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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yped thoughts May 15. 2024

자격지심, 이 몹쓸 것

2024년 5월 14일 화요일 - 92일 차

☀ 청바지에 니트 입기 딱 좋은 날씨다. 이런 날씨만 계속 됐으면 좋겠다.


 요즘 기분이 좀 별로다. 회사에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해서인 것 같다.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Project Manager 또는 Product Manager를 PM이라고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PM은 모두 Program Manager라고 불렀는데 2년 전에 PM이 Program Management와 Product Management로 세분화됐다. 각각의 역할을 더 명확하게 하고, 업계의 트렌드를 따르기 위함이라고 했다. 

 새로 생긴 Program Management는 Customer Experience PM, Content PM 등을 포함 일곱 가지로 나뉜다. 우리 팀에는 Product Manager(PdM)와 Technical Program Manager(TPM)가 있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고객이다. PdM은 유저를 위해 일한다면 TPM은 시스템과 관련된 일을 많이 한다. 기존 PM들은 상사와 상의 후에 PdM이 될 건지, TPM이 될 건지 결정했다. 실제 유저들과 소통하고 눈에 보이는 걸 만들어내는 게 더 좋은 나는 큰 고민 없이 PdM이 되었다.


 내가 속한 팀은 데이터를 이용해서 윈도우의 품질을 높이는 일을 한다. ‘윈도우 사용자가 시작 메뉴를 누르면 0.1초 안에 메뉴창을 띄우겠어’라는 목표를 세운 팀이 있다고 해보자. 이 시작 메뉴 팀은 우리 팀의 플랫폼에서 시작 메뉴를 눌렀을 때와 메뉴창이 온전히 떴을 때의 시간 차이를 계산해 달라고 한다. 우리는 이 요구에 맞게 데이터를 제공하고, 시작 메뉴 팀은 데이터를 분석해서 개선할 점을 찾는다.

 이런 팀이다 보니 사실상 TPM이 더 많이 필요하다. 나 같은 PdM이 할 만한 일이 많지 않다. 지난 2년 간 회사에 도움 되지 않는 직원들은 바로바로 잘리는 걸 봐왔기 때문에 불안했다. 특히나 지금 가지고 있는 비자로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아닌 다른 미국 회사에서는 일을 못한다. 미국에서 살아남으려면 좋든 싫은 쓸모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보안 쪽에서 PM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고민 없이 지원했다. 마이크로소프트 CEO까지 나서서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하니, 이 프로젝트를 맡으면 당분간 일자리 잃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회사 동료인 H는 “보안이 되게 테크니컬한데 네가 할 수 있는 게 있어?”라고 물었다. ‘와 씨, 지금 날 무시하는 건가?’ 싶어서 화가 났다. 동시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아서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더 억울하고 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쁜 의도가 있었던 아닌 것 같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못해서 힘들어하는 걸 제일 잘 알고 있는 친구니까. 내 능력은 보안보다는 다른 분야에서 더 잘 드러날 거라고 생각해서 물어본 게 아닐까 싶다. 괜히 찔려가지고는 욱했다.


 다른 팀으로 옮겨 보려고 이직서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여태 개발자로만 이력서를 썼지, PM으로 이력서를 쓰는 건 처음이었다. 개발자가 되기 위해 작성했던 이력서에는 내가 이것저것 만들었다고 자신 있게 쓸 수 있었다. 거기에 사용했던 프로그래밍 언어, API, 각종 툴 이름까지 더하면 그럴싸해 보였다. 하지만 PM은 개발자가 무언가를 만들도록 도와줬다, 발표했다, 이메일 썼다, 미팅을 이끌었다 등의 내용이 많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PM은 정말 팀에 어떤 가치가 있는 걸까.


 어젯밤에 보안 일을 같이 하는 개발자 C가 나 보고 간트 차트를 만들라고 했다. 아니, 지가 뭔데 나한테 일을 시켜? 내가 하는 게 없어 보여서 그러는 건가? 평소 같았으면 팀에 도움이 될 수 있어 감사하고 기뻤을 텐데 마음이 잔뜩 꼬여 있으니 모든 게 아니꼽게 보였다. 남자 친구랑 통화하면서 간트 차트를 만들어본 적 있느냐고 물어봤다. 누가 나한테 간트 차트 만들라고 했다고 툴툴댔다. 그랬더니 남자 친구는 신이 나서 간트 차트가 얼마나 유용하고 훌륭한지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내가 듣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었는데.


 오늘 오후에 C가 하는 발표에 참석하게 됐다. 누구보다 열심히 집중해서 듣고 피드백을 마구 쏟아냈다. 평소보다 훨씬 직설적으로, 신랄하게 말이 튀어나왔다. H도 C도 잘못한 건 없는데 심통이 잔뜩 났다. 자격지심, 이 몹쓸 것이 내 정신과 주둥이를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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