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천재들의 투자 성적표

누가 최고의 헤지펀드 매니저가 되었을까?

by 투영인

헤지펀드 설립자들이 포브스 억만장자 명단을 장악하고, 최고의 트레이더들이 1억 달러의 연봉을 받으며, 심지어 인턴들조차 월 35,000달러를 제안받는 시대다. 헤지펀드가 경제 전반의 인재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불만이 왜 흔한 일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하지만 돈이 사회적 기여를 측정하는 중립적인 지표라는 세간의 평판을 믿는다면, 어쩌면 최고의 인재들은 실험실 가운을 벗어 던지고 헤지펀드 매니저들의 상징인 조끼(Gilets)로 갈아입은 채, 연구 노트 대신 스프레드시트를 펼쳐 들고 소위 '공익'을 위해 세상을 바꾸려던 시도를 멈춰야 할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과거의 천재들이라면 어떤 헤지펀드에 영입되었을지 궁금해졌다. 베토벤은 발리아스니(Balyasny)에, 모차르트는 밀레니엄(Millennium)에, 제임스 프레스콧 줄은 제인 스트리트(Jane Street)에 있었을까? 그리고 과학적 또는 예술적 천재성이 실제 투자 성공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


12월 말인 만큼, 분위기 위주의 가상 역사적 상상을 해보기에 적절한 시기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은 대상들의 상세한 거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정교한 학술 논문에 근거를 둘 것이다. 다행히 관련 논문은 풍부하다. 다만 '기혼 여성 재산법'이 1870년에야 통과되었기에 명단이 전적으로 남성으로만 구성된 점은 양해를 바란다. 이제 시작해 보자.


아이작 뉴턴 경 (Sir Isaac New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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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은 26세의 나이에 케임브리지 수학 교수가 되었으며, 『프린키피아(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를 통해 운동(motion)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고 미적분학을 정립했다. 기본적으로 수 세기 동안 유지된 과학적 합의를 마련한 인물이다. 따라서 오늘날 그가 최고의 퀀트 프랍 숍(Quant Prop Shop: 퀀트를 기반으로 한 자기매매 부서)들에 의해 학계에서 스카우트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이 트레이딩 실력으로 치환되었을까? 추측할 필요는 없다. 뉴턴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금융 광기 중 하나인 '남해회사 거품(South Sea Bubble)' 시대를 살며 투자했다. 미네소타 대학의 오들리즈코(Odlyzko) 교수의 치밀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처참한 성적을 거뒀는지 알 수 있다.


시작은 대단했다. 뉴턴은 거품의 초입인 1720년 초에 남해회사 주식을 매수했고, 당시 기준으로 약 1만 주를 보유했다. 이는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CPI가 아닌 GDP 기준) 약 3억 파운드에 해당하며, 여기에 추가로 19,000파운드의 국채(오늘날 약 5.7억 파운드)를 보유하고 있었다.

1-5.png?type=w773 1719년 3월 7일, South Sea Company의 총회계사 John Grigsby에게 전달된 지불 명령서로 '남해회사 거품'의 초기단계를 보여주는 사료


더욱이 뉴턴은 주가가 400파운드에 육박하던 1720년 4월과 5월에 남해회사 포지션의 대부분을 매도하며 현금화했다. 이는 100% 이상의 수익률이었다. 2만 파운드의 수익(현재 가치 6억 파운드)을 확정 지으면서, 그의 총 포트폴리오 가치는 약 4만 파운드(현재 가치 12억 파운드)를 상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기가 극에 달하면서 뉴턴은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던 '욜로(YOLO)' 본능에 이끌려 다시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는 1720년 중반 시장의 정점에서 현금과 국채를 털어 남해회사 주식을 다시 매수했다. 이 물리학자는 자신이 거품을 거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잘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뉴턴의 유명한 격언인 "나는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는 거품이 터진 후의 반성이 아니라, 만약 이 광기가 어디서 끝날 것 같냐는 질문에 대해 정점에서 내놓은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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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1년까지 그의 전체 포트폴리오는 남해회사 주식으로만 구성되었고, 총 가치는 약 2만 파운드로 급감했다. 오들리즈코의 수치에 따르면, 만약 뉴턴이 1719년 말에 모든 돈을 남해회사 주식에 묻어두고 가만히만 있었어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주가는 10배 폭등 후 폭락했지만, 1723년 8월 액면분할 조정 기준으로도 1719년 11월 가치보다 약 35% 높게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뉴턴의 자산은 그 기간 약 38% 하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은 엄청난 자산을 남기고 사망했다. 그의 유산은 약 3만 파운드로 평가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가치로 거의 억만장자에 달하는 수준이다.


따라서 XTX 마켓, G-리서치, 르네상스 테크놀로지, 투 시그마, 혹은 DE 쇼가 이 '오리지널 수학 천재'를 영입하기 위해 입찰 전쟁을 벌였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그의 엄청난 리스크 식욕을 고려하면 안두랑 캐피털(Andurand Capital)이 더 적합한 선택지였을지도 모른다.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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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은 파시즘으로부터 유럽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나, 돈과의 관계는 칭찬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무질서했다.


블레임 궁전(Blenheim Palace)에서 태어나 재무장관의 아들이자 말버러 공작의 손자로 자란 처칠은 고생을 모르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빚을 질 정도로 돈을 쓰는 데에도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결국 처칠은 저널리즘과 저술 활동을 통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의 투자 기록은 어땠을까? 1929년 5월 공직에서 물러날 당시 그는 5,250파운드의 미납 고지서에 시달리며 대규모 마이너스 통장을 쓰고 있었지만, 저술 활동을 통해 12,700파운드의 수입(대부분 말버러 공작 전기의 막대한 선급금)을 기대하고 있었다. 빚을 갚는 대신 처칠은 출판사에 선급 수표를 자신의 브로커에게 직접 보내라고 지시했고, 그 돈을 주식에 쏟아붓고는 북미 강연 여행을 떠났다.


금융 전문 자서전 가 데이비드 로(David Lough)에 따르면, 처칠은 미국의 돈 벌기 기회에 매료되어 투자 열풍에 사로잡혔다. 그는 소규모 탐사 회사, 유전, 가구, 소매, 가스 및 전기 회사의 지분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그는 마진 거래(Margin Trade, 미수 거래)를 시작했고, 4개월 만에 22,000파운드(현재 가치 1,380만 파운드)의 평가 이익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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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 요동치자 처칠의 매매 회전율(Trading turnover)은 거의 시타델(Citadel)급에 육박하기 시작했다. 10월 18일로 끝나는 9거래일 동안 그는 62만 달러 상당의 주식을 거래했다. (당시 환율로 조정하고 영국 GDP로 환산할 경우 현재 가치 약 7,800만 파운드에 해당한다.) 과연 이 전략이 통했을까?


결과는 "아니오"였다. 처칠은 영국으로 돌아와 아내를 직접 만날 때까지, 『말버러(Marlborough)』 전기의 첫 문장을 쓰기도 전에 선급금 전액을 날렸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


이듬해, 점차 예민해진 그는 로이즈 은행(Lloyds Bank)에 13,700파운드(현재 가치 870만 파운드)의 당좌대월(Overdraft, 마이너스 통장)을 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브로커 시니어 파트너는 그에게 제발 가치 없는 ‘도박성 주식(Gambling stocks)’을 그만 사라고 쓴 소리를 들을 지경에 이르렀다. 1930년 중반까지 그는 금융 시장에서 7,000파운드(현재 가치 450만 파운드)를 추가로 잃었다. 그는 결코 낸시/폴 펠로시(Nancy/Paul Pelosi) 같은 인물은 아니었다.


우리는 처칠의 혼란스러운 재정 상태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집필하여 이러한 세부 사항을 거의 모두 밝혀낸 데이비드 로(David Lough)와 연락을 취했다. 그는 FT에 다음과 같이 전했다.



"처칠은 성공적인 투자자가 될 만큼의 여유 자금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제한된 수의 미국 주식을 주로 증거금 거래(Margin, 미수 거래)를 통해 박스권 매매(Range trade)하는 방식에 의존했습니다. 며칠 만에 포지션을 진입하고 청산해야 했죠. 그는 파리에서 크로이던 공항으로 공수된 뒤 철도로 웨스터햄을 거쳐 그의 자택인 차트웰(Chartwell)까지 택시로 배달된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를 통해 정보를 얻었습니다. 비서들은 어떤 종목을 확인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이를 종이에 적어두면 그의 발렛(Valet, 집사)이 은색 쟁반에 받쳐 회의실로 들고 가곤 했습니다."


처칠은 평생 수차례 재정적 구조를 받아야 했으며, 그중 두 번은 파이낸셜 타임즈(FT)의 브렌던 브라켄(Brendan Bracken)에 의해 주도되었다. 따라서 처칠을 정계나 언론계에서 빼내 갈 만한 헤지펀드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다만, 어쩌면 — 아주 만약에라도 — 처칠이라면 특유의 매력으로 빌 황(Bill Hwang)을 설득해 시드 머니(Seed money)를 받아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찰스 다윈 (Charles Dar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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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경 다윈은 당대 최고의 자연주의자이자 생물학자, 지질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생명 과학의 통합 이론을 정립한 진화생물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이 위대한 인물이 과연 주식과 채권 트레이딩에도 능했을까?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일부 회원들에게 발송된 설문 조사에서 자신의 성공에 기여한 지적 특질을 나열해달라는 요청에 대해, 다윈은 자신에게 특별한 재능이 없다고 답했다. 다만 그는 "장부 기록, 서신 응답, 그리고 자금의 매우 훌륭한 투자 능력으로 입증된 사업적 수완 외에는 (재능이) 없다"고 덧붙였다.


자넷 브라운(Janet Browne) 교수는 관련 수치들을 정밀 분석한 결과, 다윈이 매우 신중하고 성공적인 투자자였음을 밝혀냈다. 그는 슈롭셔(Shropshire) 지역 부동산에 대한 모기지(Mortgage) 채권을 발행하고, 1860년대까지 철도, 운하, 독(Dock) 건설 프로젝트의 상승장(Wave)을 향유했다. 이후 그는 1873년의 대규모 시장 붕괴가 발생하기 전인 1860년대 중반, 현명하게도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영구채(Consols)로 전량 교체(Flipping)했다.


그의 회계 장부에 따르면, 그는 1839년 결혼 생활을 시작할 당시 부친으로부터 받은 10,000파운드의 결혼 채권(Marriage bond)과 은행 잔고 573파운드, 그리고 현금 36파운드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오늘날 가치로 약 5,500만 파운드(한화 약 930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브라운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결혼 채권은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은 아니었으나 보유자 생전에는 소득(Income)을 제공하고 사망 시 자녀에게 상속되도록 설계된 자산이었다. 1881년까지 다윈은 저서 인지 수입을 제외하고도 자신의 자본을 282,000파운드(현재 가치 약 6억 5,200만 파운드, 한화 약 1.1조 원)까지 증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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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에 걸쳐 연평균 8.6%의 실질 자본 성장률(Annualised real growth)을 달성한 것은 매우 인상적인 수치다. 다만, 두 차례의 거액의 유산 상속이 그의 자본 증식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는 명확히 가늠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다윈을 워런 버핏(Buffett) 수준의 투자 혜안을 가진 인물로 공인하기에는 아직 조심스럽다. 하지만 철도주(Railroad stocks)에서 빠져나와 국채(Gilts)로 갈아탄 그의 '빅 트레이드'는 경이로운 수익을 창출하기에 충분했으며, 이는 조지 소로스(Soros)나 브레반 하워드(Brevan Howard) 같은 헤지펀드들이 추구하는 성공적인 매크로 펀팅(Macro punting, 거시경제 흐름에 베팅하는 전략) 지능의 전형을 보여준다.



J.M.W. 터너 (J.M.W. Tu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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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터너는 유화와 수채화로 유명하지만, 그는 남는 시간에 확정 금리 차익거래(Fixed income arbitrage)를 즐겼다.


영국 은행 기록에 따르면 터너는 19세에 첫 국채를 매입했다. 19세기 당시 내로라하는 인물들은 모두 국채 시장을 주시했다. 그러나 오들리즈코에 따르면 터너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200%에 육박했다. 런던은 재앙적인 부채 위기를 예측하는 수다로 가득 찼다. 당시 부채는 대부분 영구채(Consols) 형태였다. 이에 부채를 줄이기 위해 의회는 '기한부 연금(Terminable Annuities, TA)'이라는 30년 만기 현금 흐름 상품을 만들어 기존 채권자들이 전환하도록 유도했다.


당시 거의 모든 정부 부채가 영구채(Perpetuals) 형태였던 반면, 전체 부채의 3%는 이른바 '장기 연금(Long Annuities, 이하 LA)' 형태였다. 이는 30년 만기의 비영구적 부채로, 액면가는 새로 발행된 '기한부 연금(Terminable Annuities, 이하 TA)'보다 약 50bp(0.5%) 더 높았다.


당시 언론들은 TA와 LA를 동일한 상품으로 묘사했으나, 소수의 '채권 괴짜(Bond geeks)'들은 LA를 액면가 이하(Below par)로 매수한 뒤 이를 거래소에 인도(Deliver)하면 자본 대비 340bp(3.4%)의 즉각적인 차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계산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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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들리즈코(Odlyzko)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은 완전히 무위험 거래(Risk-free exchange)였습니다. 영국 정부로부터 지급받는 거의 동일한 두 개의 현금 흐름을 맞바꾸는 것이었죠. 수수료도 없었습니다. 투자자가 할 일이라곤 올드 쥬리 스트리트(Old Jewry Street)에 있는 국가부채 감축위원회(Commissioners for the Reduction of the National Debt) 사무소에 가서 서류에 서명한 뒤, 두 블록을 걸어 영국 은행(Bank of England)으로 이동해 LA를 정부에 양도하고 다시 돌아와 절차를 마무리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런 차익거래(Arb)는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1829년 당시 이 기회가 자금의 유입으로 인해 완전히 닫히는 데(Close down) 무려 6주일이 걸렸다. 전체 LA 물량의 10분의 1 미만이 이 교환에 투입되었으나, 터너는 그 와중에 약 10,000파운드를 밀어 넣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6,600만 파운드(한화 약 1,120억 원) 규모의 확정 금리 차익거래를 수행한 것이다.


좋다, 그에게 트레이딩 감각이 있다는 것은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그의 인품은 어떠했을까? 당대 화가였던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은 터너에 대해 "그는 무례하지만 놀라운 사고의 범위를 가지고 있다"는 유명한 평을 남겼다. 또한 경(卿) 월터 스코트(Sir Walter Scott)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터너의 손바닥은 그의 손가락만큼이나 영리하고 가려워서(돈을 밝혀서), 내 말을 믿게나, 그는 현금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며 현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걸세. 그는 내가 아는 천재들 중 이런 (금전적인) 문제에 있어 이토록 탐욕스러운(Sordid)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네."



이 정도면 제인 스트리트(Jane Street)가 영입하기에 충분한 인재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John Maynard Key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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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이자 지정학 전략가, 경제 고문이며 거시경제학의 아버지인 케인스는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었다. 더욱이 우리는 그의 진정한 천직이 고빈도 매매(HFT)였는지, 매크로 펀팅(Macro-punting)이었는지, 고정금리 차익거래(Fixed income arb) 혹은 롱숏 에쿼티(Long-short equities)였는지 추측할 필요가 없다.


1922년부터 그가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의 기금을 운용해왔고, 그 기록을 수많은 학자가 꼼꼼히 분석했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 데이비드 스웬슨은 각자 케인스를 롤모델로 꼽으며, 전기 작가들은 이에 대해 풍부한 묘사를 제공한다. 하지만 실제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한 것은 데이비드 챔버스(David Chambers), 엘로이 딤슨(Elroy Dimson), 저스틴 푸(Justin Foo)였다.


케인스는 전적으로 채권에만 투자되어 있던 포트폴리오를 인계받아, 이를 거의 전부 주식으로 교체하는 파격적인(Heretical) 행보를 보였다. 당시 주식은 전통적으로 개인 투자자들의 영역으로 치부되던 자산군이었다. 그 결과, 그의 포트폴리오는 25년 동안 연평균 15% 이상의 투자 수익률을 기록했다.


이는 단순한 '베타 서핑(Beta surfing, 시장 상승세에 올라타기)'이 아니었다. 케인스는 영국 주식 시장 대비 연간 521bp(5.21%)의 초과 수익(Outperformance)을 달성했으며, 운용 기간 중 벤치마크 대비 성과가 저조했던 해는 단 6년에 불과했다. 그중 4년은 운용 초기 7년 사이에 발생한 것이었다. (참고로 워런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는 지난 25년간 S&P 500 지수 대비 연평균 138bp라는 여전히 인상적인 초과 수익을 기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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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리의 마법은 케인스가 킹스 칼리지 기금 운용역으로 부임한 시점에 100파운드를 투자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만약 이 돈을 국채(Gilts)에 투자했다면 506파운드로, 영국 주식에 투자했다면 855파운드로 불어났겠지만, 케인스에게 맡겼다면 그가 사망한 1946년에는 무려 2,893파운드라는 엄청난 거금으로 불어났을 것이다. �


그렇다면 그는 이러한 압도적인 보상을 얻기 위해 과도한 투자 리스크를 감수했던 것일까? FT는 연간 수익률만을 토대로 사후적 효율적 투자선(ex post efficient frontier)을 구성해 보았다. 분석 결과, 케인스의 포트폴리오는 지수 추종 전략보다 확실히 변동성이 컸다. 하지만 이러한 추가적인 변동성은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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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스타일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1920년대에 그는 하향식(Top-down) 접근 방식을 취했으나, 논문 저자들은 그에게서 어떠한 시장 타이밍(Market-timing) 능력의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케인스는 1934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투자의 올바른 방법이란 자신이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으며 경영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기업에 상당히 큰 금액을 투자하는 것이라고 더욱 확신하게 된다."


또한 챔버스, 딤슨, 푸의 포트폴리오 정량 분석에 따르면, 1930년대 초부터 케인스의 스타일은 상당한 액티브 리스크(Active risk)를 기꺼이 감수하는 상향식 종목 선정가(Bottom-up stockpicker)로 진화했다.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매매에 덜 활동적인 트레이더가 된 것으로 보인다. 포트폴리오의 연평균 회전율(Turnover)은 1920년대 연 55%에서 1930년대 30%로 떨어졌고, 1940년대에는 단 14%까지 하락했다.


결과적으로, 수십 년간 심각할 정도의 초과 수익을 복리로 쌓아 올린 '낮은 회전율을 동반한 고확신 질적 상향식 종목 선정'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아마도 크리스 혼(Chris Hohn)의 TCI 펀드에서 핵심적인 리스크 테이커(Risk-taker)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George Frideric Han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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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8세기 독일계 영국인 작곡가 헨델의 금융 기록이 엘렌 해리스(Ellen Harris) 교수에 의해 상세히 분석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흥분했다.


해리스 교수는 헨델의 은행 연금(Bank annuities)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기업보다 많은 노예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실어 나른 것으로 악명 높은 로열 아프리칸 컴퍼니(Royal African Company)의 지분 보유 현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정도 자료라면 그의 투자 성과(Track record)를 재구성할 수 있는 풍부한 소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법하다.


하지만 해리스 교수는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이러한 투자 자산이 등록된 계좌들이 주요 음악 작품이 발표된 직후에 개설되었다는 점, 그리고 헨델의 명의로 계좌가 열리자마자 곧바로 폐쇄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즉,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헨델의 능동적인 투자 결정이 아니라, 후원자들(특히 샨도스 공작)이 주식이나 채권 형태의 현물로 지급한 보수(Payment in stock/bonds)라는 것이다.


이는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이 '글로벌 크로싱(Global Crossing)'의 주식을 강연료 대신 받고는, 이를 현금화하는 것을 잊었거나 혹은 현금화하지 않기로 선택했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해당 주가는 한때 175배나 폭등하며 강연료의 가치를 1,400만 달러 이상으로 끌어올렸으나, 회사가 파산 절차를 밟으면서 결국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어쨌든, 『메시아』의 위상은 안전해 보인다. 헨델에게 줄 헤지펀드 일자리는 없다.


나머지 인물들


우리는 이 명단이 매우 남성 중심적이고 영국 중심적이며 다소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가진 자료로 작업해야 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1921년 노벨상 상금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1929년 대공황 때 날렸다는 이야기는 인터넷 괴담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확인한 바로는 그는 전처에게 이혼 합의금으로 돈을 넘겼고, 그녀는 그 돈으로 취리히의 5층짜리 아파트를 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주식 포트폴리오보다는 스트랫퍼드 농지에 수입을 쏟아부은 것으로 보이고, 제인 오스틴은 돈과 부의 역할에 대해 세밀하게 묘사했음에도 정작 투자를 시작할 만큼 충분한 돈을 벌지 못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예술가와 교사로서 좋은 수입을 올렸지만 재정에 관한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마리 퀴리는 돈이 생기는 대로 화려한 장난감을 사는 대신 과학 연구를 진척시키기 위해 기부했다.


돈이 사회적 기여를 측정하는 중립적인 매개체라는 생각은 물론 넌센스다. 알파빌은 이것이 명백한 사실임을 깨닫는 데 천재적인 지능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출처:https://www.ft.com/content/5d2166f5-965b-45b2-a604-9f0a6fc19a35?shareType=nongi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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