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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재현 Jul 26. 2024

독서노트 :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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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인 김범석 작가님의 저서"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를 읽고 독서노트를 작성해보았습니다. 인사이트를 주었던 문장을 발췌하였습니다.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 도움을 주신 김범석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인생의 시간을 잘 쓰고 있는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수명이 과거에 비해 놀라울 만큼 늘어났다. 의사로서 참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지연된 죽음과 늘어난 삶의 시간들을 지켜보며 좀처럼 한 가지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 삶의 시간은 더 주어지는데 이 늘어난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쓰고 있을까? 인생에 주어진 시간을 잘 사용하고 있는 걸까?


강할 때야 별 생각이 없겠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면 사람들은 생각이 많이 변한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어차피 죽고 나면 내 몸이 썩어 없어진다는 것도 생각하게 된다. 아프고 나니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아픈 다른 사람들도 눈에 들어오며, 할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항암치료>

항암치료를 거부하는 환자들은 생각보다 많다. 완치 목적의 치료라면 당연히 받아야 하겠지만 완치가 아닌 생명 연장을 목적으로 하는 고식적(姑息的) 치료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게다가 일반적인 세포독성 항암치료는 빈혈, 구토, 출혈, 탈모 등의 부작용이 뒤따르는 기본적으로 힘든 치료다.


사람은 한 번 태어난 이상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이것이 인간의 숙명이고 누구에게나 정해진 시간은 있기 마련이다. 항암치료를 하면서 정해진 시간을 뒤로 더 늦출 것인지 아니면 순리대로 살다가 때가 되면 임종을 맞을지에 대한 문제는 정답이 없다. 무리수를 쓰며 항암치료를 해서 억지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보다 순리대로 살다가 때가 되면 돌아가겠다는 생각 자체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니 환자가 항암치료를 거부하는 것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진짜 문제는 그 같은 결정이 대부분은 확고한 가치관이나 인생관에 의해 내려진 게 아니라는 데 있다.


그러나 환자와 보호자는 입장이 다르다. 의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기대여명은 지금까지의 삶이 고작 몇 개월 뒤면 끝난다는 선언이므로 큰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의사가 자신의 절망이나 슬픔을 공감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더 큰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의사에게 상처받았다거나 충격받았다는 환자, 보호자의 사연이 인터넷상에 올라오는 이유다. 이것은 기대여명에 대한 양쪽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고 이 간극을 줄이기는 좀처럼 어렵다.


의사는 아무리 환자의 상처와 충격에 공감하고 절박함을 이해한다고 해도 평균값을 훌쩍 뛰어넘는 기대여명을 말해줄 수 없고, 또 그렇게 살게 할 방법도 없다. 결국 의사든 환자와 보호자든 현실적인 최선은 각자의 자리에서 ‘남은 날들에 집중한다’에 있을 것이다



<만약 더 살 수 있다면?>

그래서 어디까지나 내 욕심인 줄 알면서도 눈앞의 환자에게 물었다.“10년 더 사시면 뭘 하고 싶으세요?”“….”침묵이 흘렀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더 살게 된다면 해보고 싶은 일 없나요?”“….”“뭐, 그런 거 있잖아요.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손주가 중학교 들어갈 때 교복 한 벌 해주고 싶다거나 아니면 고향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뭐 그런 거요.”“….”여러 번의 질문에도 끝내 그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막연히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계획이나 소망 같은 게 없는 것 같았다.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오히려 앞의 그 노인 환자가 이례적인 경우였다. 평범하고 건강한 사람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무엇에 기쁘고 슬픈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모르고 산다. 게다가 죽음을 코앞에 둔 노년의 환자가 자신의 상황에 절망하는 대신 이성적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를 계획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점을 생각해본다 하더라도 남은 날을 ‘더 살고 싶다’는 바람만 되뇌며 보내기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며 사는 건 의외로 쉽지 않다. 사회에 발 들이고 나면 먹고사는 일에 힘쓰느라, 눈앞의 현실에 치여서 스스로에 대해 물을 여력이 없다. 물어서 답을 안다고 한들 훌훌 털고 내 멋대로 살 수도 없는 일이다. 당장 오늘 뭘 먹을지, 뭘 할지 고민하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러나 어쨌든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기 마련이고,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면 그 같은 태도가 습관이 되어버린다. 습관은 관성이라는 가속도를 얹고 삶의 내용과 방향을 바꿔버리기도 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옛말이 그저 옛말이 아님을 살면 살수록 깨닫는다.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태어난다. 일종의 숙제라면 숙제이고, 우리는 모두 각자 나름의 숙제를 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인생의 숙제를 풀든 풀지 않든, 어떻게 풀든 결국 죽는 순간 그 결과는 자신이 안아 드는 것일 테다. 기대여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특별한 보너스일지도 모른다. 


보통은 자기가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채로 살다가 죽기 때문이다.“자, 당신의 남은 날은 ○○입니다. 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물론 이 문제를 다 풀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빈칸으로 남겨두기에는 아쉬운 일이다.



<가족>

우리나라는 대부분 가족 간에 대화를 많이 하지 않는다. “밥 먹자” “어디냐” “집에 언제 오니” 같은 것이 아닌 진짜 대화 말이다. 직장 동료들과, 친구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생각해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들과는 인간관계, 직장 생활의 애환,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서부터 최근에 본 영화나 읽은 책, 취미 같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가족과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나는 간혹 환자 곁에 있는 보호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무슨 노래인가요?”“아버지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실까요?”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럴 때면 가족이어서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가족만큼 서로 모르는 존재도 없지 싶다. 


타인은 모르는 대상이기에 예의를 갖추고 서로 알기 위해 대화하지만 가족은 날 때부터 가족이었므로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고 착각한다. 무슨 문제가 생기든 결국에는 괜찮아질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상처주기 십상이다. 언제나 ‘가족이니까’와 ‘가족인데 뭐 어때’ 그 언저리에서 누구보다 가장 모르는 존재가 되기 쉬운 것이 가족인 것만 같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

죽음을 앞둔 환자들과 진지하게 이야기해보면 생각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죽음 자체보다 죽기 직전에 겪는 통증이 심하고 숨이 차서 힘들고, 외롭고 고통스럽게 죽게 될까 봐 그게 더 두렵다고 말한다. 주변 사람에게 너무 민폐일까 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을까 봐, 사회로부터 고립되진 않을까, 가족에게 짐이 되진 않을까 막연히 걱정한다. 건강했을 때의 모습을 잃고 해왔던 일들을 못 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못 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라는 말이 그저 그런 푸념이 아니라 진심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기적>

그래서 임종을 앞둔 말기 암 환자의 그래프 패턴을 보면 환자가 숨이 멎는 때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추세라면 오늘을 넘기기가 쉽지 않겠구나, 이삼 일 못 버티겠구나 혹은 주말은 버티겠구나, 이런 판단을 하며 보호자에게 설명한다. 그런데 그래프가 흔들리는 걸로 봐서는 분명히 곧 돌아가실 것 같은데 오래 버티는 분들이 있다. 설명이 되지 않는 임종의 지연이다. 이런 일은 드물지만 종종 일어난다.


어차피 과학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라면 임종이 지연될 때 대답할 수 없는 환자에게 묻고 싶어진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지. 알 수만 있다면 알아내서 그 바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은 심정이 된다. 평탄하지 않았을 삶과 지난한 투병 끝에 떠나는 길만큼은 가능한 한 가볍게 떠날 수 있기를, 의사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바라게 되는 것이다.



<긍정>

대부분의 사람들이 긍정을 늘 조건으로 삼는다. 좋은 직장을 구하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부자가 되려면 긍정적이어야 한다, 라는 식이다. 물론 긍정적인 사고는 중요하다. 매사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보다 밝고 긍정적으로 임하는 것이 살아가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암에 걸렸다고 해서 우울해하기만 하는 것보다야 밝게 지내는 것이 환자 자신에게도 훨씬 좋다. 암 진행 상황이 아무리 나쁘다고 하더라도 희망, 인내, 용기를 잃지 않게 되기 때문이고, 삶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다만 결과에 대한 긍정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과정과 태도에 대한 긍정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내가 잘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그 자체가 긍정이어야 한다. 이점을 오해하면 결과에 대한 기대가 과도하게 커져 크게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좋은 결과를 보장해주면 내가 열심히 치료받겠다는 조건부 긍정이 되기도 한다.



<사랑>

암 투병을 하면서도 결혼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을까? 결혼생활은 본디 어렵다. 평생 지속될 것 같던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는 데는 불과 몇 년 걸리지 않는다. 연애 시절은 낭만적인 로맨스물일지 몰라도 결혼생활은 현실이자 냉혹하고 비정한 하드보일드에 가깝다. 사랑은 식어도 돈은 남는 것이라서 헤어질 때는 돈을 두고 다투게 되고 여기에 양가 사람들이 달려들어 서로를 물어뜯는다. 지리멸렬한 싸움이 끝나고 나면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은 증오로 끝나곤 한다. 결혼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 깨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사랑을 시작한 뒤에 마지막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사랑할 때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걸까? 대부분 유한한 시간을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고 살라는 말이다. 어쩌면 사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할 때에도 그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살면서 가끔씩 그 말을 기억한다면 그 두 사람처럼 남은 날들도 최선을 다해서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지지 않고 버티기>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는 무모하게 무턱대고 맞서 싸우기보다는 전략을 바꾸는 게 낫다. 이길 수 없다면 지지 않는 것도 방법이라는 말이다. 끝까지 버틴다는 정신으로 버티다 보면 때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도 한다.


이때 지지 않고 버티기 위해서 몇 가지 갖춰야 할 것이 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파비우스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로마 장군들의 역량에 대해 냉철히 평가하고 있었다. 로마 장군들의 개별적인 역량만으로는 절대 한니발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파비우스는 일찌감치 알았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전투에 임하면서 상대에 비해 부족한 전력과 능력을 인정하는 것, 이것은 자기부정에 가깝다.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인정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이 같은 전략의 목적은 암이 자라는 것의 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환자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기에 이 작전도 언젠가는 무의미해질 테지만 적어도 독한 항암치료로 힘든 상황은 피할 수 있고 나름대로 삶의 질도 유지할 수 있는 데다가 버티면서 시간을 벌 수도 있다. 그렇게 벌어들인 시간으로 환자가 다른 유용한 일을 하도록 독려할 수 있다.


대한민국 의료의 행위별 수가 제도는 뭔가를 해야만 보상이 뒤따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학저널도 뭔가를 해야만 논문을 실어준다. 뭔가 했다고 칭찬하는 사람은 있어도 하지 않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승리에 환호하지만 지지 않음에는 환호하지 않는다. 결과가 예정된 죽음일 때에는 특히 더 그렇다.


과시할 만한 승리는 아니라고 해도 이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지지않는 것도 패배는 아니니까. 암 치료에 있어서 해야 할 것을 하는 것 못지않게 때로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삶을 마무리할 시간>

미국 사람들은 보통 사망 6개월 전까지 항암치료를 받는다. 즉 그들은 삶을 정리하는 데 적어도 6개월 정도의 시간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에 반해 서울대병원 통계상에서 환자들은 사망 한 달 전까지 항암치료를 받는다. 삶을 정리하는 데 고작 한 달의 시간을 가지는 셈이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항암치료를 가장 ‘빡세게’ 하는 나라이고, 여기에서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삶을 정리할 준비를 한다고 봐야 한다. ‘항암치료의, 항암치료에 의한, 항암치료를 위한(of the chemo, by the chemo, for the chemo)’이라고 해야 할까?


삶을 마무리할 최소한의 여유도 없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애를 쓰다 가는 것이다. 불편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게 지금의 우리 모습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 한국은 살기도 힘들지만 죽기도 힘든 나라다.



<죽음이 가르쳐주는 성장>

환자에게 일찍 사실대로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남은 시간이 환자에게는 ‘정신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긴 인생에서 여러 개의 변곡점을 지나고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다. 그 앞에서 좌절하기도 하지만 성장하기도 한다. 


거센 파도를 넘고 폭풍우를 헤치며 항해하는 선장은 겪어낸 시련과 좌절만큼이나 항해술이 늘지만, 늘 평온하고 잔잔한 바다만 항해하는 선장의 항해술은 늘 거기에서 거기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며 삶을 정리해나간다는 것은 극히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분명히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깊어질 수 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무슨 성장 따위를 운운하느냐고 속 편한 소리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무한히 지속될 것 같았던 생이 유한하고 소중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가치관은 분명히 변한다. 암 환자의 경우 하루하루를 일상의 반복으로만 보내지 않고 누구보다 더 의미 있는 매일을 보낼 수 있다는 말이다


<때로는 이기적이야 이타적일 수 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이고 병원 일이라면 나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해야 한다고 나를 몰아붙였던 스스로가 문제였다. 열심히 일할수록 지쳤다. 지쳐가는 나를 스스로 돌보는 일은 외면했다. 나라도 나를 돌봤어야 하는데 모든 상황에 내가 우선순위가 아니었으므로 방치한 채로 두었다. 


몸도 마음도 해졌다. 마음이 지치니 몸은 더 무거워졌다. 실제로 체중도 붙고 보는 사람마다 피곤해 보인다, 안색이 안 좋다 등등 한마디씩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말조차 하지 않고 그저 내 눈치만 살폈다. 언젠가부터 환자들에게 불친절해지고 전공의 선생님들에게 짜증을 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휴가지에서 깨달은 사실은 내가 안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평온하지 못하니 내 주변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변화가 필요했고 해결책이 필요했다.


누군가를 돌볼 때에는 어느 정도는 이기적이어야 이타적이 될 수 있다. 결국 이기심과 이타심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내가 편하기 위해서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심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볼 수 있고 스스로 평온함을 찾을 수 있는 이기심은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보호자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서 나 자신을 보살펴야 하는 스스로의 보호자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를 가장 먼저 돌볼 사람은 나뿐이다.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을 때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과 여력이 생긴다. 이타적이기만 하려다가 스스로를 돌보지 못해서 다른 사람도 돌보지 못하는 것은 결코 바람적인 일이 아니다.



<마지막이었음은 늘 지나서야 깨닫는다>

첫 만남, 첫사랑, 첫눈, 처음 학교 가던 날, 첫 월급…. 우리는 대부분 첫 순간을 잘 기억한다. ‘처음’의 순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분명하고 저마다 거기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마지막’은 잘 모른다.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음은 늘 지나서야 깨닫기 때문이다. “아, 그게 끝일 줄 몰랐지”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일까? 처음이 긴장과 설렘으로 수식된다면 마지막은 씁쓸함과 아쉬움, 후회 같은 단어가 뒤따르곤 한다. 그건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끝내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는 종양내과 의사이지만 마지막을 예감하고 뒷정리를 하고 나오는 환자를 별로 보지 못했다. 임종을 앞둔 말기 암 환자조차도 집을 나서면서 이 외출이 집을 나서는 마지막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병원에 머무는 것은 ‘잠시’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대개는 그 상태로 ‘갑자기’ 임종을 맞는다. 아마도 대부분 그 집에도 내 아버지의 남은 물건들처럼 고인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그대로 남겨져 있을 것이고, 그것이 그 고인의 마지막 흔적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종종 그조차도 책상 정리를 하듯이, 집을 치우듯이 평소에 정리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흔적들을, 나의 관계들을, 나의 많은 것들을 오늘 집을 나서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살펴야 한다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고 지금의 내 흔적이 내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덜 어지르게 되고, 더 치우게 된다. 좋은 관계는 잘 가꾸게 되고 그렇지 못한 관계는 조금 더 정리하기가 쉬워진다. 홀가분하게, 덜 혼란스럽게 자주 돌아보고 자주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만 잊고 사는 것이 아니다. 삶도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이 삶을 느끼지 않고 산다. 잘 들어보라. 삶을 잊은 당신에게 누군가는 계속 말을 걸어오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종착역에 당도한 이들은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묻는다. 이제는 남아 있는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서 대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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