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금이 가고 있어.
허벅지를 천천히 가로질러 내려가는 하나의 핏방울. 매우 진하다.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엉거주춤히 서서 감상한다. 어느새 종아리를 타고 발목까지 내려온 또렷한 선. 오른 다리 전체에 그어진 붉은 금을 dslr로 몇 방 찍었다. 고통이나 소스라침 없이 나는 이 붉은 액체를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정말 이대로 온 몸에 금이 가면 재밌겠는걸. 영화<서브스턴스>처럼, 척추를 가르고 또 다른 ‘나’가 등장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면 “몸이 금 간 도자기처럼 갈라져서 죽은 여자"로 대서특필되거나 현대 미술 작품의 하나로, 깨진 꽃병과 나란히 배치한 금 간 사람의 사진 뭐 그런 생각들을 하다 정신을 차리니,
이제 막 몸 밖으로 나온 그것은 김이 날 것만 같이 따뜻하다. 후텁지근한 여름 밤 강물의 냄새를 풍긴다. 이것은 모성의 냄새일까 생명의 냄새 그러니까 지구의 냄새인가, 땅 밑에서 언제까지라도 끓는 마그마의 냄새일까.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싶다. 내게 오직 피와 부드러운 살, 연한 머리카락만이 있던 시간으로 가고 싶다. 폭력과 죽음은 아주 먼 미래였던 곳으로.
언제나 누구라도, 심하게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상기시킨다. 메멘토 모리도 한 두 번이지, 사람들이 피를 가득 채운 물풍선 같다고 생각한다. 매일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건사고 소식. 뉴스로, 시사교양 프로그램으로 다뤄지는. 나는 타인의 핏자국을 듣고 보고 상상하다 문득 죄책감이 든다. 고통 없이 피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피를 뽑을 때면 늘 고개를 돌리는데, 보지 않아도 피가 딸려 나오는 속도를 느낄 수 있다. 숙련된 임상병리사가 재빠르게 튜브를 갈아치운다. 검사가 끝나고 고개를 돌려 여덟 통이나 되는 것들을 잠시 바라본다. 그 중 어떤 것은 혈구 수치를 보여줄 것이고, 어떤 것은 면역글로불린을 보여줄 것이다. 신기하고 고마우면서 두렵다. 비트 착즙액같이 검붉은 저 안에서 수십 가지가 넘는 항목을 뽑아낼 수 있다니. 어떤 질병에 걸린다는 것. 그것은 운명일까? 검색을 하면 이미 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블로그, 환자들이 모인 카페에 쓰인 글들을 양껏 볼 수 있다. 내가 저들 중 한 명이 될 지, 그 옆을 스쳐지나가는 사람이 될 지. 나는 고통 없이 그들의 고통을 보고 있다. 안도해야 할까. 불쾌가 곧 고통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고통은 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 지금은 아니라고 해도 반드시 찾아오고, 또 지금이 가장 힘든 때라고 해도 더 힘든 것이 돌아오리니. 악마의 주문이 아니라 생이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영화<올드보이>로 아주 유명한, 엘리 윌콕스의 시 ‘고독’의 첫 구절이다. 너무 버겁고 절망스러워서 주위에 공감과 위로를 구걸한다. 나와 함께 이 고통을 느껴달라고. 내가 흘리는 피를 너도 조금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공포로 가득 찬 머릿속 한 귀퉁이에 작은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그 기대는 역시나, 처참히 무너진다. 나의 고통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다. 개인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그 자신에게만 아무것인 것이다.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다. 그들이 무관심해서가 아니다. 나의 피와 타인의 피가 너무나도 뚜렷이 구별되듯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가 없다.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말이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나는 죄의식을 가진다. 동시에 나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린다. 우리가 같은 피를 가졌더라면. 따뜻히 흐르는 그것을 나누어 가졌더라면. 내가 온 몸에 금이 가도 아픔을 느끼지 못할 사람들에게. 그렇지만 양수의 감촉과 피의 냄새를 아는, 각자의 몸 안에서 각자의 생각을 가질 그들에게 나는 영원히 가닿고 싶다. 어쩌면 삶이란 그 닿지 못함을 견디는 일일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