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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맘고생

2024년 4월 29일 월요일 - 77일 차

by typed thoughts

☀☁☂ 4월 말인 만큼 봄 옷을 꺼내고 싶었는데 겨울 옷을 입을 수밖에 없는 날씨였다. 그래도 패딩 대신 가벼운 재킷으로 기분을 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Connector(커넥터)라고 부르는 통근 버스를 제공한다. 스물두 개의 노선이 있고, 각 노선에는 세 개에서 여섯 개의 정류장이 있다. 차가 없고 운전도 잘 못하는 나에게는 필수 교통수단이다. 커넥터는 온라인으로 예약할 수 있다. 자리가 부족할 때는 미리 예약한 사람들을 우선으로 태운다. 내가 애용하는 노선은 큰 버스가 다니기 때문에 자리가 부족했던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나는 매일 저녁에 다음 날 출근 버스를 예약하고, 당일 오후에 퇴근 버스를 예약한다. 예약한 시간에 버스를 타지 않아도 아무런 페널티가 없지만, 정해진 시간이 없으면 한없이 늘어지는 나를 위해 만든 루틴이다.

출퇴근 피크 시간에는 통근 버스가 10분 간격으로 있다. 이때는 도로 정체도 심하기 때문인지 버스가 도착해야 하는 시간보다 늦게 올 때가 많다. 나는 여유 있게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는 걸 좋아하는데, 애매하게 일찍 도착하면 눈앞에서 이전 버스를 놓칠 때가 많다. 내 것도 아닌데 아쉽다. 내가 예약한 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이 남았는데도 ‘일찍 도착했네’하며 뿌듯해하는 대신 ‘아 쫌만 더 일찍 올 걸’하며 후회한다. 그러다 원래 타기로 한 버스가 늦게 오기까지 하면 화가 난다.

퇴근 시간에는 정류장에 커넥터들이 줄지어 서서 직원들을 태운다. 버스마다 전광판에 어떤 노선인지 표시되어 있어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사무실에서 퇴근 버스 타는 곳에 가려면 마지막에 길을 두 번 건너야 한다. 내가 타야 하는 버스는 정류장에서 나와 좌회전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첫 번째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면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제발 내 노선 버스만 보이지 않길, 하고 간절히 바란다. 신호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버스가 떠나가는 걸 지켜보기만 해야 할 때면 약이 바짝 오르기 때문이다.

오늘 일을 다 끝내고 커넥터 예약 사이트를 보니 4시 36분이나 46분 버스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36분 버스를 타려면 급하게 짐을 챙겨서 빨리 걸어야 했고, 46분 버스를 타면 퇴근이 10분 늦어지는 상황이었다.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여유롭게 가기로 했다. 4시 31분쯤 사무실에서 나와 천천히 걸었다. 꽃구경도 하고, 잔디밭에 앉아 있는 거위들이랑 눈도 마주치고, 도로 위에 있는 거위 똥에 난 신발 자국을 보며 똥 밟은 사람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첫 번째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4시 41분이니까 36분 버스는 이미 떠났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 정류장에서 나오는 커넥터들을 바라봤다. 첫 두 커넥터는 작은 벤이었다. 나랑 관련 없는 차다. 뒤에 서 있는 버스는 내가 타는 버스랑 같은 크기였지만 다른 동네로 가는 버스였다. 다들 좌회전을 하며 내 앞으로 지나갔고, 제일 끝에 있는 버스가 보였다. 전광판에 'Capitol Hill'이 보였다. 이런, 우리 동네다. 어차피 내가 두 번째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버스는 떠날 테니 마음을 비웠다. 하지만 웬일로 내가 길을 두 번이나 건널 동안 그 버스는 꿈쩍을 안 했다. 길을 건너는 10초 남짓한 시간 동안 엄청 고민했다. ‘버스 문을 두드리면서 아저씨에게 부탁을 해볼까?’ 하며 용기를 냈다가 ‘에이, 내 것도 아닌데 욕심내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쿨한 척하며 Capitol Hill 버스 옆을 지나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다음 버스, 그러니까 내가 타야 할 버스를 기다리며 ‘아 쫌만 더 일찍 올 걸. 아니면 차라리 더 늦게 올 걸’이라는 후회를 했다. 하지만 내가 절실했다면 방금 놓친 버스를 어떻게 해서라도 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버스 문을 두들겨서 아저씨한테 태워달라고 부탁하면 됐다. 물론 버스에 타서는 “오늘만 봐주는 거야. 다음부터는 이러면 안 돼”와 같은 기사 아저씨의 잔소리를 듣고 승객들의 눈치도 봐야겠지만. 나는 이 모든 걸 감당할 만큼 10분 더 일찍 퇴근하는 게 간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쉽게 포기한 건 나니까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내일은 아예 4시 46분 버스를 예약하고 조금 더 일찍 사무실에서 나와 4시 36분 버스를 운 좋게 탄 것처럼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기다리던 버스는 5분 늦게 도착했다. 그래도 내 버스니까 기분 좋게 집에 가기로 했다. 창 밖으로 좋아하는 풍경을 보고, 한 달 동안 들고만 다니던 책도 반이나 읽었다. 버스가 우리 집 앞 정류장에 도착했고, 기사 아저씨께 감사 인사를 하며 내렸다. 길을 건너려고 주변을 둘러보다 맞은편에 있는 다른 커넥터를 발견했다. 내가 포기했던 4시 36분 버스인 게 분명했다. ‘그럼 그렇지. 게임 끝날 때까지 모르는 거야’하며 우쭐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미련을 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뭐, 내 기분이 좋아졌으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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