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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C Jul 29. 2019

틈_02

단편소설집

그날 오후 네 시에 나는 음반 회사의 재고 창고에서 직원과 한 조를 이뤄 일을 시작했어요. 거기서 k와 q,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요. 그들의 음악, 당신과 헤어져 돌아오는 아침이면 나를 미치도록 지탱해주는 그 노래를 그 곰팡내 나는 창고에서 만나게 된 거예요. 아, 그러고 보니 신기해요. 결국 그들을 내게 보내준 사람은 당신이잖아요.


나와 한 조를 이룬 직원은 서른 살이 넘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빼빼 마른 데다가 아주 신경질적인 인상이었어요. 그 여자는 먼짓내가 퀘퀘하게 나는 창고에 들어서서 할 바를 찾지 못하고 지시만 기다리는 내게 한쪽 선반을 가리킨 뒤 담배를 피워 물었어요. 비가 그쳤지만 좁은 창 밖은 어두컴컴했어요. 나는 여자가 가리킨 선반으로 가서 CD가 가득 들어 있는 상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그건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어요. 두껍고 매운 먼지 때문에 나는 계속 재채기를 터뜨렸어요. 목록과 상자 내용물을 대조하고 그것들을 운반 수레에 옮겨 실어서 창고밖에 대기하고 있는 트럭에 싣는 게 내가 하는 일이었어요.


“힘 좀 쓰니?”


여직원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그렇게 말했었어요. 나는 그녀가 아무런 이유 없이 동성을 싫어하는 독신녀일 거라고 짐작했어요. 이런 여자는 아마도 평생 시집 같은 거 가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를 참아내기로 하니 뭐 그렇게 신경 쓰이는 일도 아니었어요.


힘든 건 재채기를 일으키는 먼지와 비굴할 정도의 배고픔이었어요. 아침부터 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어요. 두 시간쯤 일했을까요. 창 밖 하늘이 캄캄해지고 다시 요란한 빗소리가 들렸어요. 식은땀을 흘리고 먼지투성이가 된 나는 앵글 선반들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지요.


“학생, 오늘은 그만해. 그래도 제법인걸.”


병적인 표정으로 입을 꽁 다물고 반출되는 재고들을 일일이 체크하던 여직원이 말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보다는 어느 정도 누그러져 있었어요.


“쉬엄쉬엄 해도 돼. 시급이 아니고 일당이잖아?”


그녀는 또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어요. 매캐한 먼짓내에 뒤섞인 담배 냄새는 틉틉했어요.


“네, 일당이에요.”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묻는 그녀가 야속했어요. 그렇게 말함으로써 조금쯤 좁혀지려는 사이를 분명히 해두겠다는 의도가 느껴졌어요. 하긴, 그런 여자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으니까 상관은 없었지요. 다만 조롱당하는 거 같았던 거예요.


“이 창고는 언제나 이런 식이야. 팔리지 않는 판들이 꾸준히 들어오고 또 때가 되면 이런 식으로 실려나가는 거지. 그러니까 서두를 필요가 없어. 하기에 따라선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처음이라 힘들지만 요령이 생기면 수월하게 될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그녀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담배 연기를 훅 뿜어내고 짧은 커트 머리를 손으로 다듬었어요.


“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자, 이거. 시중에 나가지도 않고 묻혀버린 얘들인데 괜찮아. 실력은 있는데 고집불통이었나 봐. 좀 안됐어. 들어봐.”


여자는 기대 서 있던 선반에서 눈에 뜨이는 대로 CD 한 장을 엄지와 검지로 집어 들어 내밀었어요. 그녀의 짧고 툭툭 내뱉는 듯한 말투는 감정에 두터운 옷을 입힌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새카만 CD 표지에는 낮달처럼 핼쓱한 남자 두 사람이 각자 다른 곳을 응시하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어요. 붉은 타자체로 <버디1>, <3o'clock> 이라고 박혀 있었어요. 나는 얼결에 CD를 받아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았어요.


“마음에 안 들면 관두고. 원래 이런 거 가지고 나가면 안 되는 건데... 어때, 어차피 폐기 처분될 거 한 사람이라도 들어주면 좋은 거잖아.”


“그래요, 무슨 말인 줄 알아요. 하지만...”


무슨 말인 줄 알아? 하는 그녀의 다음 말을 나는 듣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대답했어요. 빗소리는 더욱 요란해졌고 창고의 어둠 속에서 푸르딩딩한 곰팡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 같았어요. 나는 온몸에 가려움증을 느껴 몸을 비틀었어요.


“하지만...?”


여자는 내 대꾸가 다소 의외라는 듯 찢겨 올라간 눈을 크게 뜨면서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었어요. 얄팍하고 빨간 입술에서 푸르스름한 연기가 뱀처럼 기어 나왔어요.


“전, CD플레이어가 없어요. 들을 수가 없는 걸요.”


나는 심한 굴욕감을 느끼면서 말했어요. 뱃속이 아렸고 몸이 심하게 떨렸어요. 어째서 이렇게 바보 같은 말만 하는 걸까, 하고 나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되었어요.


여직원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몇 초 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웃음을 터뜨렸어요. 그 웃음은 마치 습한 지하실에 들어섰을 때 한 구석에서 바글대던 바퀴벌레들이 우르르 흩어지는 소리처럼 들렸어요. 그녀가 자아내는 느낌은 전혀 밝은 부분이라고는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나에 대한 지독한 모멸을 담은 웃음이었죠. 나는 그녀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참으면서 입술을 깨물었어요. 그리고 심한 배고픔을 느꼈어요.


“저녁 같이 할래? 뭐 근사한 건 아니구 그냥 잘 가는 분식점에 가서 떡볶이라도 같이 먹자는 거야. 약속 있어?”


그녀는 문득 웃음을 멈추고 이맛살을 찌푸려 힘을 주면서 말했어요.


나는 차라리 그녀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고 싶었어요. 실컷 조롱당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가능하다면 아주 몹쓸 지경으로 망가졌으면 했어요. 왜 그토록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달았는지 나도 몰라요. 어쩌면 그날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일종의 운명의 전조 같은 거였겠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단서 같은 거 말이에요.


그래요. 난 차라리 이제부터 철저히 불행해지고 싶었어요. 그냥 아무렇게나 자신을 내팽개쳐 버리는 그런 심정이었죠. 우습죠? 그 여자는 단순히 떡볶이나 먹자고 말했을 뿐인데요.


세면장에서 온몸에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있자니 그 여자가 들어왔어요.


“자, 이건 카세트 테이프야. 찾느라고 애먹었다, 얘. 워크맨은 있겠지?”


여자는 집요한 구석이 있었어요. 굳이 상대가 원치도 않는 음악을 이렇게까지 권한다는 거, 뭐 그럴 정도로 대단한 음악이던가 아니면 필경 고약한 성격이던가 둘 중 하나였겠죠.


“고맙습니다. 잘 들을게요.”


나는 테이프를 받아서 얼른 가방에 집어넣었어요.


“가자!”


여자는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어요. 기어코 문제의 떡볶이를 먹겠단 거였죠. 갱의실에서 한 떼의 여사원들이 고운 화장과 화려한 옷차림으로 몰려나왔어요. 나는 그들의 화장기 짙은 얼굴과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 어딘가 어색한 걸음걸이 사이로 들리는 묘한 부스럭거림 따위에 신경을 곤두세웠어요.


그날 저녁 나는 그 여자의 집에서 잠을 잤어요. 술에 취했고 자취방까지 가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거예요. 혼자서 불 꺼진 텅 빈 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거죠. 아마, 그 여자도 그랬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한 달 동안 그 여자의 집에서 지냈어요. 나는 더 이상 창고 일도 나가지 않았죠. 집에서 하루 종일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었어요. 미국 대중 소설을 오후 늦게까지 읽다가 슈퍼마켓에 나가 저녁 장을 봐요.


“지겨워졌어. 갈 곳이 정말 없는 거야?”


다투거나 한 건 아니었어요.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뿐이에요.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내가 지은 저녁밥을 먹었어요. 그리고 저녁 뉴스를 보았죠. 나는 그동안 입고 지내던 그녀의 잠옷, 속옷, 그리고 액세서리들, 읽던 책가지들을 정리했어요. 그리고 그 집에 왔을 때와 똑같은 차림으로 그 집을 나왔어요.


“니가 싫은 건 아니지만 이젠 혼자 지내고 싶어졌어. 내 말 알지? 서운하게 생각하진 말아줘.”


그녀는 그렇게 말했어요. 차라리 다행이었어요. 언제든 연락해, 보고 싶을 거야, 그런 식으로 말했다면 나는 부엌칼로 그녀를 난도질했을 거예요. 실제로 돌아 나오면서 나는 내내 그런 상상에 사로잡혀 있었거든요.


한 달을 돌이켜보니 정말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그럭저럭 지낼만한 시간이었던 거 같아요. 편안하게 병원에서 요양을 마치고 나오는 기분이었어요. 나는 뭐 내가 레즈비언이 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먹여주고 재워주는 대신 그녀가 원하는 걸 주었을 뿐이니까요. 내가 가진 거라고는 내 몸뚱이뿐이었으니까. 이런 걸 몸을 팔았다고 말한다면, 그래요, 난 몸을 판 셈이죠. 대개의 경우는 손을, 그리고 두 번쯤인가 그녀가 너무 간절히 원해서 오랄을 했어요. 하지만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어요. 어쩌면 나는 무미건조한 꿈속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줄곧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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