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야겠다.
매일 밤 들어가 잠을 자는 곳. 재미없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 간절히 떠올리게 되는 곳. 푹 쉬어보려고 하지만 잘 쉬지도 못하겠고, 이상하게 시간만 빨리 흐르는 곳. 하루종일 있기는 좀 갑갑한 곳. 안전과 편안함을 자연스레 기대하는 곳. 거주자의 말소리와 고함, 웃음과 재채기, 특정 뉴스 채널의 소리와 즐겨보는 드라마, 저녁 일곱 시 반이나 여덟시경 부딪히는 식기의 소리 그리고 음식을 조리하는 냄새, 말다툼이 잦은 특정 시간대, 거실 전등을 소등하는 시간, 잠을 자는 숨소리, 나갈 채비를 하는 움직임을 알고 있는, 주인을 닮아가며 변해가는 곳.
지금 편안한가요, 이곳은 안전합니다. 명상 안내자의 말에 나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본다. 체리목 마룻바닥과 정갈해보이는 격자무늬 미닫이, 찻잔을 비롯한 다구들. 러시아 드론이 급습을 하지 않는 이상 과연 평화롭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약 20분 후면, 덮고 있던 담요를 개고 인사를 나눈 후 난 이곳을 떠나고, 방 안은 언제 몇 명의 사람이 있었는지조차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깔끔히 치워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쓸쓸하다. 이제 집으로 가세요? 나를 향해 묻는 말에 그렇다고, 편한 거짓말을 한다. 으레 나는 곧바로 집에 가지 않고 백화점 푸드코트나 쇼핑몰 안의 카페 같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한낮의 귀가는 종종 불쾌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에 가려는 사람들이 완전히 몰린 시간에 가고 싶지는 않기에, 나는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혹은 아주 늦은 시간에 간다.
나는 지금 집으로 간다.
바깥의 온갖 먼지와 매연을 묻히고 간다. 외출한 지 오래되어 머리는 기름지고, 눈가와 얼굴 근육에 피곤함이 보인다. 배도 고프다. 바로 꺼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었던가. 아마 아침에 씻어놓은 사과와 아몬드, 감자칩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저녁 준비를 하겠지. 이럴 땐 간절하게, 일 잘하고 신뢰할 수 있는 가정부가 짠하고 나타나면 좋겠다. 아니면 우주 식량 같은, 튜브 형태의 영양식을 빨아 먹을 수 있었으면. 흐느적 거리는 몸으로 채소를 씻고 반찬을 차린다. 식사 준비를 위한 일련의 과정들이 참 지난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사파리의 암사자처럼 축 쳐져 소파에 몸을 걸치고 싶지는 않다. 모든 일을 재빨리 마치고, 깔끔하고 완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 하지만 집은 이미 게으른 주인에게 맞춰져 흐물거린다. 정돈된 생활이란 것은 왜 이다지도 어려울까. 우리는 매일 규칙을 세우고 그것을 지킬 새도 없이 흐트러짐을 택한다.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면 나으려나. 깨끗하고 빳빳한 새 집으로. 우리는 애꿎은 집에 대고 원망을 한다. 이 집은 산하고 가까워서 너무 습해. 환풍기가 잘 돌아가지 않아. 수납공간이 너무 적어. 전주인이 뒷베란다를 터 버려서 방이 추워. 부엌이 좁아서 조리할 공간이 없어. 난방 소음이 심해.
집은 팔 년째 같은 욕을 듣고 있다. 멍청한 짓이다. 집은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해졌다. 말라가는 동시에 부어갔다. 습기로 들뜬 벽지가 우울한 무늬를 그렸다. 나는 푸른 벽지가 둘러져 있는 방에 앉아 바람에 부딪히는 대나무 소리를 들었다. 그래, 이 참에 바꾸는 거야. 우리는 이케아에 가서 거실에 놓을 탁자를 보았다. 순전히 나의 주장이었다. 같은 동의 1층집-현관을 오갈때마다 몰래 보았던- 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아늑해보였는데, 얇은 커튼 사이로 전구색 조명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나즈막한 고동빛 가구들과 난 화분이 보였다. 노부부가 사는 집이었다.
그 집의 하이라이트는 소파 대신 놓인 방석과 나즈막하고 기다란 나무 테이블로, 전체적으로 다실(茶室)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 집의 테이블과 가장 비슷해보이는 나무 탁자를 사자고 했다. 낮은 나무 탁자. 김이 나는 유리 찻주전자와 그 안으로 보이는 노란 찻물. 쌓아놓은, 손잡이가 없는 작은 찻잔들. 사기그릇 위의 말린 찻잎들. 자수가 놓아진 방석. 혼자 있어도, 둘이 있어도, 셋이 있어도 좋을 거야. 혼자서는 차를 마시고, 둘이서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셋이서는 차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보드게임도 하는거야. 그렇게 콘도에 놀러온 것처럼 매일매일 즐겁게 사는거야. 찰나의 순간, 이케아의 하얀 형광등 아래 서서 나는 진정한 우리집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저렴하지 않고 다른 가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탁자의 구매는 무산되었다. 하지만 탁자를 사면, 거기에 어울리는 소품들을 하나씩 갖추게 될 테고 그렇게 조금씩 바뀌면서 아늑하고 살 만한 집이 될 것이다. 우리는 빈 손으로 돌아왔다. 넓은 마루 한가운데 나는 쉴 곳을 찾지 못한다. 바닥이 차다.
여자가 찬 곳에 앉으면 안돼. 누군가의 말이 거실에 울린다. 뒤돌아보니 미술이 미소 짓고 있다. 창 밖으로 펼쳐진 황금빛 구름이 붉게 물들어 간다. 찬 곳에서 지내면 안된단다. 한국으로 들어오는 건 어떠니? 전화 건너편으로 JY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여기가 내 집인걸요. 집을 떠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요. 나는 눈을 감고 미래의 집과 과거의 집 중 어떤 것을 가지는 것이 더 쉬울지 가늠해 본다. 자줏빛 퀼트 카펫. 그 위에서 동생과 나는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만들고 춤을 추었다. 밥이 익는 냄새를 맡으며 붉은 가죽 소파 위에서 초저녁잠을 잤다. 돌아가야겠어. 나는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채비를 한다. 그 집에 가면, 모두가 날 맞아주겠지. 어린 나와 여동생, 엄마가. 아마 아주아주 놀라겠지만. 하룻밤은 자고 와야겠다. 나는 작은 샴푸병을 하나 챙긴다.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니까 아마 예정보다 오래 지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버스와 지하철, 또 버스를 타고 과거의 집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