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행성 이름으로 명명된 <이원철>
우리는 보통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일제와 직접 맞서 싸웠던 분들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신 분들도 독립운동가이다. 그렇기에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이런 분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거나, 독립운동가로 연계시켜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 이원철 박사도 그런 분 중에 한 분이다.
우주 소행성에는 각각의 이름이 정해져 있는데, 그중에는 <김정호>, <장영실>, <최무선>, <홍대용> <허준> 등 자랑스러운 선조의 이름을 붙인 소행성이 있다. 그중에서는 <이원철>이라 명명되는 2002년 한국천문연구원이 발견한 소행성 ‘2002DB1’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생소한 <이원철>이란 이름을 소행성 이름으로 명명한 것은 대한민국의 과학이 발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준 이원철 박사를 존경하는 후배 과학자들의 마음이 담겨있다.
한국인 최초 이학박사가 되다.
우암 이원철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삶을 살아갔기에 이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1896년 서울에서 이중억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이원철은 원주율 소수점 수십 자리까지 외울 정도로 똑똑했다. 하지만, 당시는 조선 시대 성리학만을 강조하면서 수학과 과학을 천대해오던 관습이 이어져 내려왔기에 수학을 잘하는 것은 인정받기 어려웠다.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은 한국을 영원히 지배하기 위해 우민화정책을 강조하며 한국인에게 정상적인 교육을 제공하지 않았다. 한국인들도 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고급 관리가 되거나 판검사가 되려 할 뿐 자연과학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원철은 자신이 좋아하는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1915년 선교사들이 설립한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수학과 물리학과) 1기로 입학했다. 수물과에 입학한 학생이 4명이었고, 이후 4년 동안 입학한 학생이 없다는 점에서 지금과는 매우 다른 열악한 환경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이원철이 수물과를 졸업하고 성인으로서 직업을 선택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학과 과학에 큰 재능을 가지고 있던 이원철은 지금 당장 공부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고 즐거웠다. 학과가 폐지될 수 있다는 불안감 등은 생각하지 않고 학생으로서 열심히 공부하여 졸업한 이원철은 연희전문학교에서 2년 동안 수학 강사로 일했다. 연희전문학교 스승 베커(Becker)와 루퍼스(Will Carl Rufus)는 비정규직인 수학 강사로 있기에는 이원철의 재능이 너무 아까워하며, 미국 알비언 칼리지(Albion college) 4학년에 편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던 이원철은 밤낮 가리지 않고 공부를 한 결과, 몇 개월 만에 모든 과목에서 All A 학점을 받으며 졸업했다.
이런 노력은 막막하기만 했던 이원철의 앞날에 길을 열어주었다. 은사 루퍼스는 자신이 천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미시간대학에 이원철의 입학을 허락했고, 자신이 연구하던 맥동변광성 이론을 증명하는 일에 참여시켰다. 맥동변광성 이론은 미국 섀플리(H. Shapley) 교수가 별 스스로 수축과 팽창을 되풀이한 결과 밝기가 달라진다고 주장한 학설이었다. 기존에 쌍성계를 이루는 두 별이 공전하면서 서로를 가린 결과 별의 밝기가 달라진다는 식(蝕)변광성 이론을 보완하는 학설이었다. 당시 루퍼스는 섀플리 교수의 맥동변광성 이론을 증명하는 연구 중이어서, 이원철에게 독수리자리 에타별을 관측하고 자료 분석하는 일을 맡았다. 31.5인치 반사 망원경과 프리즘 분광기를 이용해 얻은 71회 분광학적 관측 결과를 분석 계산하여 에타별이 맥동변광성임을 밝힌 이원철은 1926년 논문 『독수리자리 에티별의 하늘에서의 운동』을 발표하여 한국인 최초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을 위해 다른 꿈을 꾸다.
대중종합지였던 『삼천리』는 식민지하에서 신음하던 한국인들에게 이원철이 업적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 과정에서 “이원철은 천재라 하리만치 독창성이 있어 수천 년 동안 정예의 과학을 가지고도 수백의 세계 천문학도가 찾지 못하던 유명한 별 한 개를 역학의 힘을 통하여 발견하였다. 이에 대해 천문학자들은 놀라 마지않아서 그 별 이름을 ‘원철성’이라고 칭한다고 한다.”라며 이원철의 업적이 세계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알렸다. 비록 별을 발견했다는 오류가 있기는 했지만, 이 소식은 한국인들의 가슴에 자부심을 새겨주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일제로부터 온갖 멸시와 무시를 당하며 민족적 자존감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한국인에게 “원철성”이라는 한국 이름의 별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개인의 명예와 학구열만 생각한다면 이원철은 미국에 남아 천문학자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 나라와 민족을 버리고 개인의 영위만을 쫓을 수는 없었다. 독립을 되찾고,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수학과 과학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미국에서 절실하게 통감한 이원철은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고국에서 후학을 양성하여 비록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가 한국을 위해 큰일을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이원철은 수학과 물리학 그리고 천문학 등 여러 분야의 학문을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원철의 생각과는 달리 학과를 운영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우선 수학과 과학 분야에 입학하여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도 많지 않았다. 여기에 교육 자재와 교재 부족 등 자신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던 당시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과 운영에 모든 힘을 쏟다 보니 자연히 천문학 연구를 할 수 없게되었지만, 이원철에게 후회는 없었다.
무엇보다 교수로 재직시절 가장 기뻤던 일은 1928년에 연희전문 천문대에 국내 최초의 15cm 굴절망원경을 설치한 일이었다. 학생들이 이론만이 아닌 망원경을 통해 하늘을 직접 관찰하며 공부할 수 있게 된 사실에 이원철은 이 망원경을 정말 아꼈다. 1935년에는 한국의 천문학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내한한 스승 루퍼스를 도와 우리 옛 문헌과 유적을 조사하는 일에 동참했다. 그 결과 루퍼스는 한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는 이원철의 도움으로 우리 천문학사 최초의 영어 논문인 『한국천문학사(Korean Astronomy)』를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회 잡지에 발표할 수 있었다.
한국인이 어떤 성취감도 얻지 못하도록 탄압을 일삼던 일제는 한국인의 교육에 앞장서던 이원철을 가만두지 않았다. 1938년 독립운동단체였던 수양동우회와 흥업구락부에 가입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원철을 교수직에서 쫓아버렸다. 그럼에도 학생들과 떨어질 수 없었던 이원철이 직원 신분으로 복귀하자, 일제는 이마저도 1942년 조선어학회의 요주 인물이라고 지목하고 탄압하여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한국의 과학발전을 위해 노력한 최대의 성과물이자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굴절망원경이 전쟁 물자로 징발되어 사라져버렸다. 이처럼 젊은 날의 모든 활동이 부정당하고 사라져버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도 이원철은 일제의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였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설계하다.
광복 이후 이원철은 독립한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과학 기술의 발달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기로 결정하고 군정장관 하지 중장을 찾아가 관상감 부활을 요청했다. 하지 중장이 요청을 받아들여 이원철에게 학무국 기상과 과장 자리를 주자, 조선총독부 기상대를 관상대로 재조직하고 관상대장에 올랐다. 이원철은 관상대를 기상, 역서, 행정 사무로 세분화하고 지방측후소와 출장소를 설치하는 등 기상 행정 조직을 완성하였다. 그와 함께 관상대 실습학교를 설치하여 전문가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특히 이 시기 이원철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역서 간행이었다. 루퍼스를 도우면서 우리나라의 천문학의 우수성을 확인한 그로서는 역서 편찬이야말로 광복 이후 혼란한 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농업국가였던 한국에게 있어 역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당시 한국은 광복 이후 양력이 일본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반감으로 음력을 사용했다. 그로 인해 국제사회의 흐름을 따르지 않게되어 외국과의 조약 체결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역서만큼은 국제사회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 이원철은 1961년 관상대 대장으로 마지막 역서를 발간할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
이원철은 학교 정상화를 통한 교육 발전에도 힘을 기울였다. 1944년 일제가 연희전문학교를 미국이 세운 적국의 재산이라며 몰수하여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변경 운영하던 것을 바로 잡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연희대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초대 원장에 임명된 이원철은 기상학과를 신설하고, 이공학과 부장을 맡아 학교 발전에 힘을 쏟았다. 또한 연희대학의 재단 이사로도 활동하며 연희대학교가 연세대학교로 발전·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시기 이원철은 1954년부터 56년까지 하와이 교민들이 인천에 세운 인하공과대학 설립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과대학인 인하공과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으로 부임한 그는 10년 동안 자신의 모든 교육지식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연세대학교와 인하대학교는 대한민국의 경제와 과학 기술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게 된다.
또한 이원철은 YMCA에도 깊은 애정을 가지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공부할 수 없던 시절 YMCA를 통해 꿈을 꾸고 공부한 만큼, 일제 강점기 시절 서울 YMCA에서 많은 강연을 했다. 특히 그가 진행하는 목요 강좌에는 많은 사람이 수강하며 미래의 과학도를 꿈꿨다. 광복 이후에도 YMCA에 대한 애정은 변하지 않아서 재단 이사와 이사장을 맡아, 더욱 많은 학생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
1963년 이원철이 죽은 후 그의 유지를 받든 아내 김화순 여사는 장례식 조의금을 연세대학교 장학금으로 모두 기부하였다. 또한 학술적으로 귀한 가치가 있는 도서 300여 권은 건국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양평군 임야 3만 6천여 평과 서울 갈월동 집을 YMCA에 기증하였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도 이 나라의 발전을 바라며, 자신의 모든 지식과 재산을 대한민국에 바친 우암 이원철 박사는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한 독립운동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