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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턍규 Aug 09. 2019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엔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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