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유미 Mar 07. 2020

재미없는 사람이 되었다

재미없는 사람이 될까 봐 무서워한 적이 있다. 호기심을 유발하는 흥미로운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 함께 있으면 대화 주제가 한정적이어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요즘 어때?”라고 물어보면 “똑같아.” 혹은 “그냥 그래.”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는 ‘소재’가 전혀 없는 사람. 

쉽게 말하자면 인스타그램에 찍어서 올릴 만한 자랑 거리가 거의 없는 삶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신 있게 내보일 만한 소재가 하나도 없는 따분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노잼’이라는 딱지가 붙지 않도록 부지런히 발을 저어가며 노력하는 20대를 보냈다.


그래서 30대인 요즘은 어떤가요?

아침 8시에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서 책을 조금 읽다가 40분 정도 운동을 한다. 샤워를 한 뒤 머리를 말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가끔은 빨래를 돌린다. 파스타 샐러드로 가벼운 점심을 먹은 뒤 설거지를 하고, 커피 한 잔을 내린 뒤 일을 시작한다. 일터는 근처 카페, 혹은 방에 있는 책상이다. 2시부터 6시까지 소설을 쓴다. 잘 풀리는 날도 있지만, 대부분 가다가 서다가를 반복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래도 괜찮다. 내일은 다를 수도 있으니까. 6시면 업무시간이 끝나고, 그때부터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드라마를 보거나, 팟빵이나 오디오 클립에서 구독하는 프로그램을 틀어두고 저녁을 준비한다. 저녁에는 간단하게라도 요리를 하는 편이다. 오늘치의 할 일을 끝냈다는 해방감과 함께 손을 놀려 요리를 하고 밑반찬을 만들어 둔다. 청탁 원고를 마감해야 하는 시기에는 저녁을 먹은 뒤에도 글을 조금 더 쓸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는 대부분 드라마를 챙겨보다가 다시 책을 읽는다. 자기 전에는 침대 위에서 일기를 쓰거나, 또 오디오 클립을 틀어놓은 뒤 잠에 든다.


정말 별 것 없는, ‘노잼’인 하루다. 이 재미없는 하루가 매일같이 반복된다. 

가끔 친구와의 약속, 모임, 미팅이 아주 많아봐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끼어들 뿐이다. 노잼을 유잼으로 바꿔줄 만한 어떤 사건이나 사람도 없다. 글을 쓰거나, 쓰지 않거나. 한 문장으로 요약이 가능한 단순한 일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노잼인 일상이 시작된 후에야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루틴이 반복된다는 건 회사를 다니던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예전에는 “재미가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면, 지금은 재미없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하루하루 오늘의 할 일을 하는 데에 집중할 수 있는 걸 보면 적어도 불만은 없는 것 같다.


프리랜서 2년 차, 누군가에게는 듣기만 해도 지루해서 하품이 나올 것 같은 일상이겠지만 내 몸에 꼭 맞는 루틴을 오랜 실험을 통해 드디어 발명해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기상시간부터 식사시간, 취침시간까지 하루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내 기준에 맞춰 최적화하기까지 일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정해준 규칙을 따르는 대신 스스로 규칙을 만드는 연습을 하는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고, 커피 맛을 알게 됐다. 다이어트를 하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운동을 시작했고, 밥맛이 더 좋아졌다. 여행을 가는 대신 동네를 산책한다. 떠나는 삶 대신, 지금 이 곳에서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삶을 상상한다. 안전한 공동체 안에서 누가 더 노잼인지 떠들고 웃는다. 


얼마 전 누군가는 내 루틴을 듣고 ‘힙하다’는 말을 했다. 누군가에게는 재미없는 일상, 또 누군가에게는 힙한 일상이라니. 어느덧 나에게는 익숙해진 루틴이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사실은 힙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도 아니고,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닌, 그저 최소한의 체력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루틴일 뿐이지만. 

20대에 그토록 경계하던 재미없는 사람이 된 후에도 시대가 변하니 ‘힙하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세상은 요지경이고, 트렌드란 건 역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우리 일상을 보여주기 식으로 조립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마침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소위 힙한 삶을 살게 되었으니 기왕에 이렇게 된 거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재미없는 사람으로 남아 봐야겠다. 이토록 심플하고 재미없는 삶을 사는 것도 그럭저럭 괜찮은 일이니.




*커버사진: Muhammad Rifki Adiyanto 님의 사진, 출처: Pexel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