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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30. 2017

수로왕 설화가 깃든 구지봉과 허황후릉

경상남도 김해시

구지봉 비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으렴.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왕은 존재하지 않고 9간(족장)이 통치하던 옛 가야지역에 구지봉에 올라 춤과 노래를 부르라는 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하늘이 알려주는 데로 사람들은 언덕에 올라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붉은 보자기에 싸인 상자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상자 속에는 6개 알이 담겨있었습니다. 알이 깨지면서 어린아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가장 먼저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는 몇 년 후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금관가야를 세우고 왕이 됩니다. 알에서 나온 첫 번째 아이가 바로 김수로입니다.





영대왕가비


사람들이 행복을 꿈꾸며 가진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왕을 맞이하기 위해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인 구지가는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대왕가비는 현명하고 덕이 많은 왕이 내려와 올바른 선정을 펼쳐 자신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던 사람들의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구지봉을 알리는 비석


저는 수로왕 설화를 읽으면서 구지봉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춤과 노래를 했으니 굉장히 넓은 장소라고 상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구지봉에 올라서는 순간 제가 제대로 찾아온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구지봉을 향해 올라간 지 몇 분도 안되어 구지봉이 바로 보였습니다. 구지봉은 수백 명이 모일 수는 있겠지만 춤과 노래를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좁은 공간이었습니다. 도착한 구지봉이 너무나 협소해서 스마트폰의 지도를 통해 구지봉에 온 것이 맞는지 검색을 다시 해야만 했습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에 그려진 구지봉은 다른 곳보다 높은 봉우리였습니다. 구지봉에 서면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수백 명이 구지봉 주위를 돌면서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며 왕을 기다리던 곳이 이렇게 좁다니. 그동안 상상해왔던 것이 와장창 깨져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구지봉


구지봉을 통해 역사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유적지에 직접 가서 보고 느끼며 체험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글과 사진만으로는 배운 역사는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데 타인에게 사실을 알려주며 생각을 변화시키려는 것은 '소 뒷걸음질로 개구리 잡는 격'이 아닐까 싶네요.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스스로 깨우치고 터득했다면 교사는 소재를 툭 던져놓은 것 밖에는 한 일이 없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구지봉 고인돌


구지봉 옆에 놓여있는 고인돌은 구지봉은 가야가 세워지기 전부터 사람들에게 신성시된 장소였음을 보여줍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계급이 발생하면서 지배자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덤입니다. 지배자를 위해 만드는 장소인 만큼 아무 곳에 만들지는 않았겠죠. 최근까지도 무속인들이 정령이 깃들였다고 믿으며 기도를 올렸던 큰 돌들은 대부분 고인돌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구지봉 고인돌은 받침돌이 작은 남방식 고인돌로 한석봉이 글을 남기고 갈 정도로 예로부터 지역의 명소로 유명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구지봉에 올라 청동기시대의 유물을 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욱 반갑고 놀라웠는지 모르겠습니다.




허황후릉


구지봉을 내려오면 김수로의 부인이었던 허황옥의 능이 있습니다. 김수로와 허황옥의 결혼은 오늘날 일부 사람들의 시선으로 볼 경우 탐탁지 않은 결혼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허황옥은 한국인이 아니라 인도 사람이며 김수로보다 9살 연상이기에 환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편협하며 잘못된 생각입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다문화사회이며 연상연하 커플이 많은 나라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단일 혈통을 강조한 것은 오래되지 않은 일입니다. 반만년의 역사 동안 수많은 민족이 결합하면서 한민족이라는 공통된 문화와 풍습을 형성하고 역사를 함께 만들어온 것입니다. 역사 속 기록에도 외국인의 귀화는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 유리왕의 부인이 중국인이었으며, 신라의 처용도 한국인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원 간섭기 고려왕들은 몽골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조선 임진왜란 시기 중국과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많이 귀화했습니다. 앞으로도 단일민족을 강조하며 외국인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수로왕비릉


김수로왕과 허황옥은 만남부터가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김수로가 왕위에 오른 지 4년 되던 해에 붉은 돛을 단 배가 도착하더니 아리따운 여인이 배에서 내리며, 자신이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허황옥은 부모님이 하늘로부터 수로왕의 베필로 딸을 보내라는 계시를 받았다며 자신이 온 이유를 설명합니다.  또한 자신이 이곳에 오기 위해 어떠한 고초를 겪었는지를 이야기하며 수로왕과 자신은 하늘이 맺어준 사이라고 강조합니다.




파사석탑


허황옥은 자신이 고생한 증표로 파사석탑을 보여주며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소녀가 배를 타고 가야를 향해 출발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큰 파도를 만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소녀는 결국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니 아버지가 이 석탑을 주며 동쪽으로 나아가라고 하였습니다. 큰 파도가 너무 무서웠으나 하늘과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석탑을 싣고 다시 바다에 나서자 큰 파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습니다. 오히려 순풍이 불어 이곳까지 저를 안전하게 데려 왔나이다." 이에 수로왕은 하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허황옥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파사석탑


수로왕은 허왕옥을 아내로 맞이한 후 141년을 같이 하며 10명의 아들을 둡니다.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큰 아들에게는 자신의 성 '김해 김씨'를 주고, 둘째와 셋째는 '김해 허씨'를 줍니다. 그리고 허황옥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준 파사석탑을 기억하며 나머지 일곱 아들을 불가에 귀의시켜 부처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 과정에서 수로왕이 허황옥을 얼마나 깊고 크게 사랑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허황후릉


그러나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에 전래된 것은 아무리 빠르게 잡아도 372년 중국 전진을 통해 고구려에 전래된 것입니다. 김수로왕과 허황옥은 199년과 189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찌 허황옥은 석탑을 가지고 가야에 왔으며 자녀를 승려로 귀의시킬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삼국유사에 허황옥의 이야기를 실었던 일연스님조차도 이것이 의문스러웠지만 파사석탑이 이 지역에서 나오는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며 설화가 사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일연스님의 입장에서는 불교를 숭상하는 내용을 굳이 바꿀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 역사가들은 파사석탑을 통해 불교가 중국을 통해서 북쪽에서 아래로 전래되기도 했지만 가야를 통해 남쪽 지방으로 전달되었다는 주장도 하고 있습니다.




돈숭문


우리가 허황옥 능에서 불교의 전파과정에 대하여 자세히 알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자녀분들을 데리고 갔다면 다문화사회가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수천 년 전에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면 좋을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성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도 존중받아야 함을 수로왕과 허황옥을 통해 알려주면 좋을 것입니다. 연인끼리 방문한다면 수로왕과 허황옥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더욱 발전시키면 좋을 것입니다. 설화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설화를 오늘날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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