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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묻고 답하기

by 유정호

고종 때는 정말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이야기가 많겠지만요.

나라의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시기이다 보니까 좋은 역사적 사건보다는 안타까운 사건이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라를 빼앗기는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꼭 알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특히 이때를 살피다 보면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경계하고 노력해야 하는지가 선명하게 보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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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죠?

철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12살의 나이로 국왕에 즉위하게 됩니다. 즉위 초에는 조대비가 수렴청정했으나, 곧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운영했죠. 이 시기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에 목표를 두고 그동안의 문제점들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등 해결합니다. 그러나 백성을 위한 마음이나 세계 변화를 따라가는 능력은 부족했던 것 같아요. 국가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복궁을 무리하게 건설하고, 프랑스와 미국이 침략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이겼다고 생각하며 문을 더욱 꼭 닫아버리죠.


결국 민심을 얻지 못해서 권력에서 내쫓긴 거라고 봐도 되나요?

그런 부분도 크지만, 가장 큰 원인은 성인이 된 고종이 직접 나라를 운영하고자 하는 의지였을 거에요. 하지만 고종은 측근 세력이 부족했죠. 결국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 민씨 척족입니다. 드라마와 뮤지컬에서 명성왕후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표현하지만, 실상은 반대였어요. 능력도 없는 민씨 척족을 중용하면서 나라의 기강이 다시 무너트립니다. 그로 인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정권을 장악하던 세도정치 때처럼 조선은 다시 매관매직과 부정비리가 끊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도 고종이 직접 정치하면서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가장 큰 변화는 통상 반대가 아닌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서구 문물을 수용하는 데 있어요. 물론 이 과정에서 조선에 불리한 내용으로 조약이 맺어졌지만, 이것 때문에 식민지로 전락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가장 큰 문제는 정부가 국민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하나로 단합시키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이죠. 그로 인한 피해는 오롯이 국민에게 받아야 했고요.





국민은 어떤 피해를 보았나요?

그 시작이 임오군란이에요.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운영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로 인해 구식 군인들이 13개월 치 월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3개월 치 월급을 지급하는 과정에서도 중간 관리들이 농간을 부리면서 쿠데타가 진행된 것이 임오군란입니다. 이때 명성왕후와 민씨척족은 중국 청나라군대를 끌어들여 자국의 군인을 죽이며 진압합니다.


이후 청나라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개혁을 하고자 김옥균과 급진개화파들이 일본군대를 끌어들여 갑신정변을 일으킵니다. 이때도 고종과 명성왕후는 또다시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관료들을 죽이죠. 외세를 끌어들여 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나 외세의 힘을 빌려 신하를 죽인 고종과 명성왕후 어느 쪽도 잘했다고 말하기 어렵네요.


이런 현상은 계속 이어집니다. 1894년에는 외세의 침탈과 관리들의 폭정에 맞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때도 민씨척족은 농민군을 막아내지 못하자 다시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합니다. 문제는 일본이 톈진조약을 내세워 조선에 군대를 보낸 것이죠. 동학농민군은 청과 일본의 군대로 조선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서둘러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청과 일본군도 철수하나요?

아니요. 일본군은 경복궁을 에워싸고 고종에게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라고 협박합니다. 또한 청나라군대를 선제공격하며 청일전쟁을 일으킵니다. 이 모습에 분개한 많은 백성이 다시 봉기를 일으키지만, 일본군에 의해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됩니다. 이처럼 권력을 지키기 위해 민씨척족은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관료, 군인, 백성을 죽이는 상황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갔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역사를 통해 위정자를 경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워야 합니다.


듣다 보니 답답해지네요. 자주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한 분이나 단체는 없나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분들은 많습니다. 다만 그분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거나 활용하지 못한 것이 문제이지요. 조선 정부도 서구 문물을 배우기 위해 개항 이후 일본에 수신사와 조선시찰단, 중국에 영선사, 미국에 보빙사 등을 보냈어요. 1897년에는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대내외에 자주 국가임을 선포합니다. 또한 갑오·을미개혁과 광무개혁 등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밖으로 외세의 개입, 안으로는 체계적이지 못한 개혁과 매국노 등으로 인해 번번이 실패합니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개혁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오는 과정에서 많은 이권을 열강에 넘겨주기도 했죠.


하지만, 백성들은 달랐습니다. 서재필 박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열면 수많은 사람이 모여 스러져 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신분의 차이는 나라를 위한 일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천대받고 무시당하던 백정들도 단상에 올라 나라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면, 밑에 있는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호응했으니까요. 그런 노력이 모여 러시아가 부산의 절영도를 가져가려는 것을 막아내는 성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또한 일본이 우리 국민을 죽이며 국권을 빼앗으려 할 때 많은 사람이 손에 낫과 죽창을 들고 의병이 되어 맞서 싸웠습니다. 무기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지만, 의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내쫓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죠. 우국충정을 가진 청년을 양성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학교가 설립되는 계몽운동이 펼쳐집니다.


이것을 두고 일부 사람만 참여한 것을 확대해석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분이 있다면 저는 국채보상운동을 이야기하고 싶네요. 일본은 식민지를 만드는 일환으로 대한제국의 재정자립도를 낮추기 위해 1년 국가 예산을 뛰어넘는 1,300만 원을 빚지게 합니다. 일본의 의도를 알아챈 국민은 하나같이 나랏빚을 갚자며 쌈짓돈을 의연금을 냈어요. 너무도 빨리 모금액이 채워지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던 베델과 양기탁 선생을 불법적으로 체포 구금하여 방해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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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조선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잖아요.

식민지로 전락한 원인으로 안으로는 나라보다는 개인의 부와 권력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들을 처단하지 못한 데 있겠죠. 대표적으로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이 있을 겁니다. 밖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본을 지지한 영국과 미국 같은 국가들이 있습니다.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영국은 일본에게 무기와 군비를 제공하고, 미국은 일본에게 한반도의 지배권이 있다고 인정하며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유리할 수 있도록 일본을 도와주죠.

반면 고종과 정부는 우물 안 개구리로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서로 도와주자는 거중조정이란 항목을 가지고 미국에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요. 결국 러일전쟁 중에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고, 식민지로 만드는데 필요한 기구인 통감부 설치를 승인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합니다.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보내지만, 이 일로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는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순종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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