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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C Jun 27. 2019

굿바이 크루얼 월드_06 EnD

단편소설집

*

나는 여정을 포기했다. 방금 전, 나는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너에게 편지를 보내기 위해 스무 개도 넘는 ID를 만들었고 -만들었다기보다는 사들였다는 게 옳다- 너에게 편지를 썼고 너는 매번 꼬박꼬박 수신했다. 하지만 어째서 너는 단 한 번도 내게 답장을 하지 않았을까. 문득 너도 나만큼 아프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잊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조금은 나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죽음이란, 유효기간이 지난 신용카드를 조각내 버리고 새 것에 서명하기 위해 볼펜을 집어 드는 바로 그 순간, 혹은 상태와 유사한 것이다. 나는 거의 모든 것을 폐기 처분하였다.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서명하는 것뿐이다.


막상 죽음에 직면했을 때의 세상에 대한 이 야릇한 배신감, 그리고 분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슬픔이란 어쩌면 죽음 그 이후의 문제일 것이다. 그것조차도 누군가 죽음을 기억해줄 만한 사람이 남아 있을 경우겠지만 말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죽음은 왠지 배신당하는 느낌이다.


아무런 흔적 없이 살다가 아무런 흔적 없이 떠날 수 있다면 이런 찌글찌글한 생각은 들지 않았을 텐데, 자꾸만 후회가 된다.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많은 것들이 다시 눈에 밟히고 귓가에 생생하고 새록새록 가슴 저리게 느껴진다.


웨이터 황영조가 너를 나에게 소개했을 때 나는 너를 무시했어야 옳았다. 너와 춤을 추지 말아야 했고, 네가 치통을 앓고 있을 때 그 섬에 가서 기차를 타자고 제의하지 말아야 했다. 그 여름의 기나긴 장마와 그리고 장마 이후의 며칠간이 내가 기억하는 소중한 추억이라고 말한다면 너는 어쩌면 끔찍해할지도 모른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한다. 공연히 나의 인생에, 나의 기억에 너를 끌어들인 건 잘못된 것이다.


너에게서는 승려 냄새가 났다. 네 영혼은 아주 미세한 느낌도 감지할 수 있는 아주 예민한 후각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빗속을 뚫고 섬에서 돌아오던 날, 나는 연어(連魚)를 생각했다. 육신이 갈기갈기 찢기고 영혼에 커다란 구멍이 나면서까지 우리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까닭을 나는 설명하고 싶었다. 상투적인 게 때로는 적절할 수 있다. 연어는 나와 너를 어느 정도 설명해주었다. 우리 앞에 끝없이 펼쳐지는 물살을 뚫고 헤쳐 나가면서 나는 차츰 의식이 투명해지는 것을 느꼈고 참으로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고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때는 구체적으로 떠올리지 못했지만 나는 절반쯤 죽음의 강에 몸을 담그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너는 나의 상태를 감지했다. 휴게소에서 커피잔을 잘근잘근 씹으며 나는 너와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었다. 그리고 너에 대한 많은 것을 알고 기억하고 싶다는 욕망이 문득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결국 나에게 남은 것은 너의 pinky라는 기호뿐이다. 기호로서 남은 너는 나의 이 사치스러운 마지막 여행을 지켜보고 있을 테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진정한 너는 아니다. 기호는 기호이고 너는 너다. 스무 개가 넘는 나의 기호가 전혀 내가 아니듯이 말이다. 그러니 세계는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유쾌하다. 아마도 이 무자비한 세계는 거대한 허구, 또는 가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제 기호에 얽매인 나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어떠한 기호도 나를 얽매지 못할 것이다.


나는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삭제할 뿐이다. 나의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조마조마하면서 의심의 눈초리로 모든 것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아야 하고 이면에 숨겨진 진실에 대해서 번민하지 않아도 되는 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나는 모든 기호들을 벗어버리려 한다.


어쩌면 너와 나는 다른 곳, 다른 시간에서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기호가 없이도 나는 너를 알아볼 수 있다. 너는 나의 냄새를 맡을 것이고 나는 너를 만나야지만 나의 향기를 발할 수 있을 테니까.


노트북의 배터리가 다 되어 간다. 이제 더 이상 충전시킬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남은 배터리의 힘으로 나는 모든 것을 삭제해야 한다. 시간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영화에서 본 대로 잘될지 모르겠다. 구스타프 말러의 5번 교향곡을 듣고 있다. 구레나룻이 멋진, 연애 걸고 싶은 잘 생긴 남자다.


삭제를 시작해야겠다. 너에게 보낸 모든 편지들, 그리고 보내지 않은 편지들까지. 피로가 몰려온다. 검은 바다에 이는 상아색 파도 거품이 인상적이다. 창문을 열고 바다 냄새를 맡아보고 싶다. 음악이 멀어지고 액정화면이 차츰 작아지는 느낌이 든다. 내가 자꾸만 뒷걸음질치고 있는 것 같다. 잊고 지내 온 많은 일들이 나와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내가 그것들로부터 삭제되고 있다....


*

너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난 뒤 나에게는 몇 가지 일이 생겼다. 통신망에 접속한 채 자동차 안에서 배기가스로 자살한 너에 대해서 신문이 지면을 자그마하게 할애하였다. 신기하게도 너의 나이와 이름, 그리고 주소까지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 참으로 촌스러운 이름이었다. 속상하게도 너는 나보다 두 살이나 많았다. 너에게는 별로 힘이 남아 있지 않았었는지 너의 노트북 속의 문서 파일들은 삭제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다. 내가 신문에 나오지도 않은 이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너는 조금 의아해할 것이다. 나는 어제 관리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보건 당국의 관리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법석을 떠는 데 질리고 말았다. 관리들은 자신들이 나를 관리(管理)하는 것을 허용하라고 강요했다. 보건소에 가서 채혈당하고 돌아왔는데 잡지사 두 군데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그중에 한 군데와 인터뷰를 약속했다. 기자의 목소리가 너와 닮아서 근사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서 당당하게 권리와 존엄성을 회복할 기회’라고 나를 설득했으나 쓸 데 없는 소리였다. 나는 지금 새로운 연인이 될지도 모를 그 기자를 만나기 위해 몸을 정갈히 하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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