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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음식은 어디에

문학적인 식탁: 문학 속 식탁이 오늘의 식탁과 만날 때

by 황유미 Mar 26. 2025
문학작품 속 식탁이 21C 소설가의 식탁과 만난다면? 삼시 세끼 집밥을 추구하는 집밥주의자 소설가가 문학 속 식탁을 통해 오늘의 인생을 맛있게 요리해보려고 합니다.


고통은 외로워서 괴롭다


지난 밤 쥐가 나는 바람에 ‘억’ 하는 신음을 삼키면서 잠에서 깼다. 금방 사라질 고통이라는 걸 뻔히 다 아는데도, 쥐가 날 때마다 저릿저릿한 종아리를 붙잡고 벌벌 떤다. 세상에 오직 이 찌를듯한 고통과 나 뿐이라는 외로움에 휩싸인다. 자동차 유리에 달린 와이퍼처럼 호선을 그리듯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며 고통이란 이름의 블랙홀 속을 헤엄친다. 


똑똑, 저기, 누구 없나요? 거기, 듣고 계세요? 이곳의 반대쪽, 그러니까 고통 없는 세계에서 동아줄이라도 내려주면 이 사투가 끝날 것 같다. 그러나 불이 다 꺼진 새벽 2시, 방 안에는 오직 나 뿐이다. 끙차, 기합을 넣고 다리를 들어올린다. 이런 짓을 몇 번 반복하다보면 쥐가 도망가고, 얼룩이 다 닦인 자동차 앞유리처럼 순간 정신이 맑아지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아, 혼자라 다행이야.”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다고 외로워했건만, 고통이 씻겨 나가자마자 입장을 번복한 것이다. 만약 어젯밤, 내 곁에 누군가 누워있었다면 나는 한쪽 다리를 벽에 밀어붙여 올렸다 내렸다 하는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스스럼없이 하진 못했겠지. 단잠을 깨우고 싶지도 않았을 테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하는 상황도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아픔을 목격하는 것도 노동이지만, 목격자를 옆에 둔 채 고통을 전시하는 입장에 놓이는 것 또한 힘들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니? 저도 몰라요… 모른다고요…!


정말 끔찍한 일은 고통에 강탈당한 신체와 영혼을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오인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것. ‘환자’로서 적절한 처치를 받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다. 병마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할 틈을 주지 않고 별안간 찾아와 몸과 정신을 바꿔버리는데 말이다.


하룻밤 사이에 한 마리 흉측한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방문을 두드리며 계속 말을 거는 가족들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다. 딱딱해진 등은 무겁고, 하반신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침대를 벗어나는 것조차 힘들다. 급한대로 마구 움직이다 가구에 부딪혀 부상까지 입는다. 그 와중에도 “대체 무슨 일인지” 제발 말이라도 해보라며,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는 가족들을 향해 목소리를 쥐어짜낸다. 그러나 이미 ‘짐승의 소리’처럼 변해버린 그레고르의 목소리를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통제력을 잃은 몸, 소통 문제.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될 리는 없겠지만, ‘벌레’라는 이 몽상 같은 설정을 ‘병과 노화’로 치환하는 순간 <변신>의 장르는 소설이 아닌 르포로 바뀐다.


<변신>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열린책들<변신>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열린책들


그레고르는 점차 바뀐 몸에 적응해간다. 벽을 기고, 방을 가로질러 이동한다. 천장에 딱 붙어 매달릴 때마다 재미를 느낀다. 방식이 다를 뿐, 자력으로 이동이 가능한 상태라는 말이다. 허기도 느끼고, 음식 냄새에 구미가 당긴다. 입맛이 도는 음식이 있으면 군침 흘리며 잘 먹는다. 썩어빠진 야채나 먹다 남은 뼈다귀, 오래된 치즈를 걸신 들린 듯이 먹어치운다. 인간일 때는 눈길도 주지 않던 음식에만 반응하는 몸이지만, 역시 스스로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는 상태인 만큼, 생존에는 문제가 없는 상황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레고르가 ‘변신한 몸’에 맞춘 생활에 적응하는 동안 가족들 만큼은 그의 변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루에 두 번, 벌레가 되어버린 오빠의 식사를 챙겨주는 여동생은 끼니 때마다 남은 음식물을 확인하며 그의 변화를 가장 먼저 느끼지만, ‘슬픈 소식’을 부모님에게 전하지 않는다. 가족들에게 그레고르의 변신은 병세일 뿐이며, 방법을 찾아내 치료하고 ‘되돌려야’만 하는 비정상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흉측한 벌레를 얼마간 정성을 다해 돌보면서도, 혐오를 감추지 못하고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란다.


"어쩌다 이런 일이...!" 출처: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어쩌다 이런 일이...!" 출처: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


사실은 모두 ‘노인이 되어가는 중’


어느 겨울, 여느 때처럼 노인 생애사를 정리하는 일을 하기 위해 한 80대 남성 노인의 집을 방문한 날이었다.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호되게 꾸중을 듣고 말았다. 문제는 입버릇처럼 건넨 안부 인사 한 마디였다. “건강은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아 이웃들도 얼굴 보기가 힘들다고 할 정도로 사회적 교류가 없는 노인인 데다가, 워낙 어렵게 성사된 인터뷰라 건강 상태부터 파악하고 싶었다.


“허…! 괜찮냐고? 이보쇼, 우리 같은 사람들이 괜찮을리가 있나!”


불쾌함이 역력한 목소리로, 할아버지는 “질문이 잘못 됐다”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니라 ‘리셋’ 버튼은 없다는 걸, 그러니까 고통과 아픔을 통과한 몸이 병을 모르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걸 까맣게 잊을 때가 있다. 기능을 잃어가는 신체의 일부를 수선하고 덧대고, 약물을 통해 보충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노인을 대할 때마다 누구나 종국엔 병을 데리고 살아갈 거라는 사실이 피부에 닿는다. 우리 모두 하루 하루, 조금씩 ‘노인이 되어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대학병원 6인실 병동에 누워 바라보던 흰 천장이 생각난다.


환자복을 입고 대학병원의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지루한 검사 절차를 하나씩 마칠 때마다 물건처럼 ‘인계’된다는 기분을 느꼈다. 내 몸의 소유권은 입원을 한 그 순간 가운을 입고 명찰을 찬 채 병원을 활보하는 일군의 전문가 집단에게 넘어간다. 살면서 두 차례의 큰 외과 수술을 받을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타인과 공유할 수도 없고, 가시화할 수도 없는 애매한 증상들을 설명하고 납득을 시켜야만 한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가령 몸을 눕히고 일어날 때마다 꼬리뼈가 짓눌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고, 길을 걷거나 달리다가도 이따금 척추뼈 안쪽에서 날카로운 바늘 여러 개가 회오리 바람을 일으킨 것 같은 짧고 강렬한 고통이 나타날 때가 있었지만 어쨌건 나는 ‘수술 경과와 회복력이 좋은, 모범적인 사례’였다. 악취를 계속 맡아 후각이 무뎌지는 사람처럼, 신체를 멋대로 침범한 통증을 점차 받아들였다. 아픔의 정도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만한 의지도 바닥이 났을 때, 화장실까지 걸어가 용변을 해결할 수 있었다. 


혼자 화장실을 가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토막이 난 고등어가 된듯 무력하게 받아들이기만 하던 병원 생활에 활력이 생겼다. 시시콜콜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가끔은 통증을 딛고 웃었다. 혼자 화장실 가기, 혼자 옷 입기, 혼자 머리 감기, 혼자 걷기… 조금씩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면서 고통을 탈출할 수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 돌봄은 불가능한가


혼자 사는 노인들의 집에 방문할 때마다 유심히 관찰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현관에 이동 보조기가 있는지, 기저귀가 쌓여있는지, 이동식 좌변기가 침대 옆에 있는지… 자립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신호다. 꼭 노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남의 손’에 몸을 맡겨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지만 돌봄을 받는 쪽에서도, 주는 쪽에서도 앞질러 생각할 수는 없는 문제다. 내가 대학병원에 입원한 후에야 자립할 수 없는 생활의 무력감을 처음으로 느꼈듯이. 그저 막연히 우리 부모님도(나도) 언젠가는 늙겠지, 하는 사이에 별안간 가족 구성원의 돌봄을 떠안게 되거나, 돌봄의 당사자가 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수치심과 외롭게 싸운다. 


마침내 돌봄이 요양병원 ‘서비스’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면 수치심이니 존엄이니 하는 말랑하고 추상적인 언어는 끼어들 틈이 없다. 필요에 의한 처치가 앞선다. 머리를 다 감길 수 없으니 밀고, 기저귀를 채운다. 중증 알츠하이머 환자의 손발 움직임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했다는 우주복 형태의 의복 사례를 알게 된 날엔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음식은 갈아서 액체 형태로 만들어 ‘식사’를 대신한다. 밥과 밑반찬으로 구성된 번듯한 밥상을 소화할 능력이 없는 신체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소화가 잘 되는 맛있는 죽 한그릇을 받아드는 것과 ‘재료의 집합체’를 삼켜야 하는 상황은 다르다. 


하루하루 존엄을 잃어가는 환자와 신음하는 환자를 돌보는 사람, 누가 더 힘든가 하는 비교는 무의미하다. 둘 다 힘들지. 고통에 잠식되어 뒤틀리는 몸과 영혼을 있는 그대로 아끼고 사랑하며 보살피는 아름다운 돌봄 또한, 역시 초인적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도 돌보는 사람도, 돌봄을 받는 사람에게도 하나씩 하나씩, 생활에서 중요한 것들을 포기해가는 뺄셈의 방식이 아닌, 변해가는 몸과 정신에 알맞는 생활의 활력을 추가해나가는 덧셈의 돌봄이 정녕 불가능한 것인지 자꾸만 멈춰서서 묻게 된다. 


정말 주스도 죽도 아닌, 묽은 액체를 내밀며(혹은 받아들고) “잘 먹겠습니다.”라는 인사를 나눠야만 하는 날, 그런 날에도 이 삶을 끔찍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을지. 부디 아픈 몸으로도 맛있는 음식을 탐하는(권하는) 미래가 벌레가 된 가족을 구성원으로 품는 것만큼 비현실적인 상황은 아니기를 바라면서, 속 편한 수프 레시피가 떠오를 때마다 오늘도 부엌으로 간다.




소화와 맛,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양배추 감자 수프

양배추 1/2 통(사보이 양배추로 하면 더 달콤해서 맛있다!), 감자 3개를 준비한다. 

양배추를 프라이팬에 볶기 좋을 정도의 크기로 썰고, 감자는 다 익을 정도로 삶는다 

양배추를 프라이팬에 흐물흐물 해질 때까지 볶는다. 이때 소금을 1/2 숟가락 넣고 함께 볶는다.

익힌 양배추, 잘 익은 감자를 적당히 으깨서 믹서기에 넣는다

재료가 자박하게 잠길 정도로 물을 붓고, 국간장 2 스푼을(혹은 연두) 넣는다

믹서로 잘 갈아준 뒤에 냄비로 옮겨 보글보글 따뜻하게 끓여 맛있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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