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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턍규 Jun 26. 2024

리뷰 : 김훈, 『허송세월』

김훈 중의 김훈

주말 동안 김훈의 『허송세월』을 즐겁고 힘겹게 읽었다. 한 문단 혹은 한 문장을 읽어도 이건 김훈이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게 그 특유의 문체이지만, 허송세월은 김훈 중의 김훈이다. 가장 김훈다운 표현과 문장으로, 가장 김훈에 가까운 소재를, 가장 김훈처럼 건조하게 그려낸다.


“돈 들이지 말고 죽자, 건강보험 축내지 말고 죽자,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고 가자, 질척거리지 말고 가자, 지저분한 것들을 남기지 말고 가자, 빌려 온 것 있으면 다 갚고 가자, 남은 것 있으면 다 주고 가자, 입던 옷 깨끗이 빨아 입고 가자, 관과 수의는 중저가가 좋겠지, 가면서 사람 불러 모으지 말자, 빈소에서는 고스톱을 금한다고 미리 말해 두자…”


와 같은 흥미로운 죽음론부터 “조사 ‘에’를 읽는다”, “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과 같이 제대로 된(어려운) 문장론까지 김훈 중의 김훈이다. 가장 김훈다운 표현과 문장으로, 가장 김훈스러운 소재를, 가장 김훈답게 건조하게 그려낸다.부터,


통상의 산문은 신문이나 잡지 등에 기고한 글을 묶어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글은 산문만을 위해서 쓴 글로 보인다. 글의 길이나 깊이가 자유롭다. 사진도 있고 일기도 있고 절절한 반성도 있다. 


  “나는 인쇄된 나의 글을 읽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한 생애가 강물같이 흐름을 이루지 못하고, 파편으로 부스러져 있다. 삶을 구겨 버리는 그 무질서가 아무리 진지하고 순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려는 과장된 어조와 단정적 서술을, 이제 견디기 어렵다. 책값을 내고 이걸 사서 읽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이 자학적 수치심은 오래된 고질병인데, 증세는 악화 중이다. 사유의 바탕이 성립되지 않거나 골조가 허술하거나 전개가 무리하거나 애초부터 쓸 필요가 없는 것들을 매문(賣文) 하기도 했다. 그보다도 형용사나 부사 같은 허접한 것들이 문장 속에 끼어들어서 걸리적거리는 꼴들이 역겹고, 그런 허깨비에 의지해서 몽홍한 것들을 표현하려 했던 나 자신이 남사스럽다. 글 쓰는 자가 문장을 놓아먹이면 글이 웃자라서 허해지고 이 틈새로 형용사나 부사가 끼어들어서 그 허당을 차지한다. 써 나갈수록 이 허당은 더욱 헤벌어진다.”



삶의 구석구석을 생활의 시간과 공간을 김훈은 살고 생각하고 적어 낸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나는, 생활은 크구나, 라고 글자 여섯 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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