>고 무수히 외치며 캔버스 앞에 앉아 있던 초라한 화가 세잔느모양 네모진 책상 앞에 앉아 서울운동장보다 넓고 아득한 원고지를 향해 <표현자가 되자!>고 무수히 외치고 있는 선생의 목소리가 선연합니다.
문학사가
화두라? 그 쪽에서 제 내면의 목소리까지 듣고 있는 마당이기에 이젠 어떤 교묘한 변명도 별 소용이 없겠네요. 화두이기에 그러합니다. 홍인(弘忍)의 수제자 신수(神秀)와 육조 혜능(慧能) 사이에 벌어진 선문답에 어찌 이르겠습니까. 돈법(頓法)이냐 점법(漸法)이냐를 문제삼기에 어찌 이르겠습니까. 화두란, <점돈(漸頓)>을 함께 넘어서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저 같은 연구자에 있어 화두란 실상 따로 있습니다. [광장](1960)의 작가 최인훈의 『화두』(1994)가 그것이지요.
‘이 소설의 부분들은 대부분 사실에 근거하지만 그 부분들의 원래의 시간적·공간적 위치는 소설 속에서는 반드시 원형과 일치하지 않는다. 즉 이 소설은 소설이다.’([독자에게])
이렇게 선언한 대작 아닙니까. 10년 침묵 끝에 솟아오른 것. 어째서 제목을 <화두>라 했을까. 표현자로서의 최인훈의 현장성(1)·(2)·(3)이라는 뜻이 아닐 수 없지요. <갈 데까지 간 경지>를 두고 화두라 부르는 것. 그것은 점진적 깨침일 수도 있지만 한 순간의 도달점이기도 한 것. 신수와 혜능이 한 자리에 서는 경지라고나 할까.
비평가
…….
문학사가
먼저 최인훈식의 현장성 (3)을 잠시 엿볼까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70∼71) 연작을 쓴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는 대목.
‘박태원은 이 제목으로 한 편을 썼지만 나는 그 분위기가 그렇게 끝나기에는 아까운 형식으로 보였다. 그가 북쪽에서 이 제목을 다시 사용할 가능성은 없다고 나는 판단했다. 가령 사용해서 그의 손에서 제2, 제3의 [구보씨 ……] 속편이 나온다고 해도 남쪽의 우리 눈에 띄지는 못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해방 전의 그의 원전 [구보씨……]도 가까운 장래에 남쪽에서 햇빛을 볼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1970년 현재에서는 환상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70년 현재에서 볼 때 [구보씨……]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물론 수긍할 만한 미래 말이다) 우리 문학사에는 없는 존재라는 현실에서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에 [구보씨……]라는 이름으로 모작을 씀으로써 나는 우리 문학의 연속성의 단절에 항의하고 <민족의 연속성>을 지킨다는 역사의식을, 문학사의 문맥에서 실천하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구체적인 역사의식이었다.’(민음사판, 제2부, pp.50-51)
문학사의 시선, 그러니까 현장성 (3)의 장면입니다. 70년도 현재의 역사의식이 실로 구체성을 띠고 있지 않습니까.
비평가
그 역사의식이 오늘의 처지에서 보면 얼마나 초라한가. 차라리 환상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을 선생은 지적하고 있군요. <역사의 끝장> 이후의 세계에서는 박태원의 복권은 물론 무수한 박태원들과 그 논의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형편 아닙니까.
문학사가
현장성 (3)이 지닌 이러한 상대화야말로 작품이 지닌 <덧없음>이 아닐 것인가. 실상 위의 장면에서 작가 최인훈이 암시하고 싶은 것은 역사의식의 날카로움(구체성)보다는 그 덧없음에 있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정말 최인훈이 『화두』에서 문제삼은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것은 물을 것도 없이 현장성 (1)이지요. 다음 대목에서도 이 점이 확인됩니다.
‘해방전, H에서 살던 때 일이다. 어느 해 여름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친정에 가신 적이 있었다. 어머니의 친정은 작은 읍이었는데, 무슨 일로 두 사람은 거기서도 더 들어가야 하는 곳으로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다. 어머니와 나는 시골길을 걸어갔다. 날씨는 덥고 다리가 아팠다. 그렇다고 국민학교 3학년쯤이었던 나는 이미 업혀 가겠다고 할 나이는 아니었다. 한 쪽은 달래고 한 쪽은 투정을 부리면서 그러나 달리 어쩔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 나는 어머니 손을 뿌리치고 휭하니 앞질러 가 보기도 일부러 뒤처지기도 하면서 불만을 표시했다. 무어라 달래는 소리를 귓전으로 들어 가면서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나는 멈춰 섰다. 어느 사이엔지 어머니가 곁에 보이지 않았다. 하얗게 햇빛이 부신 한낮이었다. 나는 뒤처졌는가 싶어 시골길 풀이 우거진 모퉁이까지 달려갔다. 먼지가 하얀 흙길에는 눈 닿는 멀리까지 인적이 없었다.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지나온 길만 휑하니 멀리 그쪽에 보일 뿐이다. 아무도 없는 그 하얀 시골길. 나는 그 자리에서 허둥거렸다. 그 때 바로 옆 풀숲에서 어머니가 나오셨다. 나는 달려가 매달리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그러니까 투정부리지 말 것. 다시 그러면 이번에는 나를 놔두고 가 버리겠다면서 나를 달랬다. 우리는 남은 길을 그럭저럭 사이좋게 걸었다. 어머니가 없는 것을 알고 난 다음 그녀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의 사이, 그것이 아마 <영원>이라는 것이었던 듯싶다. 그런데 이 <영원>은 비어 있다. 나에게 나타난 영원의 형식은 비어 있음 이라는 모습이었다. 비어 있다고 해서 있던 것들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어머니가 사라진 것을 알고 달려가서 풀숲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길의 저 앞쪽에 있던 철교와 그 밑으로 빠져 나가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길이 지금도 따라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뒤돌아가서 보았을 때 저쪽 숲 모퉁이로 사라지는 길 위에 하얗던, 바랠 줄 모르는 햇빛이 눈에 부시다. 그런데도 그것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방금 곁에 있던 어머니가 사라지고도 남음 있는 온갖 것들은 그 이전의 것들이 아닌 낯선 것들이었다. 나 자신조차도 바로 전까지의 내가 아닌 누군가였다. <없다>는 느낌은 직전까지 있었던 것이 없다는 느낌이었던가 싶다. 지금 있는 뭇사물은 그 바로 전까지의 꼬리를 조금은 달고 있어야 자기가 지금 있다고 느끼지, 그 꼬리를 갑자기 잘라서 어딘가 숨겨 버리면 그 순간 자기를 잃어 버리는 모양이다. 자기가 없는 곳 - 그보다 더 <비어 있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화두』, 제1부, pp.282-283)
<길 잃음>으로 요약되는 장면. <지금/여기>의 참다운 의미가 드러나는 장면. 이를 두고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단절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한 순간 찾아오는 이 아득함. 홀연 세계의 낯섦 앞에 마주하기. [광장]을 지나고, [옛날 옛적에 훠이훠이]를 지나고, [달아 달아 밝은 달아]에까지 헤매고, 바야흐로 이순(耳順)에 이른 작가 최인훈은 여전히 <길 잃음>에 알몸을 통째로 드러내 놓고 있지 않겠는가. 이를 두고 표현자의 생명 의식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무슨 부름이 적절할까. 적어도 저에겐 현장성 (3)이 현장성 (1)에로 환원되는 사례로 『화두』가 빛나고 있습니다.
비평가
오늘은 여기서 멈추어야 되겠습니다. 숨이 막힐지도 모르겠으니까.
문학사가
고맙습니다.
어떻습니까. 한 대목을 따온 것이라 어수선하지만, 이 속에 제 화두가 깃들어 있습니다.
6.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문학했던 것
연구자에서도 비평가에서도 벗어나기, <시체 빌어주기>·<묘지기 신세>에서 벗어나기란 과연 가능한가. 어떻게 하면 표현자의 반열에 나아갈 수 있을까. 제 스스로 육체를 버리기가 그것일까. <머나먼 울림>과 <선연한 헛것>에서 소멸되기일까. 이것이 제 화두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화두가 그러하듯 그것이 <절대 모순성>임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절대 모순성을 그대로, 그러니까 통째로 받아들이기밖에 묘수는 없는 것일까. 이렇게 아직도 뻗대어 보며 몸부림이라도 쳐야 인간스러울까. 이 물음을 대하고 한밤중 홀로 앉아 있자니, 서재 한귀퉁이에서 무슨 기척이 들리지 않겠습니까. 시체들이 즐비한 곳에서 무슨 기척이 들리다니. 정신을 수습하여 귀를 기울이자니, 기척은 다름아닌 제가 쓴 책들에서 들려오지 않겠습니까. 자세히 보니 저들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지 않겠습니까.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말입니다. 제가 만든 피조물인 그들이 어느새 사물의 세계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 언젠가 죽을 운명을 타고난 저를 아주 불쌍한 듯이 바라보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 기묘한 체험이란 무엇인가. 망연자실하여 멍청히 있자니, 문득 다음 시 한수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해온 [한국 근대문학의 이해] 강의에서 종강 무렵이면 늘 학생들과 함께 읊던 그 싯구.
한때 그토록 휘황했던 빛이
영영 내 눈에서 사라졌을 지라도
들판의 빛남, 꽃의 영화로움의 한 때를
송두리째 되돌릴 수 없다해도
우리는 슬퍼 말지니라. 그 뒤에 남아 있는
힘을 찾을 수 있기에
(W. 워즈워스, [어린시절을 회상하고 영생불멸을 깨닫는 노래] 일절, 대의)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W. Wordsworth, Ode: Intimations of Immor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
감추어진 힘이란 무엇일까요. 제멋대로 해석해 봅니다. 연구자로, 비평가로 제가 매순간 최선을 다해 성실했다면 그것이 사라져 없어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남아서 힘이 되어 시방 저녁놀 빛, 몽매함에 놓인 제게 되돌아오고 있지 않겠는가. 제가 그토록 갈망하는 표현자의 세계에로 나아가게끔 힘이 되어 밀어주고 있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이르면 저는 말해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행이었다고. 문학을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예언자가 없더라도 이제는 고유한 죽음을 죽을 수 있을 것도 같다고.
관악산의 무궁한 발전과 여러분의 앞날에 평안이 깃드시길.
고맙습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0109050017128885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290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0109111927481#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10913/7737299/1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1/07/06/2001070670179.html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1/08/29/2001082970268.html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1810261533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