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기억의 안개

잊어버리는 것과 기억하는 것

by 타자


"그... 그 배우 있잖아, 그 영화에 나왔던..."



이름이 혀끝에서 맴돈다. 얼굴은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이름이 안 나온다. 분명히 아는 이름인데. 한참을 끙끙대다가 포기하면, 몇 시간 후 엉뚱한 순간에 불쑥 떠오른다.



열쇠를 어디 뒀는지 모른다. 방금 손에 들고 있었는데. 집 안을 두 바퀴 돌다가 냉장고 위에서 발견한다. 왜 거기 뒀을까?



이런 경험이 쌓이면 불안해진다. 치매의 전조일까? 정상적인 노화일까?



어떤 기억이 변하는가



기억은 단일한 것이 아니다. 여러 종류의 기억이 있고, 노화는 이들에게 다르게 영향을 미친다.



작업기억(working memory): 정보를 잠시 보유하면서 조작하는 능력. 전화번호를 들으면서 메모하거나, 암산을 하거나, 대화 중 상대방의 말을 기억하면서 대답을 구성하는 것. 이것은 노화와 함께 감소한다.



일화기억(episodic memory): 개인적 경험의 기억. "지난 토요일 저녁에 뭘 먹었지?" 같은 것. 이것도 노화와 함께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새로운 일화를 부호화하고 인출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의미기억(semantic memory): 일반적 지식, 단어의 의미, 사실들.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다" 같은 것. 이것은 노화에 비교적 잘 보존된다. 오히려 어휘력은 70대까지 증가할 수 있다.



절차기억(procedural memory): 자전거 타는 법, 피아노 치는 법 같은 "몸이 기억하는 것". 이것도 노화에 잘 보존된다.



처리 속도: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 이것은 20대부터 꾸준히 감소한다. 기억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속도의 문제로, 정보를 부호화하고 인출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혀끝 현상(tip-of-the-tongue)"은 정상적인 노화에서 흔하다. 기억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출 경로에 접근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결국 떠오르거나, 힌트를 주면 "아, 그거!" 하고 나온다.



정상 노화 vs 치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이것이 치매의 시작인가 하는 것이다. 구분이 중요하다.



정상적인 노화에서의 건망증:


가끔 이름이나 단어가 떠오르지 않지만, 나중에 기억난다


가끔 약속을 잊지만, 나중에 상기하면 기억한다


가끔 물건을 잘못 두지만, 단계를 되짚어보면 찾는다


판단력, 의사결정 능력은 유지된다


일상생활을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치매의 경고 신호:


최근 대화나 사건을 완전히 잊고, 상기시켜도 기억하지 못한다


익숙한 일을 수행하는 방법을 잊는다 (요리 순서, 카드 게임 규칙 등)


시간이나 장소에 대한 혼란이 있다


판단력에 문제가 생긴다 (이상한 재정 결정 등)


일상생활에 도움이 필요해진다



가끔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과, 가까운 가족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정상적 노화, 후자는 의료적 평가가 필요한 신호다.



청춘의 기억이 선명한 이유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50세 이상 성인에게 자유롭게 과거를 회상하게 하면, 특정 시기의 기억이 불균형적으로 많이 떠오른다. 10세에서 30세 사이, 특히 15세에서 25세 사이의 기억이다. 이것을 '회상 범프(reminiscence bump)'라고 한다.



왜 청춘의 기억이 이렇게 선명할까?



첫째, 이 시기에 새로운 경험이 집중된다. 첫 사랑, 첫 직장, 첫 여행, 독립. '처음'이 많은 시기다. 새롭고 감정적으로 강렬한 경험은 더 강하게 부호화된다.



둘째, 이 시기에 자아 정체성이 형성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만들어지는 시기다. 자기 서사(self-narrative)의 핵심 구성 요소가 되는 기억들이 이때 만들어진다.



셋째, 생물학적으로 이 시기에 뇌의 기억 시스템이 최고 효율로 작동한다. 부호화 능력이 정점에 있다.



회상 범프는 기억이 단순한 저장 장치가 아님을 보여준다. 기억은 정체성의 재료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구성하는 이야기의 조각들이다. 노화와 함께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능력은 약해지지만,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기억들은 보존된다.



편집의 관점에서



영화 편집자는 수백 시간의 촬영분을 두 시간으로 압축한다. 모든 장면이 최종본에 들어갈 수 없다. 중요한 것을 남기고, 덜 중요한 것을 뺀다. 이것이 좋은 편집이다.



뇌도 비슷한 일을 한다. 모든 경험을 똑같이 저장하지 않는다. 중요하고 의미 있고 감정적으로 강렬한 것은 깊이 부호화하고,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것은 생략한다. 이것은 결함이 아니라 효율적인 설계다.



나이가 들면서 이 '편집'이 더 엄격해진다. 새로운 것이 들어오는 양은 줄고, 오래된 핵심 기억은 남는다. 마치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불필요한 것이 정리되고 본질만 남는 것처럼.



잊음의 기능



우리는 보통 잊어버리는 것을 나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잊음에도 기능이 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ia)'이라 불리는 극히 드문 상태다. 이들은 수십 년 전 특정 날짜에 무엇을 했는지까지 기억한다. 그러나 이것이 축복만은 아니다. 부정적인 기억도 생생하게 남아서, 과거의 상처를 계속 재경험한다. 현재에 집중하기 어렵다.



잊음은 과거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상처를 희석시키고, 현재에 집중하게 해준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정리하여 중요한 것에 자원을 집중하게 해준다.



물론 원하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불편하다. 그러나 뇌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버린 것일 수 있다. 진짜 중요한 것—사랑하는 사람들, 의미 있었던 순간들, 배운 교훈들—은 대개 남는다.



기억과 정체성



결국 기억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구성한다. 과거의 경험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 그 기억들 중 핵심적인 것은 노화에도 보존된다.



신경과학자 조지프 르두(Joseph LeDoux)는 "자아는 시냅스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정체성은 뇌의 연결망에 담겨 있다. 그 연결망의 일부가 노화와 함께 약해지지만, 핵심 구조는 남는다.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아도, 열쇠를 어디 뒀는지 잊어버려도, '나'는 여전히 나다. 기억의 세부가 흐려져도 기억의 본질은 남는다. 뇌가 선택하여 남긴 기억들이 바로 당신의 정체성이다.



다음 화부터는 시선을 바꾸어, 노화가 가져다주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먼저 나이와 함께 성장하는 지혜, 결정성 지능에 대해 알아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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