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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유미 Mar 14. 2025

인간은 왜 하루 세 끼를 꼭 먹어야 할까?

문학적인 식탁: 문학 속 식탁이 오늘의 식탁과 만날 때

문학작품 속 식탁이 21C 소설가의 식탁과 만난다면? 삼시 세끼 집밥을 추구하는 집밥주의자 소설가가 문학 속 식탁을 통해 오늘의 인생을 맛있게 요리해보려고 합니다.



밥에 살고 밥에 죽는 인간


  오이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복잡한 식당을 피해 아무도 없는 벤치에서 먹고 집에서 싸온 음료를 마실 때, 아이스크림 할인점에서 신중함을 발휘할 때, 재택근무를 하며 메일만 주고받던 동료와 오랜만에 만나 순대국밥 한 그릇 다 비우고 퇴근길 인파를 역행하며 지하철역까지 걸어갈 때, 선풍기가 돌아가는 베란다에서 고양이 엉덩이를 두드려줄 때 후회 없는 하루가 될 거라고 예감한다. 나물을 무치는데 눈대중으로 뿌려 넣은 양념의 비율이 기가 막히게 딱 맞을 땐 짜릿하다.


  “아, 살 것 같아!”


  순간 기가 막혀서 그만 코웃음이 ‘킁’ 하고 터져버렸다. 밥에 살고 밥에 죽는다니. 내 하찮은 욕구가 매일 존재를 연장시키고 있었다. 나란 인간은 고작 그런 사람인 것이다. 맛있는 밥 한 그릇이면 되는 사람. 죽느냐, 사느냐 하는 비장한 고뇌에 빠지기도 전에 ‘배가 고프니까 일단 뭐 좀 먹고 생각할까’ 하고 냉장고를 뒤지면서 재료 상태를 확인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요리를 하나둘 떠올린다. 그러는 동안 죽을 둥 살 둥 매달린 심각한 문제는 뒷전이고 어느덧 딱 한 가지 고민만 남게 된다.


  “그래서, 오늘은 뭐 먹지?”


"오늘도 잘 먹어보겠습니다!"



왜 인간은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하는 걸까


  아,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란 말인가. 존재 가치나 의미 같은 실체 없는 고민에 폼 나게 빠져들 새가 없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채로 몰두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몸에 밴 생활인의 자세가 의식하지 않아도 툭툭 튀어나와 생활의 시계를 앞으로 나아가게끔 떠민다.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엔 엉덩이가 너무 가볍다.


  만약 로댕 미술관에 턱을 괸 채 앉아 있는 조각상이 사람이었다면 배고픔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장운동이 원활하지 않아 안색이 흙빛인 근심 걱정 많은 아저씨였겠지. 이 식욕 없는 아저씨는 아마 어린 시절부터 무엇을 먹든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밥 때마다 호들갑 떠는 어른들을 의아한 눈빛으로 관조하는 예민한 소년이었을 것이다. 소년의 이름은 ‘요조’, <인간 실격>은 그의 인생을 돌아보는 수기 형식의 소설이다.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이 그저 짜증나는 협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그에게 식사 시간은 피할 수 없으니 감당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일 뿐이다.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어본 기억이 거의 없었던 소년 요조는 결국 식사 시간을 무서워하게 되고, 묵묵히 밥을 떠먹는 대가족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인간은 왜 하루에 세 끼니를 꼭 먹어야 하는 걸까.”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김춘미 옮김, 민음사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자살하기도 쉽지 않대요



  어린 시절부터 식욕이 바닥에 가까웠다는 사실은 그의 운명을 암시하는 강력한 복선처럼 보인다. 인간이라면 응당 느껴야 한다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해 당혹스러운 요조는 결국 스스로 ‘인간 되기’를 포기한다. 작중 요조가 처음으로 자살을 기도한 나이는 정확히 언급되어 있진 않지만 아마도 열일곱에서 열아홉 사이, 인간이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버틸 수 있는 기간이 7~10일이라고 하니 어쩌면 오래 버텼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식사 시간은 ‘내일’이니 ‘미래’니 하는 개념조차 모호한 목적지를 향해 발밑에 징검다리를 놓는 행위다. 먹는 행위는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행동 중에서도 인간이 자발적으로, 비교적 큰 품을 들이지 않고 하루 중에도 여러 번 시간을 맞춰서 시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한 시인은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하루에 세 번은 행복해서 자살하기도 쉽지 않다”고도 했다. 시집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여 홀린 듯 밑줄을 벅벅 그어두었다. 맞아, 그렇지. 나는 먹는 걸 좋아한다, 고로 살아간다. 대략 5~6시간에 한 번씩은 비록 고양이 털 한 움큼 수준의 미미한 행복이나마 느끼면서 기대감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수십 년째 살아남은 것이다. 문제는 결국 질문의 각도일까. 요조가 “왜 살아야 하는가”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사람이었다면 다른 결말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푸른빛이 감도는 그릇과도 같다. 푸른 색 그릇은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식욕을 떨어뜨린다. 조리가 막 끝난 군침이 도는 요리를 생기 없는 푸른 그릇에만 담아내는 요리사가 없듯, ‘왜’라는 질문을 집안에서나 직장에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질문은 군침이 돌지 않는다. 의욕을 떨어뜨린다. 몸을 가라앉히고 두통을 유발한다. 


 의미를 갈구하는 사람일수록 ‘이게 다 무슨 짓이지’ 싶어서 인생이라는 그릇을 내동댕이쳐서 깨트리고 싶어진다. 그 누구도 나와 당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매끈하게 제시하진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섹시하지 않고, 고루하게 다가온다. 정답이 지나치게 매끈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요조는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며 ‘실격’을 선언했으나 사실은 그 누구보다 인간의 생활을 갈구하던 사람이기도 하다. 여자와 술, 약에 의존하면서 그는 느끼고 싶어 했다. 살아 있다는 것의 즐거움을. 매일의 생활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행복을 의식하지 않는 시간조차 행복이라는 개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자기 확신을 기저에 두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게 바로 그가 그토록 이해할 수 없다던 인간다운 삶의 유일한 조건이지 않을까.



처음부터 합격인 인간은 없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요조의 내밀한 고백은 언제 읽어도 가슴에 눅진하게 들러붙는다. 스물 하나, 그리고 서른 즈음에도 이따금 수기의 첫 문장에 해당하는 이 부분 만큼은 자주 머리에 맴돌았다. 꼭 끼니를 거르고 싶은 날이거나, 끼니를 거른 날이면 유독 요조가 만나고 싶어졌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문득 오늘 먹은 게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음료와 프렌치토스트 한 조각이라는 걸 알아버린 날에도 요조 생각이 났다. 설탕 맛이 나는 캔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버티던 스물한 살에는 학교 도서관의 8번대 서가에 틀어박힌 세계문학 전집 코너에서 그를 만났다. 


 요조처럼 수치스러운 하루를 보낸 이들이 한둘은 아니었는지, <인간 실격>의 첫 장은 늘 손때 묻은 흔적이 역력했다. 언제 떨어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듯 해진 표지에 있는 일그러진 남자의 초상화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안녕, 자주 보네. 가끔은 책이 말을 거는 것 같았고, 이상하게도 세상의 규격에 맞추기 위해 애를 쓰다가 고통에 빠지고만 그 일그러진 얼굴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음, 배가 고픈데? 뭔가를 먹어야겠어. 



먹고사는 게 인생의 전부일 수 있다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알약 하나만 먹고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연히 뭘 먹어야겠다는 의욕도 없었다.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게 싫어서 김밥이나 떡볶이, 타코 셋 중에 하나를 돌려가면서 먹었다. 차라리 회식이 있으면 저녁을 해결하고 들어갈 수 있어서 좋다는 너스레를 선배들 앞에서 떨었다.


  “에? 정말? 그거 큰일인데? 사실 먹는 게 다인데 말이야.”


 먹는다는 그런 사소한 행위가, 단지 본능을 채우기 위한 행동에 불과한 일이 어떻게 인생의 본질이 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고작 먹는 것 하나로 채울 수 있는 게 삶이라면, 그게 다라면 의미가 있나? 너무나 쉽게 내 인생의 가치가 폄하되는 것 같다는 모욕감까지 느꼈다. 


 나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 중요한 행위마저 등한시한 채 애걸복걸 매달리고 있던 일에서 사실은 행복의 부스러기조차 주울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인정을 받기 위해 좋아하는 척 애써 매달리고 있을 뿐 애정이라고는 없는 눈으로 일과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생활 안에서 즐거움을 만드는 방법조차 몰라 권위를 가진 누군가에게 내 인생의 ‘합불’을 평가하는 권한을 위임한지 오래였다. 


 먹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잘 먹는 방법을 몰라서 ‘저는 이대로가 좋아요.’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저는 김밥 한 줄이면 돼요. 프라푸치노 한 잔이면 돼요. 배가 고프지 않네요. 계속 말을 하다 보니 진짜 그런 사람이 되어갔다. 밥을 먹느니 차라리 일을 하는 사람.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그런 말을 듣고 황급히 얼굴을 정돈해봐도 그때뿐이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누군가를 닮아가고 있었다. 잔뜩 비틀린 채 예민한 표정을 한, 인간의 생활에 닿으려 노력했으나 끝내 닿지 못한 그 누군가. 


 여전히 얼굴에 낀 그늘을 말끔히 지우는 방법을 몰라 자주 헤맨다. 다만 그늘이 깊게 팬 주름으로 남지 않도록 얼굴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만은 안다. 기분을 바꾸기 위해 일단 웃어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표정을 달리하는 데에는 먹는 것만큼 효과가 좋은 행동도 없다. ‘올해 목표’나 ‘인생 목표’라는 말이 너무 무거워서 자꾸만 표정이 일그러질 때면 눈앞에 있는 냉장고로 간다. 시장에서 사온 봄동을 손질하고, 입안을 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가벼운 맛을 내는 양념을 추가해 간을 본다. 아, 오늘은 합격이다, 합격이야. 점심에 무심하게 무친 나물 간이 딱 맞았다. 오늘의 운세는 안 봐도 될 것 같다. 무조건 되는 날이다.



인생 합격을 부르는 상큼 달콤한 봄동 무침


봄동의 여린 속잎을 모아 깨끗하게 씻어준다.

물기를 잘 털어낸 뒤 소금 한 꼬집, 참기름 한 스푼, 매실액 한 스푼을 넣고 버무린다.

마지막으로 먹기 직전에 빻은 참깨가루를 한 꼬집 뿌린 뒤에 맛있게 먹는다.

기세 좋게 완성한 오늘의 봄동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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