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오디오에 꽂혀 있는 흰색 카세트테이프는 아무래도 그녀의 악의적인 장난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 내용을 알 수 없는 테이프를 우연히 듣게 된다. 거기에 그녀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다. 그럴 때 내가 당할 낭패를 노렸을 수도 있다. 대뜸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나는 불안에 익숙해져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지, 나는 그 테이프를 그날 저녁 퇴근하면서 발견하였다. 리크루트 쪽에 취업 전망 자료를 신청하고 업무를 마감한 뒤,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가볍게 사무실을 나왔다. 잠을 자지 못해 몸은 피곤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실감으로 소주를 반 병쯤 마신 것처럼 머릿속이 얼얼했다. 그녀에게서 전화나 호출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루 종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동료가 여자 전화라고 놀렸지만 그건 아내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저녁에 해물탕을 할 건데 어떻겠느냐 하는 쓸데없는 전화였지만 나는 짜증을 내지 않았다. 물 좋은 낙지 있으면 좀 넣으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뾰족한 여자가 꿈에 보였어요. 눈과 코와 귀가, 입술이며 얼굴 전체가 느낌과 말소리와 행동까지 뾰족한 여자였어요....
교정을 나서면서 테크에 비죽 나와 있는 테이프를 무의식적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나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정문의 수위가 무슨 일인가 하고 뛰어왔다. 나는 얼른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물론 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목소리는 분명히 카세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위에게 잠시 다른 생각을 했노라고 말하고 겸연쩍게 웃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뛰었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중얼대는 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오디오를 끄려고 몇 번인가 손이 갔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의무감 같은 감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호수 공원 산책로 옆에 차를 세우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열린 차창으로 활짝 핀 장미 향기가 코끝이 아리도록 흘러들었다. 지난밤, 안갯속을 헤매던 일이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졌다.
-우습죠? 당신과 알게 되기까지는 장황하게 말할 수 있는데, 그러고 나니까 그다음은 별로 기억나는 게 없어요. 아무것도 추억할 게 없는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앞으로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또 기억할만한 일이 생길까요... 글쎄, 아마 그런 건 없을 거 같아요....
나는 마침내 테이프를 빼냈다. 아무런 표지도 붙어 있지 않은 흰색 테이프를 잠시 만지작거렸지만 별다른 미련은 생기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그것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내가 그녀에게 해주었던 건, 역겨운 술내를 풍기는 입맞춤과, 냄새나는 여관방의 얼룩진 이불을 덮게 해준 것과, 수치스러운 아침의 햇살과, 최소한의 생활 원조와, 얼치기 기둥서방으로서의 훈계 따위가 전부였다. 고백컨데 나는 그녀를 농락했을 뿐이었다.
지난밤, 바다에 간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나는 스스로를 시험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용기 있는 편이 못된다.
한 사람을 만나고 또 결별을 한다는 건 삶의 홈 같은 게 깊이 파이는 것과 같다. 아무리 문지르고 닦아내도 절대 닳아지지 않는, 결코 메울 수도 없는 어떤 틈 같은 것 말이다. 아마도 나는 그 틈새 밑, 거대한 공동(空洞)에 회한과 고독이 차곡차곡 쌓이는 걸 지켜보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밤은 훌쩍 깊었다. 빗방울이 어깨에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보도에는 떨어진 장미꽃잎들이 혈흔처럼 거무죽죽하게 흩어져 있다. 핸드폰 벨이 울렸다. 벌써 세 번째였다. 아내일 것이다.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연료가 떨어져 가는 자동차로 안갯속을 헤맬 때보다 더 막연한 심정이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오래전부터 돌아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비를 맞으며 보도를 따라 걸었다. 스멀거리며 기어오른 호수의 물안개가 수초가 되어 발목에 휘감겼다. 막막한 느낌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전조등 불빛이 아득하게 보일 만큼 나는 차에서 훌쩍 멀어져 있었다. 뿌연 김이 서린 안경을 벗자 그 불빛마저 가물가물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