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CHOOL Day ① Session 3 - 강이룬 디자이너
나 역시 회사에서 디자이너의 포지션으로 일을 하면서 (내가 맡고 있는 소박한 디자인 업무를 생각해보면 강이룬님과 같은 "디자이너"라는 호칭이 붙는 게 살짝 부끄럽다..) 하루 종일 어도비의 노예로 시간을 보낸다. 오늘만 해도 포토샵을 몇 시간 동안 켜놓고 있었는지.. 나에게 일상의 공기처럼 스며든 어도비 프로그램을 인문학적 시각에서 바라본 강이룬님의 강의는 새로웠고 색다른 관점에서 디자인과 디자인 툴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배우는 것도 쉽지 않은데 더 나아가 직접 툴을 개발하는 그런 엄청난 추진력과 의지, 그리고 능력에 감탄 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다 이룬..님..
이룬님은 담당했던 프로젝트들을 설명하며 강의를 시작하셨다. 첫 번째는 2015년 타이포잔치의 웹사이트 제작이었다. 타이포잔치는 국제 비엔날레인만큼 웹사이트에서 한글과 영문을 같은 글줄에 섞어서 써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디자인에는 영어과 한글을 합성해주는 '합성 글꼴'이라는 기능이 있는데 웹에서는 이런 기능이 없었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분들과 Multilingual 이라는 Javascript 라이브러리를 만드셨다고 한다.
두 번째는 2014년 APAP, 안양 공공예술프로젝트였다. 전시의 프로그램 내용 및 도록을 실시간으로 인쇄 가능한 레이아웃으로 변경해주는 엔진을 만들어 도록을 On-demand로 출력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을 통해 약 500 페이지의 인쇄물을 제작했다고 한다. 그 후로 구글 폰트와 협업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오픈소스 폰트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서체 디자이너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도구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되셨다고 한다.
기계 문명을 인문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틀을 연구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던 이영준 교수님께 큰 영향을 받아, 이룬님은 디자이너들이 하루 종일 노트북으로 이용하는 프로그램이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는지 알아보려는 시도를 통해 그들이 만든 작품 혹은 디자인을 개인적, 사회적, 역사적 차원에서 좀 더 온전히 이해하게 되고 현 사회의 디자이너로서의 역할을 더 확실하게 이해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영준 선생님의 말을 인용하여 "디자인 도구를 인문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삶을 이해하는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인디자인은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있었던 공기 같은 존재이지만 이 프로그램들도 누군가에 의해 제작된 작품이다. 많이 알려져있다 싶이 포토샵을 처음 키면 만든 사람들의 이름이 영어로 쫙 나오는데 맨 앞에 매번 고정으로 나오는 사람 두 명, Thomas and John Knoll 형제가 1980년대에 만든 프로그램이다. 그들은 현재까지도 포토샵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인디자인의 경우, Aldus PageMaker라는 툴을 어도비가 인수하여 현재의 인디자인이 되었다. 시간이 된다면 나중에 각 프로그램의 역사를 책으로 읽어보고 싶다. 굉장히 생소했던 사실은, 이룬님이 회사에서 일을 하셨던 15-20년 전만 해도 디자이너들의 컴퓨터에 현재처럼 Adobe나 Microsoft 등의 대기업 프로그램 말고도 중소기업들의 프로그램도 많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의 디자인 툴들을 어도비가 인수했거나 경쟁 프로그램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또 하나 배운 사실은 현재 미국에서는 Microsoft Word, PPT, Excel 보다 Google Docs, Google Slides, Google Sheets를 쓰는 사람이 훨씬 많다고 한다. 아직 한국의 많은 회사들은 전자를 쓰고 있지만 편리성 때문에 우리도 곧 구글로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룬님은 최근에 포토샵에서 바뀐 선택 영역에서의 Shift 기능을 예로 들며, 많은 사람들이 (특히 나를 포함한 포토샵 디자이너들) 이해 할 수 없는 변화로 굉장히 헷갈려 하고있는데 도대체 왜! 이런 결정이 실행 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는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 디자인 도구 비평의 일부라고 했다. 여기서 굉장히 인상적인 일화(?)를 들었다. 한 유명한 개발자가 Window Vista에서 작업을 종료할 때 하단 윈도우 바에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9개나 있는데 (강제 종료, 잠금 등) 자기가 왜 이런 방법들 중 하나를 고민해야 하는지, 왜 이렇게 조잡(?)하게 UI를 만들었는지에 대해 공개적으로 질문을 남겼다. 당시 담당 팀에서 일했던 개발자가 적은 답변을 통해 소프트웨어의 기능에 관련한 의사 결정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엿볼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 UX 담당자, 엔지니어, 디자이너 등 다양한 팀에서 총 약 40명이 참여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중 독점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 혹은 모든 방면에서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 보니 모두에게 가장 "안전"하면서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팀이 피해를 보지 않는 결과, 즉 UX팀, 개발팀 등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각 팀의 노동이 결과에 드러나 사내에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런 결정에는 사용자에 대한 고려가 빠져있고 직업인, 회사의 구성원으로서의 고뇌가 들어있다. 이룬님 말마따나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매일 사용하고 있는 소프트웨어의 UI는 "전쟁터"다.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반영돼있고 동시에 그들의 생업이 걸려있는 그런 전쟁터인 것이다. 아래 컴퓨터 과학자 콘웨이의 말처럼, 혼란스러운 회사는 혼란스러운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밖에 없다.
시스템을 설계하는 조직은,
그 조직의 의사소통 구조를 본뜬 시스템을 만들어내게 되어 있다.
- Melvin E. Convway
또 굉장히 띵했던 부분은, 어도비에게 우리는 "잡아놓은 물고기" 같은 존재였다는 것이었다. 업데이트된 포토샵을 이용하다 보면 Creative Cloud Drive 이용 권유 메시지 혹은 새로운 문서를 오픈할 때 뜨는 다양한 템플렛 등 디자이너들이 별로 쓰지 않는, 필요로 하지 않는 기능들이 추가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어도비의 핵심 고객이 더 이상 디자인을 업으로 삼는 디자이너들이 아닌 것을 보여준다. 어도비는 이미 그들이 계속 어도비를 이용할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고 회사 차원에서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비디자이너들이 프로그램을 사용하도록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룬님은 어도비의 권력구조가 엔지니어에서 마케터로 이동했을 것이고 마케팅의 관점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정말 왜 포토샵의 툴바에 과하게 친절한 애니메이션 설명이 나오는지 이해가 갔다... 또 어도비뿐만 아니라 구글 등 거대 기업들의 UI 횡포에 대해서도 짧게 얘기하셨다.
그리고 현재 일하고 계시는 908A 연구소에 대해서도 설명하셨다. 어도비는 툴바에 애니메이션 영상을 띄우는 데에는 많은 관심이 있지만 디자이너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알고리즘을 개선하는 데는 딱히 관심이 없다고 말하며 이런 Painpoint를 해결하는 프로그램을 직접 제작해보고 있다고 하셨다. 프로그램에는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 도구, 논리 기반 문서 자동 생성, 출판물 디자인의 자동화, 상향식 콘텐츠 관리 도구 등의 정말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기능이 포함되어있을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 Bergson은 Creative Evolution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지적 능력은
인위적인 물건을 만들어내는 능력,
특히 도구를 위한 도구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구성을 무한히 변주하는 것
이라고 했다. 강의를 마무리하며 이룬님은 디지털 환경을 위한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라면 스스로 자기를 위한 디지털 도구를 만들 수 있을 때 보다 더 확실한 디자이너로서 자기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셨다. 음.. 현재의 나로선 정말 쉽지 않아 보이는 일이다. 갈 길이 구만리구나.. 또한 파슨스에는 이미 10년 전부터 커리큘럼의 핵심에 코딩과 디지털 타이포그래피가 있었다고 한다. 역시 파슨스. 마지막으로 이런 고민을 하는 디자이너들이 늘어나고 노력이 축적되면 "어도비가 내 삶을 힘들게 할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궁극적으로는 도구들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 같이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세상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현재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하기도 싫지만 (문송합니다) 지금은 초딩들이 코딩을 배우는 시대가 왔으니 먼 미래에는 프로그램을 이용하지 않고도 직접 디지털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올 것 같다. 이번 강의를 듣고 도비씨가 내 삶을 힘들게 할때 그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고, 언젠가는 그 없이도 씩씩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배우고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의 전환점이 돼준 너무나도 유익한 강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