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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묻고 답하기

by 유정호

헌종은 정말 생소한 왕이예요. 순조의 아들인가요?

조선 27명 중에 헌종이 가장 생소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거론이 적은 것도 사실이고,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건도 적으니까요. 헌종은 순조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입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갑자기 피를 토하고 죽으면서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왕이 헌종입니다. 이때의 나이가 8살로 조선시대 통틀어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이기도 합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의 헌종이 나라를 경영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죠. 그래서 헌종의 할머니이자 순조의 비,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하게 만든 시작이었던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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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전히 안동김씨가 정국을 주도했겠네요.

아니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은 헌종의 할머니 순원왕후를 도와 풍양 조씨를 견제했죠. 그러나 노년에 중풍에 걸려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지자 천주교에 의지했어요. 유진길에게 세례를 받으며 심신의 안정을 얻은 김유근은 정계에서 은퇴해버립니다.


풍양 조씨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천주교가 부모와 임금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해로운 종교라며 탄압해야 한다고 연일 주장해요. 순조 때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가 위험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상황에서 순원왕후도 이를 무시할 수 없어서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잡아들인 천주교도의 수가 적었어요. 43명을 잡아들였는데 그들 중 34명이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역풍을 맞을 것이 걱정된 풍양 조씨는 더욱 강하게 천주교인을 잡아들였죠. 이때 겁을 먹은 프랑스 주교 앵베르는 자수하고, 모방과 샤스탕 신부는 충청도 홍주에서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아요. 이때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에게 세례를 내렸던 유진길과 정하상이 체포되면서 안동김씨는 한발 물러나야 했죠. 이 사건을 기유박해라고 합니다.


하지만, 풍양조씨의 권세도 오래가지 못해요. 풍양 조씨를 이끌던 조만영이 죽으면서 안동김씨가 다시 권력을 장악합니다. 그렇다 보니 헌종이 재위하는 기간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권력을 쟁취하려는 다툼으로 백성의 삶은 여전히 힘들었어요. 여기다가 하늘도 헌종의 재위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하늘이요?

헌종이 재위하는 동안 자연재해가 유독 많이 발생했어요. 9번의 큰 물난리와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백성들은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했죠. 또한 해안가에는 이양선이 출몰해 민가를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죠. 어찌 보면 국민이 주인인 오늘과는 다르게 하늘을 대신하여 만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재앙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런 상황을 타개할 왕족은 존재하지 않았나요?

헌종이 2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창덕궁에서 죽으면서 정조의 직계자손은 끝이 나고 말아요. 그러나 왕실의 권위를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며 이를 가는 인물이 있었죠.


그 사람이 누군가요?

아마 이름을 들으면 ‘아~ 너무 잘 알죠.’라고 대답하실 것 같아요. 고종의 아버지. 누구인지 아시겠죠. 바로 흥선대원군입니다. 흥선대원군이 누구냐면 정조의 이복동생이던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되어 평범하게 살았던 남연군의 막내아들이에요. 젊은 시절 신료만이 아니라 한낱 서생에게까지도 무시당했던 흥선대원군은 자기 집안에서 왕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버지 묘를 이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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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장한다니까 생뚱맞은데요.

풍수지리설 아시죠. 땅의 기운이 인간의 삶과 국가의 운명을 영향을 준다는 것으로 아주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한 학설이죠. 예를 들어 고려 태조 왕건은 개성에 새로운 왕이 나올 거라는 도선대사의 말을 이용해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일이 있어요. 흥선대원군은 당시 유명했던 지관이던 정만인을 찾아가 남연군 묘를 이장할 좋은 장소를 물어요.

정만인은 오랜 고심 끝에 두 명의 천자가 나오는 자리와 후손 대대로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있는데, 어느 곳을 선택하겠냐고 물어요. 흥선대원군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두 명의 천자가 나오는 자리를 원한다고 말했죠. 이에 정만인은 충남 예산 가야사 자리를 알려줍니다.


흥선대원군이 과감한 인물이면서 술수에 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래도록 자리한 가야사를 내쫓기 위해 자기 재산의 절반인 만 냥을 가야사 주지에게 주었다고 해요. 또는 중국의 명품 벼루를 충청감사에게 뇌물로 주고는 가야사를 내쫓았다고 합니다.


가야사를 내쫓았으니 순조롭게 이장이 진행되었겠네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야사에 따르면 가야사를 허물자, 흥선대원군의 형제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면 모두 요절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해요. 겁에 질린 형들이 이장을 반대하고 나서자, 흥선대원군은 오히려 명당이 증명되었다며 크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가야사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탑을 부수자 커다란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요.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바위가 부서지지 않아서 공사가 중단되자, 흥선대원군은 크게 화를 내며 직접 도끼로 바위를 내리쳐요. ‘나라고 왕의 아버지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라면서요. 그러자 꿈쩍도 하지 않던 커다란 바위가 깨지면서 공사가 재개됩니다. 이처럼 심혈을 기울이는 만큼 흥선대원군은 두려움도 커져갔어요.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몰래 먼저 이장을 할까 봐요. 그래서 남연군의 묘에 수만 근의 철을 부어 땅을 파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한 의지네요.

흥선대원군은 묫자리가 완성되자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시신을 예산으로 옮겨요. 그 거리가 약 200km로 운반하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지나가는 고을 사람을 동원해 상여를 들게 했죠. 당연히 모두가 불만을 표했겠죠. 그러나 마지막 구간에 있던 광천리 남은들 주민들은 정성껏 상여를 들었고, 흥선대원군은 고마운 마음을 담아 상여를 선물로 줘요. 주민들은 상여를 마을의 보물로 여기 ‘남은들 상여’라고 부르며 정성스레 보관했습니다. 이때가 헌종 11년 1845년이고, 이후 18년 뒤인 1863년 천자가 나온다는 예언대로 둘째 아들이 왕으로 즉위합니다. 바로 고종이죠. 그리고 조선은 한 치의 예언에서 벗어나지 않고 고종과 순종을 끝으로 멸망합니다.


어쩌다 보니 흥선대원군 이야기가 더 많았네요. 헌종에 대해 더 말씀해주실 건 없나요?

헌종은 나라가 혼란한 와중에도 <동국사략>, <동국문헌비고> 등 여러 문헌을 간행하고, 각 도마다 둑을 만드는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여 홍수를 방지하고 농업용수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효명세자처럼 자신의 정치를 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죠. 이런 생각이 드네요. 효명세자와 헌종 모두 20대 초반에 갑자기 죽었을까? 여러 의구심이 들지만, 확연한 증거 없이 속단하기는 어렵죠. 단지 이들이 오래도록 재위하며 새롭게 다가올 세상을 대비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만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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