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지워질 수 없다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고

by 황유미

왜 우리나라는 길거리에 장애인이 보이지 않을까?



대학생 때 한 학기 동안 독일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교환학생을 지원하면서 여권도 난생처음 만들었던 나로서는 독일에서 살았던 6개월간의 기억이 거의 하루하루가 문화충격의 연속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아직도 잊히지 않는 점은 ‘길거리에 장애인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공공장소나 대중교통에서 휠체어를 미는 장애인을 보는 일은 독일에서는 큰 개를 데리고 산책하러 다니는 사람을 보는 것만큼이나 흔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독일이 대한민국 대비 유난히 장애인의 비율이 높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길거리에 장애인이 보이지 않을까?’


거리를 걷다가 다짜고짜 ‘니하오’, 혹은 ‘칭챙총’등의 단어로 인종차별의 의도가 분명한 유치한 조롱을 하는 이들을 만나며 처음에는 당황과 분노, 불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독일어는 고사하고 영어로도 내가 당한 모욕에 능숙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맞받아칠 수 없었던 나 자신을 원망하며 ‘밖에 나가서 이렇게 힘들 바에야 그냥 집에나 있을걸’하는 생각을 했다. 거리에서 당한 차별과 배제의 경험이 스스로 나를 격리시키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거주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도 더 길어졌다. 물론 독일에서의 시간은 좋은 순간들이 더 많았지만, 결코 다채로운 경험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숙사 방 안에서 조용히 혼자 있었던 시간이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여러 나라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관계를 형성한 시간보다 절대적으로 더 많았기 때문이다.


방 안에 조용히 틀어박혀 있기로 내가 선택했다고 해서 이 선택이 온전히 자발적인 선택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장애인이 거리에 보이지 않았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생각하는 ‘다수의, 보통의, 정상의’ 특성과는 다른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노골적인 시선과 함께 어디든 이동을 할 때마다 도무지 막힘 없이 나아갈 수가 없는 ‘이동권에 대한 침해’까지 공공연하다. 이런 사회에서 장애인들에게 ‘그래도 의지로 장애를 극복하고 세상에 나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무책임한 집단이 모든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폭력적인 행위이다. 결국, 우리나라에서는 길거리에 장애인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가 ‘장애인을 사회에서 지우고 삭제하는 방향’으로 지금껏 노선을 선택해온 것이다.



존재하고 있으나 지워지는 것들



‘존재하고 있으나 지워지는 존재’는 비단 장애인뿐만이 아니다. 장애인에 국한된 이슈라고 생각하면 어딘가 지금 내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이 문제는 우리 사회가 ‘비정상’이라고 규정하는 모든 요소에 공통으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과체중 여성이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지나갈 때 노골적으로 던지는 혐오의 시선과 수군대는 말, 혹은 외모가 예쁘지 않거나 화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대놓고 ‘관리 좀 해야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지인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눈에 거슬리는 존재를 삭제해버리겠다는 다분히 폭력적인 의지가 느껴지는 표현이다.


‘너는 예쁘지 않아서, 너는 날씬하지 않아서 평균 미달이니까 평균이 되기 위해 노-오-력을 하렴’이라는 메시지를 당당하게 내뱉을 수 있는 사회는 결국 개개인이 의지로 해결할 수도 없고 선택한 적도 없는 특질-장애, 질병, 성적 지향 등-까지도 ‘개인이 알아서 교정해야 할 것들’로 만들어 버린다. 삶의 정상성에 대한 규정이 매우 엄격하며 ‘보통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집착이 거의 전 세대를 아우르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당장 외적으로 보통과 다른 부분이 있을 경우만 하더라도 나의 이상함에 대해 혼자 걱정을 끌어안고 끙끙거리거나 수치를 느끼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흉터에 스타일을 입히는 스웨그(Swag)



14살 때 ‘척추측만증’이라는 병명으로 꽤 큰 수술을 받아야만 했던 나는 몸에 목 바로 아래에서부터 허리 바로 위쪽까지 척추를 따라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칼자국이 있다. 이 자국은 오랜 시간 동안 내 몸에 존재하는 게 분명하지만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에 가까웠다. 등허리가 파인 옷은 입을 생각도 못 했고, 당연히 수영장에도 가질 않았다. 심지어 처음으로 성관계를 할 때에도 가장 먼저 걱정했던 게 이 흉터였고, 당시 남자친구의 충격(?)을 예방하기 위해 흉터에 대해 미리 사연을 설명하며 알리기까지 했다.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흉터 때문에 다른 이들이 받을 시각적인 충격을 염려한 게 얼마나 과한 걱정이었는지는 20대 중반에서야 용기 내서 수영장을 갔을 때 알 수 있었다.


수영복을 입기 전 샤워를 할 때 한 할머니가 다가와 등 뒤의 흉터에 대해 물어왔다. 귀찮은 마음에 ‘그냥 어릴 때 수술을 받았다’는 말만 성의 없이 툭 던졌는데 뜻밖에 할머니는 본인의 흉터를 보여주며 ‘나도 얼마 전 수술을 받아서 여기에 흉터가 있다’는 말을 했다. 그녀는 어떤 연민이나 동정, 혐오의 그림자가 없이 ‘너 그 시계 어디서 샀니? 나도 그거 차고 있는데’와 같은 느낌으로 ‘쇼미더머니’ 래퍼들이 ‘롤렉스를 샀다’는 가사를 읊는 것처럼 그저 담백하게 자신의 몸에 있는 흉터를 공유하는 ‘스웨그(Swag)’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나는 뜻밖에 동네 수영장에 딸려있는 목욕탕에서 한 할머니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비로소 내 흉터를 인정하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거라는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되었다.


이후 수영장 강습은 몇 달 동안 잘 다녔고, 이제는 가끔 대중목욕탕도 간다. 사실 아직도 등허리가 파인 옷은 꺼림칙해서 입고 돌아다니지는 못하지만, 이제는 흉터를 지우기 위한 ‘흉터 제거 수술’ 등의 단어를 검색해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 흉터를 없던 일로 지우기 위해 또 다른 수술을 받는 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고, 그냥 내 신체 중 일부로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오롯이 인정하고 그 존재 위에서 휠체어의 바퀴를 능숙하게 돌리는 기술 등 나만의 우아한 스타일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자신의 존엄을 온몸으로 지켜내고 있는 저자의 삶처럼 나 역시 앞으로 ‘존재하는 것을 지울 수는 없다’는 점은 잊지 않고 나와 타인을 대하고 싶다. 수술자국을 일부러 해명하려는 노력, 존재하는 자국을 없던 일로 만들기 위해 또 수술을 받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언젠가 이 흉터에 변화를 주고 싶은 날에는 목 밑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내려가는 레터링 타투로 나와 약 16년간 함께해온 이 존재에 스타일을 입혀 변화를 주는 쪽을 택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른다. 언젠가 온 마음을 울리는 문구와 만나게 되면 딱 그 자리에 새겨넣을 생각이니, 혹시 좋아하는 문장이 있으시다면 추천을 해주시길. :)

매거진의 이전글적정선에서 꿈틀대는 이야기를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