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영 Oct 21. 2023

완전한 사람과 완성하는 삶

도서 리뷰|생의 마지막 날까지

나는 가끔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를 상상해 보곤 한다. 어떤 옷매무새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을지, 어떤 말씨를 쓰고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무엇을 주로 해먹고 평소에는 뭘 하러 다니는지. 이런 것들을 궁금해하다 보면 이상형을 고르는 것처럼 설레는 기분이 든다.


잘은 몰라도 하나 확실해 보이는 것은 많이 웃는 할머니가 되어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노라 에프론 감독의 영화 <줄리 & 줄리아>를 보면 할머니가 되어서도 좋아하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며 자기 일을 해나가는 사랑스러운 주인공 ‘줄리아’가 나온다. 그녀를 보면 누구든 미소가 저절로 지어질 것이다. 영화를 보며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저렇게 될 것 같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줄리아는 나의 노년기 이상향이 되었다.


유달리 한국에서는 중년의 이야기를 듣거나 보기 어려운 것 같다. 외국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인공이거나 황혼기의 러브스토리, 연애, 결혼의 소재도 잘 다루어지던데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힘들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미디어 콘텐츠를 통해서라도 황혼기의 롤모델을 찾고 싶었다. 나의 가치관을 더 넓은 가지로 뻗고, 청년 이후의 삶도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누군가의 삶. 그러나 내가 찾는 좋은 어른은 주변에도, 멀리에도 없었다.



그래서 홍신자 선생님의 <생의 마지막 날까지>를 접했을 때, ‘이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이분의 수필은 내게 많은 이야기를 전달해 줄 것 같았다. 책 표지에서는 그녀를 ‘세계적인 명상가’라고 소개하지만, 나는 이분을 무용가로 알고 있다. 최근 2023 시댄스에서 죽음과 노화를 주제로 다루었는데 그녀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이불 위에서’도 주제와 관련한 작품으로 초청되었다.


이외에도 그녀의 이름 앞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명상가, 무용가, 작가, 전위 예술가, 안무가 등이다. 이런 수식어가 따라붙기까지 그녀의 삶은 부서지고 완성되는 과정이 수도 없이 반복되지 않았을까.  

기대 속에 책을 열기가 무섭게, 한숨에 책을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거대한 일기가 짤막한 한 권에 담겼지만, 내용은 충분히 나의 궁금증에 많은 답변을 해주었다. 평상시 갖고 있던 고민부터, 풀리지 않던 춤에 대한 고민, 인생 전반에 대한 고민, 고민을 대하는 방식 등 책은 그동안 내게 꼭 필요한 이야기들을 차분히 나누어주었다.  


춤추는 사라지고 춤만이 남는다


“춤은 증명하거나 제시하기 위해 추는 것이 아니다. 춤은 등의 아름다운 선을 자랑하고 팔다리의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강해질수록 춤은 보이지 않고 춤추는 자의 몸만 보인다. 그럴 때의 춤은 춤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 있으니 나를 봐주세요’ 하고 말하는 사람의 ‘몸짓’에 불과하다.”


춤을 추다 보면 혼자 출 때보다 남과 출 때, 카메라가 앞에 있을 때 동작이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기도 하고, 뭔가 보여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환호성이 안 나오면 잘못된 춤을 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과의 춤은 마인드 컨트롤의 연속이다.


일 년 정도 춤을 거의 추지 않은 적이 있다. 추더라도 철저히 혼자만의 공간에서 나하고만 추었다. 카메라도, 친구도 없이 혼자. 누군가의 동작을 따라 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내 동작이 기록되고 있거나 누군가에게 노출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나오려던 것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10대 때보다 배운 것은 많은데 춤추기는 더 어려워지는 기분이었다.


“춤을 추는 순간 나는 사라진다. 춤은 보이지만 춤추는 자는 사라지는 것이다.”


무아지경에서 ‘무아’는 없을 무(無)에 나 아(俄)를 쓴다. 내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기분을 느껴본 지가 꽤 됐다고 생각했다. 처음 춤을 추기 시작한 것도, 계속 춤을 추었던 것도 ‘무아’를 경험한 후부터였다. 맘을 먹고 시작했다기보다는 무아의 상태를 느끼는 것에 중독이 됐다. 힘들 때, 지칠 때마다 나의 자아는 저 멀리 두고 좋아하는 노래에 마음껏 춤을 췄다. 그렇게 춤을 추면 손바닥 같은 방안도 넓은 초원의 들판처럼 느껴졌다.


춤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내가 겪었던 문제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동안 나는 내 존재를 춤으로 드러내려 했었구나.’ 하면서. 뽐내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신체의 아름다움을 돋보이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됐다. 그런 적도 있었고 아닌 적도 있었다. 어쨌든, 그당시 내 춤에는 자아가 많이 묻어났던 것 같다. 그 중요한 차이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몸짓이 아니라 춤이 되기 위해 춤을 추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그뿐만 아니라 인생을 채우는 여러 가치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자아, 사랑, 여행, 고뇌, 고독, 자유, 결혼, 가족, 죽음까지. 내 일상과 정말 가깝게 있으면서도 때때로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여 머리가 아프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예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해서 멀리 있다고 느껴지는 주제들이다.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마음에 새기면 좋을 문장에는 줄을 두 번 세 번 그었다.


“나에게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짐에도 다른 기준을 의식하며 멈추는 것이야말로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눈총이 무서워 타협하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남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고 허무를 느낄 것이다.”


그녀가 겪어온 삶의 경험과 궤적은 신선한 자극과 동시에 곱씹어 보고 싶은 생각거리가 됐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뉴저지 나체촌 이야기와 옷을 입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에 대하여, 고독과 관련한 생각들이다. 그 이야기들은 평상시 내가 생각하던 것과도 맞물려 있었고 그렇기에 무척 공감이 많이 됐다. 동시에 내가 느껴보지 못한 것들, 깨달음의 과정을 보며 나 또한 그의 삶에서 새로운 마음가짐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명상하면서 좋았던 것은 나의 존재가 점점 작아지는 기분을 받았던 때다. 자의식이 작아질수록 세상을 인식하는 일은 점점 명확해지고 결정을 내리기도 쉬워졌다. 큰 걱정거리는 그리 큰 것이 되지 않았고, 주변의 모든 상황이 단순명료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나니 아주 힘든 일도 아주 슬픈 일도 없었다. 감사한 일들만 주변에 남았다.


그러나 바빠지고, 스스로를 돌볼 시간이 부족해지면 자아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자의식이 다시 커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와중에 책 속 문장을 읽으니,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았다. 맞아.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그동안 괴로웠거나 고민했던 이유를 떠올리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 스스로를 단련해야 하는 시간이 왔구나.’ 하면서 내가 얼마나 유약한 존재인지 자각했다.


“그 투명한 인식이 찾아와, 나에게는 잃을 것도 상할 것도 부서질 것도 하나 없음을 알게 된다. 언젠가 에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그것을 죽일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사람과 삶, 삶과 사람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20대 중반에 접어들고 나니 뭔가 달라지고 싶다는 욕구가 퐁퐁 샘솟았다. 좀 더 차분해지고 싶었고, 누구보다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의 취약성과 욕망, 욕구, 꿈들.. 그 모든 것을 알아가기 위해 산책과 명상을 하고, 매일 같이 블로그에 글을 썼다. 일기장을 다시 펼쳐 좋아하는 것들을 죽 적어보기도 하고, 어린 시절 꿈이라고 적어 놓은 목록들, 버킷리스트를 들추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말씨와 행동은 단정해지고, 20대 초중반에는 자주 요동치던 마음도 금세 가라앉힐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여전히 부족한 점은 많지만, 적어도 나의 몸에 변화가 생기면 알아차릴 수 있는 세심한 감각을 얻게 됐다.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사랑을 하나씩 찾자. (중략) 미움을 가진 사람은 미움으로밖에 남을 대할 수 없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랑, 긍정, 감사와 같은 개념이었다. 모든 아픔과 슬픔, 고민과 불안, 번뇌를 지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긍정의 개념이었다. 그녀 또한 사랑을 찾는 법을 권한다. 사랑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사랑만 눈에 보이고, 미움을 찾으면 미움만 보인다고. 맞는 말이다. 감사를 찾으면 일상이 감사함으로 가득 차서 나는 운 좋은 사람이 되지만, 아쉬운 점에 집중하면 나는 가여운 사람이 된다. 행복과 불행은 이렇게 한끗 차이라는 것을 사랑과 감사하는 일에서 느낀다.


사람을 빨리 발음하면 ‘삶’이라고 들린다. 이처럼 사람과 삶은 때론 구분하기 어렵고 떼려야 뗄 수도 없는 관계에 있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삶이 완성되어 가지 않을까. 삶이 완성되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플랫폼을 지나는 기차처럼 매 순간, 매 시기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 완전해지고 단단해지고 싶다.


<생의 마지막 날까지>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다. 삶을 완성해 나가는 완전한 사람의 이야기. 계속해서 변화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그에 맞게 완전해지고 삶의 마지막 종착지인 죽음을 준비하기까지. 담백한 어투에서 진심을 느끼고, 굴곡진 삶의 모양에서 지혜와 깨달음을 전해 받는다.


이십 대에 여든을 꿈꾸면 조금 이른 이야기일지 싶지만, 적절한 시기에 좋은 내용을 만난 기분이 든다. 나는 나의 여든을 꿈꾸고 싶다. 내게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나이를 기대하며 나의 노화를 기꺼이, 아름답게,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그렇게 초연히 나이 들어가고 싶다. 83세에 그 마음가짐을 전해주는 그녀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미구엘 슈발리에 展 저 너머의 세계, 눈 앞의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