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름도 곧 끝나겠지, 난 나무를 심었어.
오프닝, 일반적인 음악 영화가 그렇듯 뜨거운 공연장의 열기는 온데간데 없고, 흑백 필름으로 점철된 경직된 관중들의 모습만이 다소 이질적으로 등장한다.
흔한 록 음악의 이미지인 자유로움, 열기, 무모함은 흑백과 공산주의의 이념 아래 짓눌리고 가장 뜨거울 여름, 레토는 관객에겐 괴리감을 안긴 채 시작한다.
록이 반체제 음악으로 규제되었던1980년 대, 페레스트로이카 선언 이전 변화의 조짐 즉 젊음의 열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레닌그라드에서, 로큰롤을 추구하는 마이크와 빅토르는 음악적 교류를 나누고, 마이크의 아내 나타샤까지 더불어 셋은 다소 기묘한 정서적 교류를 나눈다.
레토는 주인공의 서사를 쫓아가는 전형적인 네러티브 플롯을 따라가는 듯 하다가도, 다소 이해하기 힘든 감정선과 환상으로 보이는 뮤직비디오 장면과 기법 등 ‘괴리감’과 ‘아이러니’을 과감하게 주제로서 가져간다. 언뜻 젊은 나이에 요절한 한국계 러시아인인 빅토르 최를 주인공으로 한 듯한 전기 영화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빅토르의 전성기를 전시하긴 커녕 빅토르의 첫 키노 데뷔를 밝히는 순간 끝나버린다.
누군가는 그렇다면 이 영화의 주제와 의미는 대체 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 또한 마이크가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주제도 없는 음악’을 추구하는 것으로 답할 수 있지 않을까? 구 소련의 록 음악이 수 많은 의미를 내포해야 했고 수 많은 마스터피스들이 무언가 의미 있는 주제의식으로 점철 되어야 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날것의 ‘레토’를 볼 가치는 충분하다. 어떤 영화는 주제와 목적의식을 떠나 다른 것들을 남기기도 한다.
‘Passengers’와 ‘Psycho Killer’의 뮤직비디오스러운 장면은 본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으로 손꼽히는 씬이다. 다소 부산스러운 스케치와 B급인 듯 아닌 듯 한 날것의 감성까지. 청춘 그 자체를 표현하는 듯한 장면의 끝자락엔 어김없이 귀여운 방해꾼이 나타난다. “이건 없었던 일임.” 이는 “꿈 깨.”라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감독은 어쩌자고 관객들을 이처럼 영화로부터 철저히 배제시켰을까?
물론 굳이 없었던 일이라고 강조하지 않아도 관객은 본 장면이 허상인 지에 대해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잔인하리만큼 구태여 극중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던’일임을 강조한다.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지만 어두운 체제와 사회 분위기 속 ‘일어날 수 없었던’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관객과 철저히 분리되는 게 아닌, 빛 바랜 그 시절의 여름 간절히 갈망했던 자유로움을 재현하여 영화를 통해 함께 꿈꾸고자 시도한다.
생기와 의욕은 넘치나 때때로 본의 아닌 헛발질을 하는 인물들을 보자면 <프란시스 하>도 떠올랐고, 삭막한 체제 속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큰롤을 외치는 이들을 보며 <고고70>도 떠올랐다. 이처럼 언뜻 비슷한 청춘을 얘기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영화들을 비교하는 재미도 존재했다.
닿을 수 없었던 삭막한 시기 속 찬란하고 빛났던 당시 구소련 젊은이들의 여름을 노래한 레토, 그래서 레토는 빅토르최만을 위한 헌정 영화가 아닌 그 시절 청춘들을 위해 바치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